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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32)화 (132/173)

132화

피어스가 단원 네 명과 함께 장작거리를 가득 안은 채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막 복귀하자마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낡은 거실 소파를 빙 둘러싸고 단원들이 심각한 얼굴로 서 있었다.

소파에 뭐가 있기에 그러지.

피어스는 소파에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장작들이 후두둑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코, 콜린. 네가 왜 여깄냐? 옆구리에 붕대는 또 무어야. 어디 다쳤어?”

피어스가 콜린의 곁으로 달려가 앉았다.

콜린은 자꾸만 흐려지는 초점을 피어스의 얼굴에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두… 두목.”

“얘들아, 누가 콜린 의원에 좀 데리고 가라. 이 상태가 되도록 안 데려가고 뭐 했냐.”

“그, 그게 아니에요.”

“…혹시 오다가 급습을 당한 거야?”

“죽었어요.”

“죽어? 누가?”

“…전부.”

콜린의 두 눈에선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이제 보니 그의 꾀죄죄한 얼굴에 희고 긴 자국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모두 눈물이 지나간 자리였다.

콜린은 희미한 의식을 쥐어짜 단원들의 부고를 알렸다.

십여 년 간 삶의 터전이었던 오두막이 모두 재가 되어 사라졌다는 소식도.

예고 없이 들이닥친 50명의 괴한들. 그들이 북부 억양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

피어스는 황궁에 루카스를 급파했다.

야심한 시각이었다.

이미 채플에 와 본 적이 있는 루카스는 발레리의 방문을 부리나케 찾아 두드렸다.

쿵쿵.

마침 발레리는 제 방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황녀와의 외출을 앞두고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고생하던 참이었다.

“누구세요?”

“나야, 루카스.”

루카스의 목소리는 맞다. 다만 어딘가 이상했다. 얘가 이렇게 진중한 톤으로 발성을 한 적이 있었던가.

발레리는 문을 활짝 열고 그를 맞아들였다.

“어, 왔어? 무슨 일이야?”

“발레리.”

“…이제 공주님 소리 안 하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어, 어. 듣고 있으니까 말해.”

목소리뿐 아니라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언제나 정신없이 들썩이던 입꼬리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매번 고집하던 공주님 호칭은 어디로 집어치웠는지 이름으로 부른다.

발레리는 그가 낯설었다. 루카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 같았다.

그리고 왜인지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사람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하니 살짝 섬뜩하기도 했다.

“남부 아지트.”

“…어.”

“거기 있던 단원들 전부 몰살당했어. 오두막은 전부 불타 없어졌고.”

“…….”

얘가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대뜸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믿어. 우리 단원들이 이렇게 갑자기 몰살당할 일이 뭐가 있는데.

벙쪄서 어물거리는 발레리를 앞에 두고 루카스는 제 할 말을 계속했다.

“거기서 콜린 혼자 탈출해서 북부 아지트로 왔어. 걔도 옆구리를 깊이 찔려서 오늘내일하는 상황이야.”

“…코, 콜린이? 야. 너… 그게 무슨….”

발레리는 문간을 잡고 기대어 섰다.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오금이 슬슬 풀렸다.

남부 아지트. 프레이저 후작령에 있는 그곳은 발레리가 어린 시절부터 자라온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곳에서 단원들은 어린 발레리를 품에 안아 따뜻하게 키웠다.

그곳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안 믿기지. 나도 처음엔 안 믿었어. 못 믿겠더라. 근데 사실이야.”

“로이는? 로이는 어떻게 된 거야? 아파서 누워 있었잖아.”

“무슨 소리야? 로이 저세상 간 지가 언젠데….”

루카스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뭐? 로이가 죽었다고?”

“케빈이 말 안 해줬어? 작년 여름에 장례식 치렀어.”

로이가 잘 지내고 있다던 케빈의 말은 혼자 지내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이미 그 시점에서 로이는 숨지고 없었다.

발레리는 넋 나간 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루카스는 얼른 자세를 낮춰 발레리를 부축해 일으켰다.

“발레리, 두목이 너 하는 일 빨리 마무리하자고 하셨어. 바로 끝내고 같이 뜨자고.”

“…아, 어….”

“듣자 하니 유용한 도구도 주셨다던데. 그 보석 훔치는 거, 위험한 만큼 완수금 많이 주는 거지?”

여전히 루카스는 발레리가 의뢰받은 물건이 아주 진귀한 사파이어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발레리는 아무 대답 없이 망연자실해 있었다.

루카스는 제 품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 발레리의 앞에 내밀었다.

“자, 발레리. 여기 네가 나한테 주문한 거. 처방 받느라 한참 걸려서 지금에야 주네.”

루카스는 그녀의 손에 작은 약병 하나를 쥐여 주었다. 그 표면에는 이런 글자가 써 있었다.

트라우마 치료제.

“6개월짜리 맞지? 누구한테 쓸지는 모르겠지만… 잘 써라.”

“…….”

“보석은 내일 밤 지나고 새벽 두 시에 가지고 나와. 황궁 서문 뒤편으로 마차 대기시켜 둘 테니까. 보석 하나 나르는데 왜 마차까지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두목이 그러라고 하시네.”

발레리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카스는 혼이 빠져 있는 발레리를 한 번 토닥여준 뒤 곧바로 사라졌다.

그때부터 발레리는 문간에 앉아 한참을 오열했다. 찬바람이 방 안에 들어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몸이 얼어붙는 것도 모르는 채로.

예기치 못한 상실은 그녀의 마음을 마구잡이로 짓이겨 놓았다.

이젠 물러설 곳이 없다.

아직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온 가족 같은 단원들과, 그들과의 추억이 서린 아지트가 모두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는 게.

단원들.

이제 남은 사람들만 생각하며 움직여야 한다.

발레리는 눈을 감았다.

황궁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되짚어 보면 황궁에 들어와 쌓아올린 것들은 모두 허상이었다.

프리다와의 우정.

테렌스와의 연애.

모두 가짜 신분을 뒤집어쓰고 얻은 것들이었다. 그들과의 행복했던 시간은 분수에 가당치도 않았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 끝에 잔인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발레리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방문을 닫고 책상에 앉았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되뇌면서.

마침 그녀의 책상 위에는 어제 근위대 병적 관리부에서 가져온 문서가 놓여 있었다.

제대 희망서였다.

발레리는 군 복무 기간 동안 딱 일주일의 휴가를 사용했다.

거기에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포상 휴가를 싹 다 붙이면 1년간의 군 복무가 완전히 끝나게 된다.

딱 내일부로.

하지만 복무 날짜를 채우는 건 큰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애초에 징집 대상도 아니었으니까.

발레리가 이 문서를 제출하기로 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녀는 깃펜에 잉크를 찍고 제 이름, 아니 가짜 이름을 삐뚤빼뚤 적어 넣었다.

칼레바니아 황궁 병사 발레리 로빈슨.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서 살아온 1년에 온전히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였다.

***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황녀님, 밤에 짐 싸놓고 기다리고 계세요. 모시러 올게요.”

프리다와 대련을 마친 발레리는 투구와 갑옷을 벗자마자 당부했다.

“발레리, 진심이에요? 오늘 밤에 정말 나 데리고 나가 줄 거예요?”

프리다의 얼굴에는 걱정이 반, 기대가 반이었다.

아직까지도 발레리는 황녀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수단으로 문지기들을 뚫을 것인지.

“네, 황녀님. 너무 걱정하지 말고 계세요. 켄드릭이랑 저녁 드신 후에, 걔 퇴근 빨리 시켜 주시고요.”

이 말을 남기고 발레리는 바로 석실 밖으로 나갔다.

프리다는 스승의 의연한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발레리는 정말 차분하네. 떨리지도 않는 걸까. 몰래 나간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좋고 흥분되긴 하는데… 저 문지기들을 어떻게 처리한다는 건지 정말 모르겠어.’

정말 수수께끼였다.

그래도 좋았다.

5년여만의 외출. 알을 깨고 밖으로 나가는 기분이다. 1년에 한 번 석실을 나가긴 했지만 여신의 가호가 미치는 황궁 안에서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번엔 다르다. 저 멀리 프레이저 후작령으로 간다.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미지의 장소로. 그것도 가장 믿고 따르는 사람과 함께.

프리다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짐을 챙겼다. 석실에는 큰 가방이 없어 커다란 실크 스카프에 보따리를 싸야 했다.

꿈으로만 꾸던 대탈출이다.

아, 쪽지 남기고 가야지.

프리다는 보따리를 정성스레 매듭지은 뒤 책상으로 뛰어가 쪽지를 쓰기 시작했다.

「어머니, 아버지, 오빠. 딱 엿새만 바람 쐬고 올게요. 걱정 시켜서 정말 미안하지만, 약속한 시간에 돌아올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프리다」

***

방으로 퇴근한 발레리도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먼저 독한 럼주 한 병과 속이 비치지 않는 나무잔 두 개를 자루에 챙겼다.

그녀의 첫 행선지는 황태자궁이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

테렌스와의 연애가 곧 있으면 끝이 난다.

오늘부로 발레리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굵고도 짧은 연애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딱 두 계절을 함께 했다.

가을과 겨울.

도둑처럼 그의 침실에 숨어 들어가서는, 얼마나 많은 밤을 그에게서 훔쳤는지 모르겠다. 짙은 어둠이 깔릴 때마다 하루가 멀다고 그의 체온과 숨결을 가져갔다.

바람이 차가워질수록 더욱 그에게 몸을 치댔던 것 같다. 안아달라고 조금만 보채도 그는 망설임 없이 두 팔을 벌렸다. 피곤한 기색도 없이 온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면서 눈부신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한다고.

테렌스.

소리 내어 발음할수록 애틋해지는 이름.

당장 이틀 전에도 그의 품속에서 숨죽여 울며 밤을 지새웠다. 퉁퉁 부어있는 눈을 들키기 전에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침실을 빠져나왔다.

황태자의 비밀 연인으로 지냈던 나날들은 모두 재가 되어 날아간다.

‘이제 그 시간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겠지.’

그녀는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약병을 집어 들었다. 루카스에게서 건네받은 트라우마 치료제였다.

이 약을 먹으면 일정 기간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긴 기억들은 희미하게 지워진다. 특히 실연에 효과가 크다고 했었다.

발레리는 약병에 좁쌀만 하게 써 있는 주의사항을 읽었다.

마시고 나서 30분 후에 효과가 돈다고 적혀 있었다.

그 30분 동안은 아마 숨겨왔던 말들, 하지 못한 고백들을 모두 꺼낼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상처가 되는 말은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그 시간이 끝나고, 약효가 돌면 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된다. 약물이 기억의 일부를 지워내는 과정이라고 한다.

부작용은 그 수면 기간이 일주일 이상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푹 자고 깨어나면 황녀님은 돌아와 있을 거예요. 나는 어디에도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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