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얼마 전, 볼드윈 공작은 발레리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받아들었다.
남아 있는 수하들이 프레이저 후작령의 상점을 속속들이 조사한 결과, 발레리의 얼굴을 알아보는 인물이 있었다.
펠런과 오랫동안 거래해 온 방앗간 지기이자 장물아비인 요제프였다.
처음에 그는 모르쇠로 잡아뗐으나, 목에 칼이 드리워지자 아는 것들을 술술 불었다.
—히익! 그 뭐냐, 착한 도적단…. 펠런, 그래. 펠런의 막내 단원이에요. 조그만 여자아이일 때부터 봤습죠.
곧바로 공작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발레리 로빈슨은, 사실 도적단 펠런의 일원이었다고. 신분을 속여 황궁 병사로 입대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오호라. 너도 어김없이 쥐새끼였구나.”
볼드윈 공작은 임시 가주인 딸 에이바에게서 전서조를 빌렸다.
황제에게 급히 보낼 서신이 있다면서.
에이바는 그 서신 내용을 본인이 열람하는 조건 하에 전서조 파견을 허락했다.
공작은 즉시 책상에 앉아 깃펜에 잉크를 찍고 글을 써 내려갔다.
「폐하.
염치를 불고하고 죄인이 감히 상소문을 올리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웬 쥐새끼가 황궁에 숨어 들어가 있었다고 합니다.
발레리 로빈슨. 폐하께서 병사로 받아주신 그 계집 말입니다.
평민으로 신분을 속이고 들어간 도적입니다.
아마 황궁에서 가장 값진 것을 훔쳐 달아날 겁니다.
펠런. 그 계집이 속한 도적단은 그런 벌레들이니 말입니다.
즉시 사로잡아 엄중히 처벌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이 나라 모든 귀족들이 바라 마지않는 일일 겁니다.
부디 제 마지막 충정을 믿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스카 볼드윈」
마침 황제는 새벽이 밝을 때까지 한잠도 못 자고 있었다.
프리다가 사라진 바로 다음 날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들인 테렌스까지 원인 모를 깊은 잠에 빠져 깨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 부부에게는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날이었다.
절절한 고통에 신음하던 황제는 창가에 날아든 전서조에게서 바로 서신을 받아들었다.
서신은 발레리 로빈슨에 대한 공작의 폭로를 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군을 제대하고, 프리다의 스승 일 또한 그만두었다.
마침 프리다가 사라진 때에 맞춰서.
평소라면 공작의 말에 반신반의했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황제는 그의 폭로가 사실일 가능성에 걸어 보기로 했다.
황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훔쳐 달아날 자라고 했다.
공작의 서신은 황제의 손아귀에서 처참한 모양으로 구겨졌다.
‘너였느냐. 내 딸을 훔쳐 달아난 자가.’
***
황제의 지시대로 문지기들은 발레리를 붙잡아 왔다.
또다시 그녀는 지하 감옥에 던져졌다.
얼마 안 되는 소지품은 기사들에게 모두 빼앗겼다.
하나만큼은 지켰다.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 하나.
기사들은 그 반지를 빼려고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완력으로 되지 않았고, 기름칠도 통하지 않았다. 황궁 마법사를 불러와 염력까지 썼지만 실패했다.
기사 한 명은 발레리의 왼손을 붙들고 십여 분을 씨름하다가, 그녀가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자 손을 확 뿌리쳤다.
“여자라서 봐준 줄 알아. 남자였으면 벌써 손가락 잘라버렸어.”
발레리는 차라리 기사들이 손가락을 잘라서라도 반지를 빼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작은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에이, 보석도 없고 볼품없이 생긴 반지인데 그냥 놔두죠. 저거 빼서 우리가 뭐 한다고요.”
결국 기사들이 포기했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의 손에 끼워진 낡은 반지가 이 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 엘로이스의 유물이라는 사실을.
어쨌든 발레리의 수감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쇠고랑과 족쇄가 채워졌다.
발레리는 낯설지 않은 음습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과거를 떠올렸다.
황태자궁 병사 시절, 냇가에서 테렌스에게 발각돼 체포됐던 그 일을.
차라리 그때 즉결 처분돼서 죽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그에게 약을 먹여 재운 지 일주일이 지났다.
아마 지금쯤이면 깨어났겠지.
내가 황녀님을 유괴했다가 잡혀 들어왔다는 사실도 전해 들었을 거야.
철컥.
자물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간수였다.
“어이, 도둑 계집애. 황제 폐하께서 직접 심문하신다고 한다. 채비하고 있어라.”
***
황제는 직접 지하 감옥까지 행차하는 수고를 보여주었다.
어두침침한 면회실에서 그를 마주한 발레리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갑이 의자 뒤에 고정돼 있어서. 반지 낀 손가락을 황제 앞에 내보이지 않을 수 있어서.
발레리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왜 이 손가락을 숨기고 싶을까. 알량한 약지를 잃고 싶지 않아서? 테렌스와의 관계를 들키는 게 두려워서?
어느 쪽이더라도 참 구차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맞은편의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의 푸른 눈에는 핏발이 가득 서 있었다. 부스스한 백금발은 어깨 위에 멋대로 늘어진 상태였다.
“…도적 아가씨.”
딸을 유괴한 범인에게 아가씨라니. 과분한 호칭이었다. 도적이라 부르는 걸 보니 이미 신상 파악은 마친 듯했다.
“네, 폐하.”
“왜 내 딸은 아가씨 잘못이 하나도 없다고 할까. 분명 내 딸을 데리고 몰래 나간 건 아가씨 같은데.”
다시 석실에 갇히게 된 프리다의 이야기를 듣고 온 모양이었다.
“제가 모시고 나온 거 맞습니다.”
“…어떻게 모두를 재운 건가? 최면 전문 마법사도 그렇게 광역으로 많은 이들을 잠재울 순 없을 텐데.”
“그건—”
발레리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세이렌의 피리. 그걸 말하면 아마 물건을 빌려준 사람에게 불똥이 튈 거고, 수사망이 펠런에게로 확장될 것이다.
“수면초를 썼나?”
황제는 그녀가 수면초와 함께 공기 중 확산을 촉진하는 마법 약품을 혼합해서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상식적으로 그렇게 여러 명을 재우려면 그 혼합물을 기화해 공기 중에 퍼뜨리는 방법밖엔 없었다.
“…네.”
결국 그녀는 거짓으로 대답했다.
“흠, 왜 스스로 잡혀 들어온 거지? 기사들 말로는 아무런 저항 없이 수갑을 채워달라 했다던데. 프리다가 도망가라고 소리 지르는데도 안 듣고 가만히 있었다고 하더군.”
프리다와 발레리를 잡아 온 문지기들은 보고 들은 그대로를 황제에게 진술했다. 열 명의 증언이 모두 일치했으니 사실일 것이다.
모두 입을 모아 이상하다고 말했다. 발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로 체포당했다는 사실이.
“…그만한 잘못을 했으니까요.”
“그렇게 자수한다고 내가 감경을 해 줄 거라고 생각했나?”
“아뇨, 감경을 바라진 않습니다.”
“그래. 그럼 이유를 묻지. 내 딸을 데리고 나간 이유가 뭐냐. 정말 프리다가 외출을 원해서 거기까지 간 건가? 그 남쪽 끄트머리 광산촌까지?”
황제의 질문에 발레리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이름 모를 누군가로부터 의뢰를 받았노라고.
황녀를 데려오고, 보검을 가져오라는 내용의.
황녀를 해치지 않는다고 피의 맹세까지 하기에 덜컥 받아들였고, 이를 위해 황궁에 위장 입대해 황녀에게 접근했다고.
“…그래서 황녀님을 꾀어 나왔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간 끝에 의뢰인이 마왕이라는 걸 알았고…. 더 이상 일을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
“황녀님이 보검을 빼앗기고 지하세계에 갇히는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진술에서 피어스와 단원들의 이야기는 완전히 빠져 있었다.
발레리는 이미 결심한 상태였다.
사건의 전말을 혼자 떠안은 뒤 조용히 사라지기로.
이 사건은 본인의 선에서 모두 종결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걸 믿으란 말인가. 오벨론이 아가씨에게 제시한 대가는 뭐였지?”
“마력석입니다. 그걸 팔아 거부가 되고 싶었습니다.”
황제가 맞은편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왔다.
—짝.
그가 커다란 손으로 발레리의 왼쪽 뺨을 내리쳤다.
눈앞에 별이 보일 정도로 얼얼했다.
“하하하, 돈에 눈이 멀어 우리 프리다를 유괴했다 이거지. 검술 선생 노릇을 하면서 꾀어냈고.”
“…네.”
“죽어 마땅한 죄임은 알고 있나? 결과가 어떻든 너는 마왕의 앞에 프리다와 보검을 갖다 바치려 했었다. 내 딸을 팔아치우려 했던 거라고! 그 악마 같은 새끼한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은 너 혼자서 꾸몄다 이거지.”
“네, 그렇습니다. 제 소속 도적단과는 관계없는 단독 의뢰였습니다.”
“흠, 내 무기고에서 발견된 반딧불이 사체. 내 금고에서 나온 야광석 가루. 그것도 전부 네 소행이었나?”
발레리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 흔적이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남았을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잡아뗄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밀려드는 무력감에 고개를 떨궜다.
“…네, 저였습니다.”
“이런 발칙한 것이 있나. 넌 조만간 비밀 재판에 회부된다. 프리다에 관한 사실을 아는 소수의 인원만이 참석하게 될 거야.”
황제는 발레리의 턱을 붙잡고 확 들었다.
발레리는 초점 풀린 눈으로 그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왜 하필이면. 지금 그 사람이 겹쳐 보이는 걸까.
뭐, 아버지니까 닮을 수밖에 없겠지.
“…사제들로 이뤄진 재판에서 네게 유리한 판결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진 마라.”
황제가 나지막이 경고했다. 그는 목소리조차 테렌스와 비슷했다.
***
발레리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켄드릭에게도 불똥이 튈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황녀의 유괴범이 발레리란 사실이 낱낱이 증명되자마자, 그는 황제의 집무실로 끌려와 무릎꿇림을 당했다.
“켄드릭 경. 널 믿었다.”
“…송구합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봐. 그 아가씨에게 가짜 신분을 준 주체로서.”
켄드릭 또한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그래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발레리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짓을 하진 않았을 거라고. 분명 황녀를 데리고 나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어떻게든 그녀를 지켜야만 한다. 진짜 이유를 알기 전까지.
“폐하, 발레리는 황녀님을 유괴할 애가 아닙니다. 그런 애가 그렇게 검술을 정성껏 가르칠 리 없지 않습니까. 진술 드렸다시피 그 아인 정말 스스로 체포돼서 왔습니다….”
“그 입 다물어. 난 분명 신분을 왜 줬냐고 물었을 텐데.”
“…처벌만큼은 피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제 오랜 친구입니다. 십 년을 넘게 봤지만 정말 그런 짓을 꾸밀 아이가 아닙니다.”
“감히 짐의 앞에서 그 계집을 두둔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로구나. 이미 내 딸을 팔아 치우려 한 도적이라는 게 증명된 것을. 정녕 너도 지하 감옥에 갇히고 싶어 이러느냐.”
켄드릭은 얼른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태세를 바꿔야 했다. 방금 발언으로 출정 기회가 날아갈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폐하. 저를 얼마든지 처벌하십시오. 어떠한 벌이든 달게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출정만큼은 가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흠.”
“죽어도 마왕의 최후만큼은 보고 죽겠습니다. 제 발목에 도주 금지 마법을 거셔도 됩니다. 거사가 끝나면 바로 포박돼서 황궁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황제는 오랜 친구의 아들을 무심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이 아이도 그 요망한 계집에게 속았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용서할 수 없었다. 발레리가 황녀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단초를 제공한 주체였으니.
“…출정일 전까지 널 피오르탑에 가둬 놓겠다.”
“네.”
“프리다가 돌아오자마자 널 다시 가두고 기소할 거다. 프레이저 후작의 아들이라고 봐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