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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30)화 (130/173)

130화

황녀가 어떻게 반응할까. 

부모의 허락 없이 몰래 외출하자는 제안에.

무허가 외출은 내키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황제와 황후, 그리고 테렌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줄 것이었다.

모두가 잠든다면 발각되기까지 시간은 꽤 걸리겠지만—문지기들의 교대 타임이 돌아올 때서야 석실이 비었음을 알 것이다—아마 황궁 전체가 발칵 뒤집히겠지.

과연 황녀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지 발레리는 걱정했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프리다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유, 당연하죠! 몰래라도 나갈 수 있으면 진작에 나갔을 텐데…. 석실에 창문이나 굴뚝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한 적도 있는걸요.”

“…정말요?”

“그럼요! 상상만 해도 짜릿하고 좋다. 근데 저 문지기들을 무슨 수로 이기겠어요. 나 기분 좋아지라고 한 말인 거 아니까… 그냥 꿈만 꿀게요, 발레리.”

프리다는 믿지 않았다.

믿지 않는 게 당연했다.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봐도 발레리가 저 밖의 문지기 군단을 이길 확률은 0에 수렴했다.

“황녀님, 저 진심으로 드린 말씀인데요.”

“발레리, 나도 진심으로 나가고 싶어요. 가끔은 내가 지하실이 아니라 차라리 높은 탑에 갇힌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동화도 있잖아요. 머리카락을 아주 길게 기른 공주가 탑에 갇혀서, 그걸 타고 바깥으로 탈출하는….”

그 정도였구나.

5년의 세월이면 황녀가 산 인생의 5분의 1이었다. 그동안 나가고 싶어서 어떻게 버텼을까. 안쓰러움이 감춰지지가 않았다.

“잘 생각해 보세요, 황녀님. 예고 없이 사라지면 많은 분들이 놀라실 거예요.”

발레리는 재차 확인을 받고 싶었다. 너무나도 쉽게 떨어진 승낙에 얼떨떨했다.

“으음, 왜 예고 없이 사라져야 해요? 허락은 못 받더라도 통보하고 사라지면 되지. 엿새 후에 돌아오겠다고 쪽지 남겨두면 되잖아요. 그래도 나 잡으러 쫓아오긴 하겠지만요.”

아직 프리다는 상상 속이었다.

몰래 하는 외출이라. 그려볼수록 설레는 일이었다.

프리다는 뭐가 생각났는지 연무장 바닥에서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녀가 향한 곳은 제 침대맡의 달력 앞이었다.

어느덧 2월 달력에도 X자 표시가 대부분 쳐져 있었다.

3월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정말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 정말 빨리 가네요.”

발레리도 어느새 프리다를 따라와 뒤에 서서 달력을 읽고 있었다.

“그러게요.”

“벌써 발레리를 만난 지도 열 달이 다 돼 가요.”

“…네.”

발레리는 제 앞에 선 황녀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초조한 낯빛이었다.

프리다는 고개를 틀어 제 스승을 쳐다봤다. 맑은 사파이어빛 눈동자가 영롱하게 빛났다.

“저기, 발레리.”

“네?”

“이따가 점심 먹고… 우리 땅따먹기 할래요? 발 가위바위보도 하고.”

문득 프리다는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발레리와의 첫 수업 시간, 그때가 기억나서다.

그녀와의 만남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석실에 살게 된 이래 처음이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을 느낀 건.

프리다는 그때부터 희망을 가졌다. 운명과 의지, 그리고 노력이 합쳐지면 무언가를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원하는 자유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모두 발레리 덕분이었다.

스승을 바라보는 프리다의 눈은 밝은 느낌의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네, 황녀님. 한 시간 정도만 하시고 다시 수련 들어가요.”

“…사실 되게 이상했어요.”

“뭐가요?”

“발레리 첫인상이요.”

프리다는 발레리의 얼굴 구석구석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이제야 하는 이야기지만, 발레리의 첫인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네? 제 첫인상이요?”

발레리는 어리둥절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타인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응. 내가 먼저 반갑게 악수하는데도 안 받아줬잖아요. 첫 수업 시간에는 다짜고짜 식사 메뉴부터 바꾸라고 하고. 검술 가르치라는데 무슨 발로 가위바위보부터 하자고 하고…. 아무튼 이상했어요.”

“아, 제가 그랬죠. 근데 황녀님, 생각보다 뒤끝이 기신데요? 악수 안 받은 건 갑자기 절 스승이라고 부르시니까 그랬던 건데….”

프리다는 히죽대며 발레리의 단단한 배를 쿡 찔렀다.

“헤헤, 스승님! 우리 멋진 스승님! 우리 악수 한 번 더 할까요?”

“하핫, 왜 이러세요, 또.”

발레리는 수줍어하며 얼굴을 붉혔다.

프리다는 발레리의 장갑 낀 왼손을 잡아끌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곧이어 시작된 가위바위보는 첫 수업 때보다 두 배는 빠르고 치열했다.

발레리는 이제 제자를 봐주지 않았다.

석실 안에선 그때와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발레리는 요즘도 켄드릭과 함께 채플 후원에서 검술을 겨뤘다.

처음에는 매일같이 대련을 했지만, 켄드릭이 모종의 이유로 바빠지자 일주일에 세 번씩만 검을 맞댔다.

그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발레리는 3월 들어 단 하루도 빠짐없이 퇴근길마다 그를 붙잡았다.

오늘도 켄드릭은 나선형 계단에서 그녀에게 뒷덜미를 잡혀 채플 후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날도 추운데 또 밖에서 검을 휘두르려니 별로 내키지 않았다.

“발레리, 요즘 자꾸 나한테 집착하네? 퇴근 좀 하자….”

“야, 고작 삼십 분 대련하는 게 그렇게 어렵냐?”

“나 여덟 시까지 중앙궁 가야 된단 말이야.”

“밥 먹고 칼퇴근 했잖아. 딱 삼십 분 하고 나면 중앙궁 갈 시간 남는데? 빠른 걸음으로 가면 십오 분도 안 걸려.”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요즘 대련 시간이 30분을 훌쩍 넘는 게 문제였다. 발레리는 늘 30분만 하겠다고 해 놓고, 본인이 패배하면 씩씩대며 다시 붙어보자고 우겨댔다.

켄드릭은 의아했다. 보통 대련 결과에는 순순히 승복하던 녀석인데 요즘 들어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대련이 끝난 뒤에도 혼자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말 독종이 따로 없었다.

“발레리, 너 요즘 진짜 왜 이래? 올해 건국제 무술대회라도 나가려고 이러는 거야?”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겨뤄 보자.”

“하아, 진짜 한 번만이야.”

켄드릭은 못 이기는 척 검 자루를 쥐고 그녀의 맞은편에 섰다.

대련이 시작됐다.

초반에는 전력을 다했다. 중반부부터는 힘을 조금씩 뺐다. 어쩌면 저절로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빨리 중앙궁에 가서 함께 예도를 서는 기사들, 마법사들과 최종 대열을 맞춰 봐야 하는데. 그 생각에 자꾸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오늘 그는 보기 좋게 패했다. 매번 이를 악물고 덤비는 발레리와의 대련은 점점 난이도가 높아졌다. 최근 일주일 동안은 발레리의 승률이 더 높기도 했다. 그녀가 절치부심하며 꾸준히 약점을 보완한 결과였다.

켄드릭은 땅에 떨어진 검 자루를 얼른 집어 들고 검집에 단단히 꽂아 넣었다. 오늘은 더 이상 검을 빼들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됐지?”

“야, 너 중반부터 봐준 거 다 알아. 십오 분 남았으니까 한 번 더 해.”

“한 번만 봐줘 제발. 나 중앙궁 가서 높은 분 봐야 한단 말이야.”

“…알았어. 오늘도 고마웠어. 잘 가.”

출세에 눈먼 놈 앞길 막아서 뭐 하겠나. 발레리는 짐짓 아쉬운 얼굴로 그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켄드릭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품 안의 회중시계를 꺼냈다. 남은 15분은 발레리와 더 같이 있을 수 있었다. 그 시간을 대련에 쓰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

“발레리, 잠깐 얘기나 좀 하자.”

“중앙궁 간다며…. 무슨 얘긴데?”

켄드릭은 후원의 벤치에 발레리를 앉히려다, 벤치의 온도가 차갑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를 이끌고 채플 후문 안으로 다시 들어섰다.

복도는 고요했다.

곁에 선 발레리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켄드릭은 오늘 할 말이 있었다.

“발레리. 나, 와이어 숲으로 출정하게 됐어.”

“뭐? 벌써? 그거 너 마흔 넘어서 사령관 달고 하는 거 아니었어?”

발레리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기회가 생겼어. 네 말대로 버티다 보니까… 되더라. 격려해 줘서 고마워.”

“와, 진짜 잘됐다. 언제 가는데?”

“다음 달 말에.”

“음? 황녀님 여행 가시는 시기랑 비슷하네. 아 맞다, 잠깐만!”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발레리는 다짜고짜 제 방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켄드릭은 그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며 기다렸다.

발레리는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문밖에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투박한 모양의 목걸이가 하나 들려 있었다. 주로 남자들이 하는 줄 굵은 목걸이였다. 마력석으로 보이는 작은 펜던트가 달랑거렸다.

“자, 생일 선물.”

3월 5일. 오늘은 켄드릭의 스물세 번째 생일이었다.

켄드릭은 그녀가 눈앞에 들이민 목걸이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마력석이네?”

“어, 행운의 마법 목걸이야. 황성에서 제일 큰 마력석 장신구 가게에서 샀어. 볼드윈 공작이 망한 탓에 공급량이 확 줄어서 엄청 비싸졌더라? 그래도 내 친구를 위해 큰돈 썼지.”

발레리가 잔뜩 생색을 내며 말했다.

하지만 켄드릭은 별 반응이 없었다. 실실 웃으며 눈만 맞추고 있을 뿐.

“…뭐해, 켄드릭? 안 받을 거야?”

“직접 해줘.”

“하, 귀찮게. 대가리 내려 봐.”

켄드릭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편하게 목걸이를 걸어줄 수 있도록.

발레리는 양손을 뻗어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어두운 복도에서 그녀는 눈에 불을 켰다. 목걸이의 고리를 서로 맞물리게 하려면 꽤 집중해야 했다.

갑자기 등을 감싸 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켄드릭이 그녀를 품 안에 끌어들이고 있었다.

“…잠깐, 잠깐 이대로 있자. 나 너무 추워.”

“아우, 좀 놔 봐! 집중 안 되잖아.”

“너 집중력 안 좋은 걸 왜 내 탓을 해.”

“말 걸지 마. 거의 다 됐어.”

달칵.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목걸이가 채워졌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발레리는 두 손으로 켄드릭의 가슴을 밀어냈다.

이로써 포옹은 완전히 해제됐다.

켄드릭은 허탈한 얼굴로 뺨을 긁었다.

“발레리, 넌 사람이 왜 그렇게 틈이 없어?”

“…틈? 대련할 때마다 내 틈 파고들어서 기어코 이기고야 마는 놈이 너 아니었냐.”

“그 틈 말고.”

켄드릭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발레리는 질색하며 그의 손목을 쳐냈다.

“머리 만지지 말랬지. 또 뭔 소린데. 나 놀려?”

“아니, 나 여태 너한테 별 수작 다 부렸는데 왜 매번 반응이 그래? 술 들고 방에 찾아가도 안 마셔 주고….”

사실이었다. 그동안 켄드릭은 계속해서 발레리에게 수작을 걸었다. 대련에서 이길 때마다 벌칙으로 30초씩 안아달라고 했다. 승리를 거듭할수록 포옹 요구 시간은 점점 연장됐다. 1분, 2분, 3분…. 최장 5분까지.

발레리는 5분 동안 그의 품에서 꼼짝없이 버텨야 했다. 그러던 도중 흠칫하며 그를 밀쳐냈다. 켄드릭이 이마를 붙이며 분위기를 잡았기 때문이다. 발레리는 그의 이마 한가운데 딱밤을 날리며 일갈했다. 더 이상 이딴 벌칙을 요구하면 그 잘난 머리털을 다 뽑아버린다고.

이 방법이 안 먹힌다는 걸 깨달은 켄드릭은 다음 날 술과 안주를 들고 발레리의 방을 찾아갔다. 발레리는 비소를 띠며 안주만 받아들고 술은 고스란히 그의 품에 안겨 돌려보냈다.

“…야, 그런 대형 사고를 쳤는데 너랑 어떻게 술을 마셔.”

발레리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술에 떡이 돼서 켄드릭을 테렌스로 착각해 키스했던 날. 아직도 가끔 자기 전에 그녀를 괴롭히는 기억이었다. 그럴 땐 아주 이불이 천장에 닿을 때까지 발차기를 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켄드릭은 그녀의 표정만 봐도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지 알았다. 그래서 피식 웃었다.

“있잖아, 발레리.”

“어.”

“그래도 널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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