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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40)화 (140/173)

140화


“…저, 전하? 이제야 정신이 드십니까?” 

테렌스가 눈을 떴다.

잠든 지 열흘 만의 일이었다.

그의 침대맡을 하루 종일 지키던 레이븐은 팔짱을 낀 채 졸다가 번쩍 깼다.

얼핏 상관의 하늘색 눈동자가 움직이는 게 보인 것 같아서다.

테렌스는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레이븐은 그의 허리를 부여잡고 거동을 도왔다.

오랜만에 깨어나서일까.

시야가 온통 흐렸다. 겨울철 유리창에 김이 서린 것처럼.

테렌스는 고개를 한 번 세게 가로저은 뒤 눈을 부릅떴다.

침대 맞은편에 초상화 한 점이 흐릿하게 보였다.

한 여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흑단 같은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리고, 검은 눈동자를 차분히 빛내고 있는.

“…저거 치우는 걸 깜빡했네요. 얼른 떼겠습니다.”

레이븐은 후다닥 벽으로 달려가 초상화를 떼어 밖에 내놓고 들어왔다.

다시 침실로 들어온 레이븐은 그의 곁에 앉았다. 테렌스는 여전히 혼몽한 상태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 곁에서 레이븐은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이야기했다.

발레리의 정체는 도적이었다고. 프리다를 보검과 함께 마왕 앞에 바치려 했었다고. 마력석을 대가로 받기 위해.

지금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고.

테렌스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

“발레리가 잡혔다.”

피어스는 북부 아지트로 복귀하자마자 단원들에게 사실을 알렸다.

펠런의 막내이자 보배인 발레리의 체포 소식에 단원들은 충격에 빠졌다.

“죄가 클 거다. 아마 무거운 처벌을 받을 거야. 내가…. 그 어린 것한테 내가…. 너무 많은 짐을 지웠어.”

피어스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여관에 기사들이 들이닥친 상황에서, 발레리라면 날래게 도망칠 줄 알았다. 분명 그럴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초연한 얼굴로 체포당할 줄은 몰랐다.

루카스와 케빈을 포함한 모든 단원은 우두망찰 서 있었다.

이제 스무 명이 남은 단원들 앞에서 피어스는 모든 걸 털어놓았다.

엄청난 양의 마력석이 달린 의뢰를 하나 받았었다는 사실을.

황녀와 보검을 의뢰인에게 넘기고, 그 대가로 마력석을 얻어 망명 자금으로 쓰려 했다는 것을.

단원들은 할 말을 잃었다.

곧이어 원성이 터져 나왔다.

“두목, 우리가 아무리 위험에 처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무모한 일을….”

“두목. 의뢰인이 황녀를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했더라도, 그것만 믿고 수락하시면 어떡합니까….”

“그럼 발레리가 우리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한 겁니까? 하아, 그 어린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요!”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피어스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이야기가 더 나오기 전에 제 결심을 이야기했다.

“…날 신고해라.”

“네? 두목,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 목에 걸린 현상금. 그거면 다는 아니어도…. 벽보에 얼굴 나붙은 애들은 다 망명할 수 있을 거다.”

“아니 두목,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세요! 저희가 어떻게 두목을 신고합니까?”

루카스가 버럭 대들었다.

“이미 너무 많은 애들이 죽었다. 내가 욕심을 부리다가 이 사달이 났어. 모든 건 내 책임이다. 다 내가 꾸민 일이라고, 그렇게 자수하겠다. 그게 사실이니까.”

“…두목.”

“루카스, 케빈, 콜린, 대릴, 토비. 너희들은 기록도 깨끗하니, 국내에서 얼마든지 손 털고 다른 일 찾을 수 있을 거다. 모두를 위해 희생해 줘서 고맙다.”

“헛소리하실 거예요? 저희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분은 두목인데. 저희가 어떻게 두목을 배신해요?”

케빈이 피어스의 눈앞까지 다가가 윽박지르듯 말했다.

하지만 피어스의 마음을 바꾸진 못했다.

“신고하기 전에 날 매우 쳐라. 제압당해서 간 것처럼 보여야지. 내 몸이 멀쩡하면 너네도 의심을 받을 테니까.”

“하, 뭐라고요?”

“신고하면서…. 그동안 우리가 수락한 의뢰서랑, 내가 모아둔 귀족들의 비위 증거물 중에 일부를 황궁에 보내. 그럼 반응이 올 거다.”

그는 완고했다.

단원들 중 아무도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

황제는 직보를 받았다.

누군가가 직접 신고를 했다.

펠런의 두목 피어스를 잡아 신병을 확보하고 있다고.

그 증거품으로 그가 펠런에서 받았던 의뢰서와 귀족들의 부정축재 재산 목록 등을 보내왔다고.

“서재로 올려 보내라 해. 내가 직접 보겠다.”

펠런. 볼드윈 공작은 발레리가 그 집단의 소속이라고 했다.

황제도 펠런의 명성을 익히 알았다. 귀족들의 최대 천적이었으니까.

펠런이 활발히 움직이던 시절, 좀 낌새가 이상하다 싶은 귀족이 있으면 꼭 펠런의 표적이 되었다.

거기서 단서를 얻어 황제는 귀족들의 약점을 잡아 흔들곤 했었다. 황제의 입장에선 펠런이 활개 치고 돌아다니면 오히려 편했다.

간접적으로 황권이 강화되니까.

그래서 적극적으로 잡지 않았다. 펠런 잡기에 혈안이 된 귀족들이 알아서 하겠지, 하고 내버려 둘 뿐.

하지만 몇 년 전부터 펠런은 활동을 완전히 멈추고 잠적했다. 

그 신출귀몰한 집단의 두목이 잡혀 들어왔다니.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황제는 보좌관이 가지고 온 증거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꼴딱 밤을 새워 버렸다.

솔직히 감탄했다. 펠런의 정보력은 거의 특수 정보기관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귀족들의 무능과 부정부패로 인해 권리를 침해당한 이들은 속속 펠런에 부당함을 고발하고 있었다.

피해자들의 억울한 사연을 취득하고, 의뢰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펠런의 정보망은 무한히 뻗어나갔다.

펠런이 악랄한 집단이라는 건 귀족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었다.

귀족들의 부정축재 재산을 훔쳐 저들이 가지는 것도 아니고, 원래 그걸 가져야 했던 사람에게 돌려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대가로 챙기는 수수료는 미미해 보일 정도였다.

“…이런 조직이었을 줄은 몰랐군. 귀족들은 그저 도둑놈이라고만 하니….”

펠런은 실로 조직력이 엄청났다. 기록을 남기는 것만 봐도 그랬다. 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정보를 취득하고, 곳곳에 잠입해 표적물을 습득하는 과정이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황제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다.

30년 전,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금지 독초 ‘레퀴나스’를 볼드윈 공작이 은밀히 재배했다는 내용의 문서가 존재했다.

레퀴나스를 키운 밭에서 취득했다는 샘플까지, 아주 낡은 종이봉투에 담겨 있었다.

“공작이…. 레퀴나스를?”

황제는 흥분했다. 레퀴나스는 전대 황제이자, 황제의 친형인 카메론 3세가 돌연사한 후 그의 혈액에서 나온 성분이었다. 바로 30년 전 그 당시에.

누군가의 독살이 분명했지만 명확한 증거와 배후를 찾지 못해 미해결로 끝난 사건이었다.

차남이었던 지금의 황제가 보위에 오른 계기이기도 했다.

사건 당시 피어스는 펠런을 결성하기 전이었고, 흥신소를 갓 차린 젊은이였다. 그는 누군가에게서 의뢰서를 받은 뒤 현장으로 가서 공작이 재배하던 독초를 증거로 채취했고, 곧바로 밭을 다 태워버렸다.

“아마 이자가 조금만 더 일찍 움직였다면…, 형님이 돌아가시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군.”

황제는 떨리는 손끝으로 봉투를 열었다. 바싹하게 마른 갈색 잎사귀가 나왔다. 독초를 다룬 식물도감에서 봤던 그 갈퀴 모양의 잎사귀가 맞았다.

다음 날 아침, 황제는 곧바로 황실 전속 식물학자를 불러 잎사귀의 분석을 맡겼다.

돋보기로 잎사귀를 여러 번 들여다본 학자는 상당히 놀라는 반응이었다.

“…레퀴나스가 맞습니다. 상당히 오래됐지만, 보존 마법이 걸려 있어서 손상이 덜하네요. 그런데 폐하. 이 멸종 식물을 대체 어디서 나신 겁니까?”

그의 분석을 듣던 황제는 조용히 결론지었다.

“…피어스 밀러. 이자는 그냥 도적이 아니야.”

며칠 후 피어스는 잡혀 들어와 지하 감옥에 갇혔다.

황제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에게 달려갔다. 신고자가 얼마나 패 놨는지, 피어스는 얼굴과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그래서. 발레리라는 계집이 네 조직의 일원이 맞는다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발레리가 펠런 소속이라는 볼드윈 공작의 주장은 사실로 확인됐다.

“그 계집이 내 딸을 유괴해서 마왕 앞에 데려가려 했어. 단독 행동이라는데, 맞나?”

“아닙니다. 제가 모두 시킨 일입니다. 그 아이는 의뢰인이 누군지도 몰랐고, 그저 황녀를 데리고 오라는 제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하하, 그 계집이 혼자 뒤집어쓰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던 거군. 꼴에 제 식구 아낀다고. 펠런, 아주 끈끈한 집단이야.”

황제는 비소를 머금고 비꼬았다.

“폐하, 그 아인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한 일입니다. 단원들의 망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의뢰를 받은 겁니다. 사건의 몸통은 접니다.”

“그 계집이 꼬리에 불과했다고 해도 형을 감면해 줄 생각은 없다. 너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봐. 딸 같은 애를 잃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펠런에 가졌던 흥미가 무색하게도, 황제는 그를 봐줄 생각이 없었다.

“…폐하. 제발…. 제발 발레리만큼은….”

“닥쳐라. 즉결 처분하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히 여기는 게 좋을 거다.”

황제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면서도 생각했다.

피어스.

내 딸을 마왕에게 넘기려 했던 자.

자백을 들었으니 마땅히 죽여야 할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자의 행적을 속속들이 알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죽이기엔 아까웠다.

잠시나마 살려두면 쓰임새가 있을 것이다.

“…너에 대한 재판은 추후에 열도록 하지.”

“폐하, 폐하께 도움이 될 만한 자료는 더 있습니다. 얼마든지 더 드릴 수 있습니다. 발레리가 아니라 절 죽이셔야 합니다. 제발 우리 발레리만큼은…. 살려 주십시오.”

“네가 아무리 두둔해도, 내 딸을 뼛속까지 속이고 직접 유괴한 자다. 죽일지 말지는 재판 결과를 봐야 알겠지.”

황제는 말을 맺은 뒤 곧바로 자리를 떴다.

***

지하 감옥 생활이 며칠이나 됐을까.

밤낮이 얼마나 반복되는지 세어 본 적도 없었다.

어차피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발레리는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어쩔 땐 정신이 나가 있고, 어쩔 땐 정신이 돌아왔다. 아마 기억이 나지 않는 순간은 자고 있었겠지 싶었다.

아직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두목 피어스가 자수를 하고 잡혀 들어왔다는 사실을.

이날 발레리는 반쯤 썩다시피 한 빵을 잘근잘근 씹어 입에 넣고 있었다.

알량한 몸뚱이가 자꾸 배고프다고 울부짖으니 별수 있나. 어차피 죽으면 썩어 없어질 것이 참 시끄럽게도 군다.

고작 하루 더 살겠다고, 입에 먹을 걸 넣는 게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런데도 빵에 손이 가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전하? 전하께서 여긴 어찌….”

밖에서 간수의 놀란 말소리가 들렸다. 발레리는 빵조각을 입에 가져가려다 말고 동작을 멈췄다.

“간수 양반,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실래요?”

이 목소리는….

레이븐. 테렌스의 호위 마법사. 그의 음성이었다.

“아, 예, 그럼요. 당장 물러가겠습니다.”

“전하, 저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일 보고 나오세요.”

발레리의 손에서 빵조각이 툭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심장도 쿵 내려앉았다.

지금, 이 지하 감옥에….

그 사람이 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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