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있잖아, 발레리.”
“어.”
“그래도 널 좋아해.”
“…휴.”
발레리는 반쯤 포기한 얼굴로 켄드릭을 올려다봤다. 이 말을 언젠간 들으리라고 예상하긴 했다.
그녀의 미적지근한 반응과 상관없이 켄드릭은 고백의 포문을 열었다.
“네가 여자애란 걸 알았을 때부터 신경 쓰였어. 빨리 너보다 키 크고 싶어서 밥도 많이 먹고, 운동도 열심히 했어. 그럼 네가 남자로 봐주지 않을까 해서.”
“…….”
“매번 대련하자고 한 것도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너한테 만나자고 할 명분이 그것뿐이더라.”
“…그랬구나.”
이로써 확실해졌다. 어릴 적 켄드릭과 그녀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까맣게 모르는 채로.
켄드릭은 언제나 발레리를 향하고 있었다. 프리다에게 한 줌의 진심도 줄 수 없었던 이유였다.
“…황녀님이랑 만났던 건 순전히 내 야심 때문이야. 그 방법으로라도 황제를 찾아가서 담판 짓고 싶었거든. 물론 잘못된 방식이었다는 거 알아. 그래서 후회해. 결국엔 황녀님한테 상처 줬으니까.”
“황녀님한테는 무릎 꿇고 싹싹 빌었지? 뭐 어찌 됐든 원하는 건 이뤘네. 출정 갈 수 있게 됐잖아.”
“…그래, 그렇지. 아무튼 말하고 싶었어. 너 오랫동안 좋아했다고.”
발레리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런 말에 뭐라 보답해 줄 수가 없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한참 동안 그녀가 대답이 없자 켄드릭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안 받아줄 거 알아.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 수 있으니까 말하는 거야.”
“…마지막이라니? 너 황녀님 말버릇 옮았냐.”
“와이어 숲. 알다시피 사람 잡아먹잖아.”
모든 위험을 각오한 자의 담담한 말투였다. 발레리는 이제야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얘가 와이어 숲에 출정 가는 게 과연 잘 된 일인 걸까. 매일 노래를 부르던 소망이 이뤄지긴 했는데, 정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발레리, 내가 거기 갔다 오면.”
“갔다 오면?”
“한 번만 고려해 줘. 나랑 진지하게 한번 만나보는 거. 나쁘지 않을 거야. 나 너한테만큼은 정말 잘할 자신 있으니까.”
참 넌….
발레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 말을 일 년 전에, 널 좋아했을 때 들었더라면 기뻤을까.
그랬을 것 같지도 않다. 그때도 발레리는 켄드릭과 맺어질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을 억누르기 바빠 달콤한 상상을 펼칠 틈이 없었다.
지금 연인인 테렌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와의 관계는 시한부였다. 마음을 잠시나마 열어준 건 곧 그의 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각오가 돼 있기 때문이었다.
발레리는 두 남자 모두 자신의 미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누가 자리 잡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고마워, 켄드릭. 나 같은 거 좋게 생각해 줘서.”
“발레리, 그 답이 최선이야?”
“어. 딱히 덧붙일 말 없는데.”
거절당했다.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아무런 여지없이.
켄드릭은 그래도 웃었다. 속은 상했지만 또 그만큼 홀가분했다. 눌러왔던 말을 다 내뱉고 나니까.
“알겠어. 그럼 이거나 받아. 나도 너 생일선물 안 줬잖아. 공교롭지만 나도 목걸이야.”
켄드릭도 품 안에서 목걸이를 하나 꺼냈다. 검은색 초커였다. 이것도 마력석이 달려 있었다. 그것도 발레리가 준 것보다 훨씬 큰.
“뭐야. 내가 준 것보다 마력석 알이 굵은데?”
“…맞아. 사실 기사단 입단하기 전에 주려고 했어. 네가 약속 장소에 안 나와서 나 바람맞힌 그날 말이야.”
“오, 이런 귀한 걸 줄 줄 알았으면 그날 가는 거였는데. 근데 이거 주술 되게 세게 걸린 거 같다? 광택이 심상치가 않은데.”
“맞아. 용한 마법사한테 들고 찾아가서 직접 주술 걸어달라고 했거든.”
“무슨 주술?”
“인기척 감춰주는 주술. 몸 움직일 때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랑 발소리, 체취 같은 걸 다 감춰준대.”
“…딱 도둑질할 때 쓰라고 만든 목걸이네.”
“응. 너 작업할 때 들키지 말고 안전하게 하라고 생각해낸 거야. 사실 몸을 투명하게 감춰주는 주술은 안 되냐고 물었는데, 그건 마력석을 온몸에 휘감아도 안 된다더라.”
켄드릭 또한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직접 걸어 주었다. 더 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호기심이 동한 발레리는 사지를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까슬한 부직포 소재의 군복을 입었는데도, 정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바닥에 발도 굴러 봤다. 딱딱한 군화 밑창이 땅에 부딪히는 소리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와, 이 목걸이 진짜 요물이다.”
“…너 지금은 손 털어서 별로 쓸모없겠지만,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어. 어차피 너 주려고 산 거니까.”
켄드릭은 여전히 발레리가 도적질에서 손을 뗀 줄 알고 있었다.
사실은 아닌데. 발레리는 씁쓸히 웃었다.
“어째 내가 주는 것보다 받는 게 크네. 어디에 쓰든 잘 쓸게, 고마워.”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켄드릭은 그 손을 잡았다.
온기가 감도는 담백한 악수였다.
두 사람의 손은 따뜻했다. 와이어 숲에서 함께 손잡고 달렸던 그때처럼.
***
가택연금 생활은 낙이 없었다. 볼드윈 공작은 하릴없이 침실과 서재만 들락거렸다. 그의 눈구멍은 오래된 석회 동굴처럼 음암해져만 갔다.
크세니아의 지원을 받아 독립된 공국을 세우고, 칼레바니아 황녀 프리다를 며느리로 인질 삼아 황제 엘리엇의 보복을 차단하려던 계획.
모든 게 휴지 조각이 됐다.
두 나라와의 연결고리가 모두 끊겼으니, 재기할 희망조차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혼자 무너질 수 없었다.
이를 갈며 하루에도 수천 번씩 다짐했다. 본인을 이렇게 만든 이들을 끝끝내 수렁으로 끌어내리고 말겠다고.
만성 불면증은 더더욱 심해졌다.
오늘도 공작은 새벽 늦은 시간까지 눈을 희번덕거리며 펠런과 관련한 보고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이전에 씨를 말려놨어야 했는데. 고작 다섯 명밖에 못 죽이고 끝났으니…. 이번엔 제대로 끝장내야 한다.”
똑똑.
때아닌 밤의 노크 소리.
침대에 축 늘어져 있던 공작은 허리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공작에게 마지막 남은 참모. 그가 기다리던 보고를 가지고 들어왔다.
“…후작령 구석진 곳의 한 플라타너스 숲에서 큼지막한 오두막이 발견됐답니다. 사내놈들 스물 남짓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쥐새끼들인 건 확인됐고?”
“네. 절반 이상이 수배 걸린 놈들이었습니다. 현상수배지에 있는 얼굴이랑 비교 대조도 해 봤다고 합니다.”
공작의 양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전부 처리하라 해.”
“대가는 준비되셨습니까?”
참모는 되바라진 태도로 물었다.
공작에게 남아있는 단 50명의 사병들. 그들이 공작의 몰락을 모를 리 없다. 위험한 일은 그만한 보상이 확실해야 움직일 것이다.
“…내 가용 재산의 삼 할 정도는 쓸 의향이 있다.”
참모는 흠칫 놀랐다.
공작의 가용 재산은 적지 않았다. 칼레바니아 황실이 재산의 상당량을 몰수하고, 에이바가 대부분의 처분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는 여전히 수중에 많은 돈을 굴렸다. 귀족파 거두이자 제국의 귀금속업을 주름잡는 거부였으니 파이 자체가 컸다.
“어음을 써 주셔야 할 겁니다.”
“당장 써 주지. 바퀴벌레 박멸하는 데 아낄 돈이 어디 있나, 안 그래?”
공작은 곧바로 책상으로 가서 서랍을 열고 어음을 써 주기 시작했다.
그는 흥분감을 주체하지 못하며 잇새로 독기 가득한 웃음을 흘렸다. 검은 속에서 들끓는 그의 잔인성이 뱀의 혀처럼 날름거렸다.
“…마지막은 너다, 피어스.”
***
공작 수하의 병력 50명은 남부 프레이저 후작령에서 비밀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공작이 내린 다른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공작은 몇 달 전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한 젊은 사람의 초상화를 여러 장 건넸다.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신상 정보를 면밀히 추궁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수십만 갈렌 규모의 어음을 전달받았다. 또 다른 긴급 임무가 떨어졌다. 플라타너스 숲속의 오두막에 사는 남자들을 몰살하고, 그 증거를 가져오라고 한다.
평화롭던 숲속의 오두막은 그날 밤 피바람에 휩싸였다.
아무리 잘 훈련된 펠런 단원이라 하더라도, 막 잠에서 깨어나 비무장 상태로 50명의 급습을 이겨낼 수단은 없었다.
오두막에 머물던 펠런 단원은 스물하나.
그중 스무 명이 괴한들의 칼날에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공작이 보낸 괴한들은 단원들의 사체를 훼손하면서까지 저들의 살육 증거를 챙겼다.
마지막으로 오두막은 기름 넉 통과 성냥개비 하나로 흔적도 없이 재가 되었다.
이 사건의 생존자는 단 한 명이었다.
콜린.
펠런에서 가장 체구가 작은 그는 단검에 옆구리를 찔린 채 창문 틈새로 오두막을 탈출했다.
단원들이 무참히 도륙 당하는 상황에서 그에겐 오로지 생존 본능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마을에서 응급처치만 받은 뒤, 말을 훔쳐 타고 죽기 살기로 북부로 도망쳤다.
불행 중 다행으로 콜린은 현상수배 대상이 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북부의 임시 은신처가 어디 있는지 콜린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옆구리가 뚫려있든 말든 어떻게든 두목 피어스에 가야 했다.
모두의 죽음을 알리기 위하여.
***
콜린은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는 채로 북부 아지트에 도착했다.
3월의 공작령은 여전히 눈밭이었고, 깊은 숲속의 침엽수들도 여전히 흰 눈을 두껍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루카스는 아지트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 말을 끌고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콜린을 발견했다.
그는 얼른 콜린에게 다가갔다. 안색이 시퍼런 콜린은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외투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상태였다.
루카스는 그를 부축해 오두막 거실 소파에 눕히고 얼마 남지 않은 장작으로 벽난로를 켰다.
단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줄곧 남부 아지트에 머물던 콜린이 부상을 입은 채 등장했다.
다들 콜린을 의원에게 데려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콜린은 끝끝내 치료를 거부하고 피어스를 찾기만 했다.
“…치료는 됐어. 두, 두목께 드릴 말씀이….”
“나무하러 가셔서 곧 돌아오실 거야. 콜린, 뭐가 이렇게 급해?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도 자꾸 두목만 찾고….”
루카스는 어리둥절하며 콜린에게 물었다.
콜린은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핏기 없는 얼굴로 식은땀을 흘린다. 흐릿한 눈동자가 자꾸 흔들리고 입술을 바들바들 떤다.
끼이익.
마침 현관문의 녹슨 경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