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테렌스는 침실 창가를 서성이며 발레리를 기다렸다.
그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늦은 오후에 올라온 보고 때문에.
칼레바니아의 유일한 여자 병사, 발레리 로빈슨이 제대 희망서를 냈다고 했다.
어떻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일을 그만둔다고 할 수 있을까.
하나뿐인 연인이자 최고 상관에게.
발레리가 창틀을 넘어 방 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테렌스는 그녀에게 다가가 따지듯 용건부터 이야기했다.
“제대 희망서를 제출했더군.”
“…네.”
“황궁을 떠나려는 건가?”
“네. 저는 더 이상 황녀님한테 가르칠 게 없어요. 이미 훌륭한 검사가 되셨으니까요.”
“누구 맘대로 그만둬. 수리할 수 없다.”
“남들 복무하는 기간만큼 다 채웠는데 그럼 제대해야죠. 군대에 말뚝 박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는데요.”
발레리는 일부러 평소와 같은 투로 이야기했다. 테렌스는 그녀를 와락 안았다. 얼마나 세게 안는지 어깨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군은 제대하더라도 네가 황궁에 머물 명분을 만들겠다. 이번엔 나를 가르치는 건 어때. 나도 왼손으로 검술을 더 단련해야 하니—”
“테렌스.”
발레리가 말을 끊으며 그의 이름을 차분히 불렀다. 표정에도 딱히 드러나는 게 없었다. 테렌스는 뜻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놔요. 숨 막혀.”
그녀는 테렌스의 가슴을 밀어낸 뒤 원형 테이블로 향했다. 그리고 의자 두 개를 나란히 붙여놓고 손짓했다.
“와서 앉아요.”
“거기서 뭐 하게.”
발레리는 대답 없이 자루에서 술 한 병과 잔 두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술 한잔 짠 하고 미련 없이 보내주기.
서로의 연인이 되기로 했던 날. 발레리가 받아낸 약속을 테렌스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오늘 술 한잔과 함께 이별을 이야기하러 온 것이다.
발레리는 조용히 앉아 테렌스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동상처럼 굳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발레리는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약속했잖아요. 술 한 잔 하고 미련 없이 보내주기로.”
“…못 해.”
테렌스는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갑작스러운 이별이 어디 있을까. 이틀 전까지만 해도 밤새 입맞춤을 나눴었는데.
“그럼 마시기 전에.”
“…….”
“마지막으로 나 안아줘요.”
발레리는 테렌스의 왼손을 잡아끌고 침대로 향했다. 그는 힘없이 끌려왔다. 눈에는 이미 한가득 눈물이 맺혀 있었다.
“발레리, 난 널 보낼 생각이 없—”
입술이 입술을 막았다. 테렌스의 뒤통수가 베개에 닿았다. 발레리는 미간을 구겼다. 입맞춤이 너무 짰다. 이미 테렌스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탓이었다.
발레리는 침대 아래서 푸른 약을 꺼내 마셨다. 테렌스의 입에도 넣어 주었다. 삼켜지지 않은 약은 그의 턱을 타고 줄줄 흘렀다. 발레리는 옷소매로 그의 입가를 닦으며 웃었다.
그녀는 입술을 그의 귀에 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사랑해, 테렌스.”
“……!”
묵직하게 부푼 테렌스의 흉곽이 크게 한 번 오르내렸다. 눈물을 쏟던 연푸른 눈동자가 맑은 빛을 내며 진동했다.
발레리에게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테렌스는 눈을 감았다.
‘내가 몇 번이나 사랑한다 했는데, 답을 이제야 돌려주는 건가. 이별을 목전에 두고. 그게 무슨 의미라고.’
가슴에 인두가 꽂힌 것처럼 뜨겁고 저릿한 아픔이 밀려왔다.
동시에 정복욕이 끓어올랐다.
이대로 못 보내.
넌 내 품이 그리워서라도 날 다시 찾게 될 거야.
바스락—.
테렌스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위치가 단번에 역전됐다.
이번엔 발레리의 뒤통수가 베개에 닿았다. 단추는 무서운 속도로 풀려나갔다. 온몸에 뜨거운 맨살이 맞닿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테렌스는 무섭게 굳은 얼굴을 하고 한참 동안 그녀를 몰아세웠다. 그가 지나간 자리가 모두 얼얼했다. 흔적을 얼마나 깊이 새기려는지 모르겠다. 발레리는 그의 등을 부여잡고 새된 소릴 흘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부드럽지 않은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낯설고도 황홀했다. 그가 거칠게 입을 맞춰올 때마다, 이 밤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둘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젖은 뒷덜미에서 그의 가쁜 숨결이 느껴졌다.
“…그동안 참은 거예요? 이런 적 한 번도 없었잖아.”
“네가 이런 걸 좋아할 줄 몰랐는데. 원한다면 매일 이렇게 할 수 있어. 그런데도 날 떠날 생각인가?”
“…….”
발레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네, 당연하죠. 당신하고 끝장내려고 왔는데요.
이 밤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어차피 기억도 못 할 거면서.
벌써 몇 차례나 사랑을 나눴는지 모르겠다. 테렌스는 오른손에 진물이 터지는 것도 모른 채 그녀를 안았다.
지친 발레리는 도리질을 쳤다. 얼른 그에게서 빠져나가야 했다. 곧 자정이 넘어간다. 이대로 말려들었다간 그대로 아침이 오고 말 것이다.
결국 그를 밀쳐냈다.
“어딜 가.”
“잠깐만 기다려요.”
발레리는 그의 체향으로 물든 몸을 힘겹게 일으켜 캐노피 커튼을 닫았다.
그녀가 향한 곳은 술과 잔이 놓인 테이블이었다.
쪼르륵.
한 잔을 따르고.
쪼르륵.
다른 한 잔을 따르고.
쪼륵.
한 잔에 약을 탔다.
발레리는 그렇게 술 두 잔을 들고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세상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목마를 텐데 한잔해요.”
“…싫다면.”
“직접 먹여주지 뭐.”
발레리는 약이 든 잔을 입에 머금고 그의 벌어진 입술 사이에 그대로 뱉어냈다.
한 방울도 남지 않도록.
입술을 뗀 뒤 발레리는 그와 이마를 맞대고 또다시 속삭였다.
“사랑해.”
이 한 마디에 테렌스의 목울대가 꿀렁, 움직였다. 쓰디쓴 목 넘김이 테렌스의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들었다.
그래. 다 삼켰구나.
발레리는 약이 들지 않은 나머지 잔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이제 제한시간은 30분.
그동안 할 말을 다 해야 한다.
테렌스는 럼주의 쓴 뒷맛을 떨쳐내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발레리. 난 이해할 수 없어. 어떻게 사랑한다면서… 날 버릴 수가 있지?”
“사랑하니까 버리는 거야.”
“뭐?”
“나랑 함께했던 기억은 아마 없는 게 나을 거예요. 상처이자 치욕일 거야. 그래서 깔끔하게 뿌리째 뽑아서 사라져 주려고. 순수하게 배신감만 남도록.”
“…무슨 소린지 바른대로 말해.”
발레리는 분노가 고스란히 내비치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네. 바른대로 말할게요. 일단 나는 가짜예요.”
“그게 무슨—”
“당신이 알고 있는 발레리 로빈슨이 아니라고요. 발레리. 딱 여기까지가 내 이름이에요. 성 같은 건 없어요. 신분 같은 게 있었던 적이 없어서.”
테렌스는 말을 잃었다. 문득 귓속에 물이 들어차는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는 눈을 부릅떴다. 일단 그녀의 말을 이해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고 무슨 말을 하는지 끝까지 들어야 한다.
“도적단 펠런. 아실지 모르겠지만. 거기 소속이에요. 나 이 나라 귀족들 재산 훔치면서 그 돈으로 먹고 살아왔어요. 여기 들어오기 전에.”
“…….”
펠런. 테렌스도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한때 귀족들의 부정축재 재산을 캐고 다니다, 몇 년 전부터 활동을 멈췄다던 그 도적단.
황실에서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귀족들이 제 주머니로 현상금을 긁어모아 눈에 불을 켜고 추적하는 집단이었다.
“네, 저 범죄자예요. 여기 황궁에 들어온 이유도 나쁜 짓 하러 온 거고요.”
테렌스는 이마를 짚었다. 머릿속에 온갖 게 스쳐 지나갔다. 발레리에게 고백하던 날, 그녀는 이런 경고를 했었다.
—저는 전하께서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신분을 떠나서 그냥 좋아할 가치가 없다고요.
—지금 보시는 제 모습이, 진짜 제가 아닐 수도 있어요.
—전 제 모습 다 못 보여드려요. 아무리 가까이 다가오셔도 말이에요.
그 말을 그땐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자기 비하를 하면서 밀어내나 했었는데….
그건 그렇고 무슨 범죄를….
테렌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쪽 손으로 받쳤다.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가. 두통이 극심했다.
“…하윽, 발레리.”
“제가 황궁에 들어온 이유가 궁금하시겠죠.”
발레리는 테렌스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술에 섞었더니 약효가 벌써부터 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똑똑히 들려줘야 했다. 본인이 이곳에 들어온 목적을.
“난 여기에 두 가지를 훔치러 들어왔어요. 먼저 황실의 보검. 초대 황제 엘로이스의 유물이요.”
“…그, 그건 만지면 다치는….”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발레리의 눈에서 굵은 물줄기 하나가 흘러내렸다.
“프리다 황녀님이에요.”
“…지금 뭐라고….”
“하지만 황녀님은 제자리에 돌려놓을 거예요. 무사히. 제때 여행 떠나실 수 있게요. 보검은 잘 모르겠지만….”
테렌스가 그녀의 손목을 꽉 부여잡았다. 두개골이 쪼개지는 듯한 두통을 견디며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 거짓말이야.”
“진실이에요.”
“그… 그럴 리 없어. 네가 어떻게….”
“이제 알겠죠. 난 당신의 연인이어선 안 되는 사람이었어. 그런데도 당신이 욕심나서 품에 안았어. 양심은 개나 줘 버린 악질 범죄자죠.”
테렌스와의 사랑이 깊어지는 만큼, 발레리는 자기혐오의 늪에 깊숙이 빠져 있었다.
물론 연인 관계가 주는 행복이 더 컸기에 그걸 숨기고 억누를 수 있었다.
“정신없죠. 당연히 그럴 거야. 방금 당신이 마신 술에 내가 약 탔으니까요. 트라우마 치료제.”
“…하….”
테렌스는 밭은 숨을 내뱉었다. 이제야 알겠다. 술 한 잔으론 끄떡없을 몸이 이럴 리 없었다. 이렇게 정신이 흐려지는 건 약 기운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6개월짜리니까 아마 9월 중순쯤부턴 나랑 엮인 기억이 없어질 거예요. 그땐 우리 안 만나고 있던 시기일걸요. 당신이 한동안 만나지 말자고 해서.”
테렌스는 힘겹게 기억을 더듬었다. 생각이 난다. 계속 밀어내기만 하는 발레리에게 시간을 갖자고 했었던 시기가.
“우린 서로에게 잠시 끌렸지만, 연인이었던 적은 없어요. 아마 당신 기억엔 그렇게 남을 거야.”
“…안 돼….”
테렌스는 절망했다. 성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말이 안 나와 입술만 달싹거렸다. 시야가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발레리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얘기해야 하는데.
당연히 그때도 널 사랑하고 있었다고.
그 이후의 기억을 지워봤자 달라지는 건….
툭—. 테렌스의 이마가 발레리의 어깨 위에 떨어졌다.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쥔 채로. 악력을 최대한으로 짜냈지만 약 기운이 그걸 막았다.
의식이 흐려진 그의 잇새에서 아주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지… 마.”
“갈 거야. 아마 당신 눈앞에 다시 나타나는 일 없을 거야.”
“…흑.”
발레리는 어깨 위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아마 테렌스의 눈물일 것이다.
‘나쁜 년, 미친년, 죽일 년이라고 욕이라도 한 바가지 실컷 해 주지. 하다못해 목이라도 조르지. 고작 마지막에 하는 말이… 울면서 가지 말라는 거면 어떡해.’
발레리는 눈물을 훔쳤다. 아직 그에게 할 말이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망할 놈의 반지. 무슨 짓을 해도 안 빠지는 반지. 언젠간 당신한테 돌려보낼게요. 약지를 잘라서라도.”
“…….”
이젠 정말 반응이 없다. 테렌스가 움직임을 완전히 멈췄다.
생각보다 약이 효과가 빨랐다.
발레리는 그의 몸을 침대에 고이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멋대로 기억 지운 거 미안해요. 나 용서하지 마.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거 아니까.”
온통 눈물범벅인 그의 얼굴에, 발레리는 마지막으로 입을 맞췄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사랑해. 이 마음만큼은 한 번도 거짓인 적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