141화
저벅, 저벅, 저벅.
무거운 발소리가 들린다.
발레리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쇠창살 너머를 쳐다봤다.
테렌스.
훤칠한 실루엣을 보니 그가 맞다.
왼손에 등불을 들고 있었다.
몰라보게 수척한 얼굴이었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는 가만히 서서 쇠창살 너머의 발레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텅 빈 듯한 시선으로.
발레리는 쪼그려 앉은 동작 그대로 돌처럼 굳었다.
“…….”
날 원망하려고 찾아온 걸까.
아마 그렇겠지. 엄청난 배신감이 들겠지. 나와 함께했던 기억이 없더라도 그럴 거야. 그전에도 날 믿고 아끼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아무 말이 없을까.
할 말 많을 텐데. 따지고 싶은 것도 많을 거고.
발레리는 앉았던 자리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발목의 족쇄를 이끌고 절뚝거리며 쇠창살 쪽으로 두 발짝 다가갔다.
이 와중에도 구질구질한 욕심이 났다.
그를 조금만 더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
여전히 테렌스는 발레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때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아름다운 연청색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눈빛은 가뭄 든 땅처럼 파삭파삭 메말라 있었다.
아마 기억이 없어서 그렇겠지.
발레리는 침묵 끝에 입술을 떼었다.
“…다 들으셨죠. 잘 됐어요. 원래 이렇게 될 거였어요. 난 모두를 속였고, 죄를 범했으니까요.”
“…….”
“왜 말이 없어요. 욕 푸지게 해도 되는데…. 아 맞다, 근데 혹시….”
발레리는 쇠고랑을 찬 양손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테렌스는 그녀의 손목에 난 빨간 쇠고랑 자국을 보다가, 왼손 약지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부탁이 있는데 이것 좀 빼주실래요? 제가 하려니까 죽어도 안 빠지고, 기사들이랑 간수들도 못 빼서, 하하….”
어차피 이 남자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본인이 이 반지를 끼워 줬다는 사실을.
발레리는 어쩌면 테렌스가 이 반지를 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끼워준 장본인이니 빼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다.
“…….”
그녀의 부탁에도, 테렌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발레리는 의심했다.
뭐야, 혹시 귀가 안 들리나?
그는 표정 변화가 정말 단 하나도 없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싫어요?”
대답도 없다.
테렌스는 몸을 틀어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리고 바깥쪽으로 걸어 나갔다.
“…아니 싫으면 싫다고 하지. 왜 말을 씹고 그래…. 상종하기도 싫은 건 알지만….”
발레리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망연히 서 있었다.
그래도 만족했다.
테렌스를 잠시나마 볼 수 있었으니까.
약기운을 이기고 잘 깨어났다니 그것만으로 다행이었다.
***
프리다의 출정 전날, 발레리에 대한 비공개 재판이 시행됐다.
재판은 배심원 아홉 명과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이뤄졌다.
발레리 없이 진행된, 피고 없는 재판이었다.
배심원 중에 법관은 없었다. 모두 켄트웰 대신전의 사제들이었다.
찬성 8과 반대 1로 사형 판결이 떨어졌다.
물론 황제가 찬성을 강하게 밀어붙인 결과였다.
단 한 명만이 사형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
반골 기질이 강한 사제 셀레스틴이었다.
예상 못한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결과에 영향을 미치진 않았으므로, 황제는 딱히 그녀에게 불만을 제기하진 않았다.
이로써 발레리는 죽게 됐다.
하지만 황제는 집행일을 공란으로 남겨두었다.
언제 형을 집행할지는 재량으로 결정하겠다면서.
딸이 중요한 순간을 앞둔 상황에서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고 싶진 않았다.
혹시 부정이라도 탈까 봐.
그리고 언제든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문제니까.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일에는 어쨌든 신중을 기해야 하니까.
이 같은 선고 결과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프리다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출정을 불과 하루 앞두고, 황제는 딸에게 충격을 줄 생각이 없었다.
이 소식을 받아든 사람은 따로 있었다.
황태자궁에서 업무를 보던 테렌스였다.
***
발레리는 쇠창살 너머로 통보를 받았다.
간수는 자못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도둑 계집애, 네가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노라고.
집행일은 공란이고, 추후 황제가 날짜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간수는 내심 안타까웠다. 스물세 살짜리 여자애가 대뜸 잡혀 들어와서 사형 판결을 받은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철저히 외부인이었으므로, 황녀가 석실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
당연히 발레리가 황녀 유괴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것도 알 리가 없었다.
그냥 감옥에 집어넣으라고 하니까 집어넣었고, 사형 판결을 받았으니 그 내용만 알렸을 뿐.
“간수님, 저는 어떻게 죽어요? 교수형? 참수형?”
간수는 황당했다. 이렇게 태연하게 형 집행 방식을 묻는 죄수는 처음이었다.
“…단두대에 서게 될 거다.”
그렇구나.
목이 잘리는구나.
죽음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차라리 속이 시원했다.
왠지 마음이 놓였다.
이상하게도 세상에 미련이 없었다.
이제 의뢰인도 없고, 임무 같은 것도 없다.
회한으로 남는 게 있다면.
단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다는 것.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
‘하지만 만약에 황녀님을 마왕에게 넘기고 마력석을 얻어 단원들을 구했더라도….’
후회했을 것이다.
단원들에게도 떳떳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마 고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애먼 사람을 제물로 바쳐 당신들을 망명시켰노라고.
스스로도 죄책감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저를 믿어 준 황녀를 유괴해 영영 지하세계에 갇히도록 했다면.
아무튼 이제 죽는다.
중죄를 저질렀으니, 아마 죽어서 지하세계로 끌려가게 되려나.
발레리는 지하세계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막연히 이렇게 생각했다.
“죽은 단원들…. 로이, 폴, 러셀…. 거기서 다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러 생각을 하던 도중 또 손님이 찾아왔다.
테렌스였다.
이번에도 창살 너머로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다.
발레리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무래도 말을 섞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어차피 대답 안 할 것 같으니까.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을 받으며 잠자코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테렌스는 한 시간쯤 머문 끝에 돌아갔다.
발레리는 그 뒷모습을 쳐다보며 조용히 혼잣말했다.
“…나 죽는 거 알고 왔나.”
말이라도 한마디 해 줬으면 좋겠다.
왜 멀거니 서 있다만 가는 건지.
나한테 바라는 게 뭔지.
자신이 똑똑히 보는 앞에서, 처절하게 죄책감을 맛 보라는 건지.
그거라면 이미 느끼고 있는데.
여기서 더 아파해야 하는 걸까.
지난 추억이 방울방울 샘솟을 때마다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참회하는데.
나머지 시간에는 겸허히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곧 출정할 황녀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면서.
나와의 시간을 잊어버린 당신이, 언젠간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길 바라면서.
***
발레리가 수감된 뒤 프리다는 시름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 발레리는 나한테 잘못한 거야. 나한테 잘못한 거니까, 내가 용서하면 되는 거잖아요. 발레리는 결국 나한테 아무것도 안 했다고요!”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발레리를 선처해 달라 호소해도 돌아오는 건 황제의 침묵뿐이었다.
물론 프리다에게도 발레리에 대한 원망은 남아있었다. 그녀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정체를 속이고 접근해, 신뢰를 얻은 뒤 마지막에 모든 걸 뒤엎어 버렸으니.
하지만 마지막 순간, 결정적일 때에 발레리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진심 어린 태도로.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선 아무런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서 프리다의 마음이 동했다.
그때 그녀와 함께 와이어 숲에 가려고 했던 이유였다.
마침 속으로 기지를 생각해 내기도 했다.
“발레리한테 잡혀 온 척하면서… 허점을 노려서 해치울 수도 있었을 것 같았는데. 그럼 발레리도 마력석을 얻을 수 있고, 나도 예상보다 일찍 자유가 되니까….”
하지만 기회는 사라졌다.
두 여인은 무참히 황궁으로 잡혀 들어와 각자의 장소에 구금됐으니.
그렇다고 침대에서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프리다는 언제나처럼 일어나자마자 석실 연무장으로 향했다.
곧 출정이다. 목표가 있으니 정진해야 했다. 프리다는 발레리에게서 배운 대로 검술 연습을 계속해서 이어 갔다.
집사인 켄드릭이 탑에 구금됐기에, 최근에 복직한 로저 경이 다시 집사를 맡게 됐다.
로저 경은 아내의 병세가 생각보다 길어지자 휴직 기간을 연장했었고, 최근 아내의 상태가 나아져서 막 복직한 참이었다.
그는 발레리와 켄드릭을 대신해 프리다의 검술을 봐주었다. 이전이라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향상된 황녀의 실력에 매번 놀라면서.
어느덧 결전의 날은 다가와 있었다.
바로 오늘.
오늘 오후에 떠나야 약속한 시각에 와이어 숲에 이를 수 있었다.
프리다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달력에 마지막 X 표시를 했다.
“발레리. 꼭 돌아와서 내가 꺼내 줄게요. 비록 내가 지금은 갇혀 있어서 힘이 없지만…. 돌아오면 목소리 크게 낼 수 있을 거야.”
황녀의 손에는 발레리가 쓰던 양철 투구가 들려 있었다.
프리다의 검 끝에 찔린 흔적이 곳곳에 선명하게 패어 있었다.
그만큼 발레리는 몸을 사리지 않고 프리다와 대련했고, 실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유도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요. 아버지도 내가 돌아온 게 기뻐서 발레리를 사면해 줄지.”
한때 제 처지를 비관하던 프리다는 이제부터 희망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발레리는 저를 속인 기만자였으나, 동시에 구원자이기도 했다.
프리다는 확신했다. 발레리가 없었다면 아마 검술의 기초 실력을 닦기도 전에 지쳐서 포기했을 거라고.
보검을 들고 출정에 나설 의지조차 없었을 거라고.
이렇게 감히 자유를 꿈꾸지도 못했을 거라고.
“…이번엔 내가 구해줄게. 발레리가 절망 속에서 날 구해줬으니까.”
하지만 프리다는 모르고 있었다.
발레리가 곧 죽을 목숨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