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발레리가 다음으로 다다른 장소는 켄드릭의 숙소 창문이었다.
언젠가 켄드릭이 제 방 호수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2층이니까 심심하면 몰래 창문으로 들어오라고.
실제로 찾아온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똑똑.
그의 창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켄드릭은 커튼을 열어본 뒤 반기며 창문을 열어 주었다. 발레리는 그의 널찍한 독방을 둘러보며 테이블에 앉았다.
발레리는 퉁퉁 부은 얼굴이었다. 켄드릭은 걱정스레 연유를 물었다. 왜 울었어. 무슨 일이야.
하지만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한참을 머뭇대다가 입을 열고 하는 말은….
“만약에 말이야.”
“…응?”
“내가 안 좋은 일에 연루되면….”
“안 좋은 일이라니?”
“내 정체는 무조건 모른다고 해. 내 과거 직업이라든지…. 그냥 길에서 웬 꾀죄죄한 고아가 매달려서, 그게 너무 불쌍해서 검술 가르쳐 줬던 거라고. 그냥 그뿐이라고. 그렇게만 말해 줘.”
켄드릭은 맞은편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의 양어깨를 꽉 쥐고 흔들었다.
발레리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제대로 알아야만 했다.
그러나 발레리는 집요하게 따라붙는 그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했다.
“발레리, 좀 똑바로 말해 봐. 안 좋은 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너한테 피해 가지 않게 최대한 노력할게. 그러니까 꼭…. 내 정체 몰랐다고 해. 예전에 했던 법정 진술 다 취소하더라도 말이야. 알았지?”
켄드릭의 녹안이 풍랑을 만난 배처럼 흔들렸다. 무슨 의도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설마 신분을 속였다고 자수라도 하려는 건가.
“너 뭐야. 무슨 일인데. 정체 들킬 일 있어? 아니면 스스로 까발리려고 하는 거야?”
“아니 그냥 혹시 모르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야. 내 가짜 신분이…. 언젠간 드러날 수도 있는 거잖아.”
“네 신분이 왜 드러나. 내가 알기론 로빈슨은 깡촌에서 조용히 사는 사람들인데… 우리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몰라.”
“아니면 차라리 내가 진짜 발레리 로빈슨인 줄 알았다고 해. 내가 너한테마저 신분을 속인 거라고. 그렇게 하면 되겠다.”
“야, 그게 말이 돼? 발레리, 너 진짜 왜 그러는 거야.”
“…밤늦었다. 일찍 자. 나는 갈게. 따라 나오지 마.”
발레리는 이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켄드릭의 침실 창문에서 빠져나왔다.
붙잡을 새도 주지 않았다.
혹여나 켄드릭이 따라 나올까 봐, 그녀는 채플까지 전력으로 질주했다.
속으로는 기도라는 걸 했다.
제발 켄드릭에게는 아무 불똥도 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
발레리는 나선형 계단 중간쯤부터 피리를 꺼내 불기 시작했다. 아마 여기서부터 불어도 소리는 석실 앞까지 들리긴 할 것이다.
—삐이이익. 삐익. 삐이익.
솔직히 정말 호루라기 소리만도 못했다. 이게 어떻게 여신의 피리라고 할 수 있을까.
불면서도 고통스러웠다. 귀에서 피가 날 것 같다. 이런 엄청난 소음을 듣고도 어떻게 잠에 들 수가 있는 거지.
계단이 끝나고 석실로 향하는 복도에 다다르니, 과연 모든 문지기들이 벽에 기대어 몸을 의지한 채 스르르 잠들어 있었다.
모두가 거짓말처럼 숙면에 빠졌다.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막강해 보이던 문지기들이 전부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다니.
발레리는 피리의 힘을 실감하며 석실 철문 앞에 섰다.
잠금장치가 바깥에 붙어 있는 이 철문. 정말 누군가를 감금하기 위해 설계된 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황녀님은 왜 이런 곳에 갇혀 계셨던 걸까.
무려 5년의 시간 동안.
발레리는 잠금장치를 풀며 오래 품었던 의문을 다시 꺼내들었다.
아마 이 궁금증도 곧 풀릴 수 있겠지 기대하며.
철컥, 철컥.
새벽 두 시가 다 된 시간. 노크도 없이 석실 철문이 열리고 있었다.
문지기들은 황녀가 종을 울리거나 육성으로 출입을 허락하지 않으면 석실 문을 열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문을 여는 사람은 누구일까. 문지기들은 왜 막무가내로 문을 여는 이 사람을 왜 말리지 않고 있는 걸까.
프리다는 가죽 바지와 흰 셔츠 위에 짧은 갈색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외출복이 없으니 검술 수련을 할 때 입는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문 앞에서 가슴을 졸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실크 스카프로 싼 보따리를 품에 안고서.
아마 곧 문이 열릴 것이다.
문이 열리고 누가 등장하는지에 따라 운명이 갈릴 것이다.
밖에 나갈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다시 갇힐 것인지.
끼익.
문 틈새로….
갈색 로브를 푹 뒤집어쓴 사람이 보였다.
“…누구?”
프리다가 커다란 눈으로 그 사람을 올려다봤다.
“저예요.”
“휴….”
익숙한 스승의 목소리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프리다에게, 발레리는 장갑 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얼른 나오시죠.”
“정말 나가도 돼요? 밖에 문지기들이….”
프리다가 숨죽여 물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짙푸른 눈동자가 불안하게 깜빡였다.
발레리는 가볍게 미소하며 황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와서 보라고.
그렇게 프리다는 문 밖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흐엇…!”
프리다는 복도 쪽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지기 서른한 명이 몸을 벽에 기대고 쓰러져 있었다. 개중에는 문지기 수장인 마법사 루퍼트까지 있었다.
“무, 문지기들이 왜 저래요?”
“잠자는 거예요. 목숨에 지장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순간 누군가가 코를 고는 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벽에 기댄 자세들을 봐서는 정말 자는 것 같긴 했다.
“…자는 거라고요? 발레리, 혹시 저 사람들한테 수면제 먹였어요?”
“아뇨. 음악을 들려줬어요.”
발레리는 등 뒤의 자루에서 나무로 된 피리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 피리로 뭘 어쨌다는 걸까. 프리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이제 가시죠.”
“응…!”
둘은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올랐다.
프리다가 앞장서고, 발레리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 맞다.”
문득 프리다는 잊고 있던 준비물이 생각나 뒤를 돌아봤다.
“왜 그러세요, 황녀님?”
“발레리, 잠깐 우리 어디 좀 들러요.”
“어딜요?”
“건국기념관 어딘 줄 알아요?”
“…네.”
발레리는 속으로 놀라며 대답했다. 건국기념관은 그녀가 석실에 들어오기 직전 들렀다 온 곳이었다.
“나 거기 좀 데려다줘요. 가지고 나올 게 있어서.”
“…뭘요?”
“거기 내 무기가 있거든요. 그거 들고 가려고….”
발레리는 프리다를 빤히 쳐다봤다.
건국기념관에 있는 무기라면 설마….
잠시 망설이던 발레리는 로브 안쪽에 차고 있던 무언가를 꺼냈다.
아주 오래돼서 색이 탁하게 바랜, 엘로이스의 보검이었다.
“혹시 이거 찾으시는 거예요?”
프리다는 까무러칠 듯 어깨를 들썩였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보검과 발레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허어? 그게 왜 발레리한테 있어요? 그리고, 그거 잡아도 괜찮은 거예요? 손 안 다쳤어요?”
“불에 달군 검도 아니고 손을 왜 다쳐요? 아무렇지도 않은데….”
발레리가 검 자루를 만지작대며 중얼거렸다. 그 검은 머리 사제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테렌스도 아까 얼핏 그렇게 얘기했다. 만지면 다치는 물건이라고.
하지만 발레리가 만졌을 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 발레리가 그걸 왜 가지고 있냐고요. 내가 가져다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러는 황녀님이야말로 이 보검을 왜 찾으신 거예요?”
“그야… 내가 쓸 일이 있으니까….”
“황녀님. 이제 시간이 없어요. 얼른 귀 막으세요. 손으로는 막아도 아마 들리긴 하겠지만….”
둘은 채플을 빠져나갔다. 발레리는 행여나 목격자가 있을세라 피리를 훅훅 불면서 움직였다.
프리다는 양손 검지로 귀를 막아 보았지만 피리 소리는 그 틈을 끝끝내 뚫고 들어와 그녀의 고막을 울렸다.
결국 프리다는 다리에 힘을 잃고 쓰러졌다.
그래서 발레리는 황녀를 품에 안아 들고, 피리를 입에 문 채 서쪽 게이트까지 왔다.
삐익— 소리와 함께 서쪽 게이트를 지키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스러져 갔다.
발레리는 이 흉한 소리가 가진 효과가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황궁을 빠져나왔다. 성벽 밖의 탁 트인 밤하늘은 맑고 밝았다.
달은 유난히 빛났고 별들은 무수히 반짝였다.
품에 안긴 황녀의 백금발이 달빛을 머금어 더 환하게 빛났다.
황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아직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렇게 밝은 밤에 황녀를 품에 안고 석실을 탈출했다. 전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루카스가 준비해 뒀다는 마차는 서쪽 게이트에서 꽤 떨어져 있었다. 피리 소리가 닿지 않을 만큼 멀리.
마차의 마부석에는 케빈이 앉아 있었고, 문 앞에는 루카스가 기대어 섰다. 그의 입에는 가느다란 담배가 물려 있었다.
루카스는 발레리를 발견하자마자 담배를 툭 뱉으며 헉 소리를 냈다.
“야, 무슨 사파이어가 그렇게 커?”
분명 보석을 훔쳐 나온다고 했었는데. 발레리는 웬 사람 한 명을 안고 나왔다.
“잔말 말고 문 열어.”
발레리는 대꾸하기도 싫다는 듯 루카스를 재촉했다.
“그래, 공주님 명령 받잡아야지.”
그가 마차 문을 열었다. 발레리는 얼른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아 프리다에게 무릎을 내주었다.
황녀가 따뜻하게 잘 수 있게, 어깨 위의 로브도 벗어 덮어 주었다.
맞은편에 자리한 루카스는 기가 찼다. 황궁에서 근 1년 동안 뭘 훔치나 했더니. 사람 하나를 통째로 들고 나왔다.
“발레리, 그 사람 누구야? 체격을 봐서는 여자 같은데?”
“조용히 하고 이거나 받아. 원주인 다시 갖다 줘야지.”
발레리는 자루에서 피리를 꺼내 루카스에게 내밀었다.
“아, 그리고 이것도.”
그녀는 자루 안에 손을 한 차례 더 넣었다. 켄드릭에게서 선물 받은 목걸이가 나왔다.
“오, 황궁에서 훔친 게 이거야?”
“아니야. 그건 선물 받은 거야. 잠시 좀 맡길게. 내가 하고 다니기엔 좀 거추장스러워서.”
오, 그 테리라는 형씨한테서 받은 건가. 루카스는 흔쾌히 웃으며 넘겨받은 물건들을 제 가방에 옮겨 담았다.
“다 온 거 맞지? 그럼 이제 출발한다.”
마부석에서 케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히히힝.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