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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29)화 (129/173)

129화  

사제는 체구가 작은 편이라 업는 데 지장은 없었다. 몸에 힘이 완전히 빠진 게 문제였다. 잘못 업으면 뒤로 자빠질 수 있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발레리는 지게를 진 것처럼 등을 구부린 채 뛰어야 했다.

발레리가 사제의 몸을 지고 다다른 곳은 바로 황궁 근위대 의무실이었다.

사제들이 아플 땐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다.

그냥 병사들이 몸에 이상이 있을 때 찾아가는 곳으로 오는 수밖에.

진료 대기 인원은 한 명도 없었다. 의무실에 노크를 하니 당직자로 보이는 군의관이 문을 열어 주었다. 희미한 인상의 흑발 사내였다.

“…뭐지?”

군의관은 발레리와 그녀의 등에 얹혀 있는 사제를 멀뚱거리며 쳐다봤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발레리는 당황 속에 멈춰버린 사고회로를 다시 가동하려 애썼다.

아 참, 관등성명부터 대야지.

“채, 채플 근위병 발레리 로빈슨입니다! 그, 저, 이 사제님이 복도에서 갑자기 쓰러지셔서요….”

“아, 그래. 여기 눕혀드려라.”

군의관은 의무실 한구석에 놓인 간이침대를 가리켰다.

발레리는 그 위에 사제를 내려놓고 한숨을 돌렸다.

진료가 시작됐다. 군의관은 사제를 흔들어 깨웠다. 아까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다음으로 사제의 이마에 손바닥을 댔다. 열은 없었다.

목에 손가락을 대고 맥을 짚었다. 잘 뛴다. 이제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들췄다. 안구가 천천히 구르고 있었다.

군의관이 눈꺼풀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자 사제의 입에서 드르렁— 소리가 나왔다.

그럼 그렇지.

군의관의 한쪽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과로가 좀 심하신 듯하다.”

“과로요? 정말요?”

“그래. 이 정도면 한나절은 주무셔야 할 거야. 여기서 푹 재운 뒤에 보내드릴 테니 걱정 말고 가서 볼 일 봐라.”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발레리는 그에게 깍듯이 경례한 뒤 의무실을 나섰다.

놀란 가슴이 이제야 진정됐다.

의사의 확인을 받았다. 저 사람은 정말 잠을 자고 있는 거라고. 그것도 아주 깊은 잠을.

다시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피리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그녀는 눈앞에 피리의 취구를 갖다 댔다.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둡고 긴 통로 끝에 희미하게 빛이 보이는 듯했다.

“…황녀님.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어요.”

발레리는 피리 중심부를 꽉 부여잡았다.

***

프리다는 주말을 맞아 찾아온 제 오라비와 점심을 들고 있었다.

테렌스는 여동생의 말을 잠자코 들어주며 흰 생선살을 입에 넣었다.

“휴, 발레리가 말하면 그래도 괜찮다고 하실 줄 알았어…. 경치 좋은 데 가서 바람 좀 쐬고 싶은 건데, 너무 심하게 반대하시네.”

“프리다, 부모님께서 뭘 걱정하는지 아시잖아. 그리고 프레이저 후작령은 와이어 숲과 너무 가깝다. 그래서 위험성이 더 큰 거야.”

프리다는 계속해서 황궁 밖에 나가겠다고 고집하고 있었다.

테렌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결전의 날을 앞두고 굳이 발레리와 단둘이 외출을 하려 하는지.

그래서 어젯밤 침실로 찾아온 발레리를 살짝 책망했다.

왜 그런 걸 소원으로 말해서 프리다의 가슴에 바람을 불어넣었느냐고. 석실에서 잘 버티던 아이에게, 왜 자꾸 바깥세상을 그리워하게 만드냐고.

좋은데, 정말 다 좋은데 굳이 왜 다음 달이어야 하냐고.

프리다가 계획하고 있는 여행에서 돌아오면 외출은 그때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땐…. 늦는단 말이에요.

발레리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울먹이며 눈시울을 붉히다가 눈물을 터뜨리듯 쏟아냈다.

테렌스는 흠칫 놀라 그녀를 꼭 끌어안고 사과했다.

다소 감정적으로 몰아붙인 건 사실이었으나 발레리가 상처를 받을 줄은 몰랐다.

—미안하다. 하지만 난 정말 걱정이 돼서 그런 거야. 일차적으로는 프리다가 걱정되지만, 동행하는 너 또한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안다고.

걱정하는 마음 잘 알고 있다고.

그렇게 대답하며, 발레리는 그와 밤을 보내지 않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슬퍼 보였고, 불안해 보였고, 또 위태로워 보였다.

테렌스는 침실 창문을 빠져나가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끝내 잡지는 못했다.

그는 연인의 쓸쓸한 뒷모습을 지우려 애쓰며 눈앞의 여동생을 쳐다봤다.

프리다는 포크와 나이프를 양손에 꽉 틀어쥐고 있었다. 마치 검 자루를 잡는 듯한 모양새로.

“오빠, 나한테는 보검이 있잖아. 그거 들고 가면 그 작자들하고 맞설 수 있어.”

여동생이 자신감에 찬 얼굴로 씨익 미소 짓고 있다. 이렇게 웃는 법 또한 스승에게 배웠을 것이다. 말투 또한 점점 그녀를 닮아가고 있었다.

“넌 오벨론을 죽일 운명인 거지, 그 수하의 집행관들을 처단한다는 얘긴 없었다.”

“…그러지 못한다는 얘긴 없었잖아.”

“흠, 네가 이렇게 낙관적으로 변할 줄은 몰랐는데…. 어쩌다 운명 불신자에서 운명 신봉자로 탈바꿈한 거지?”

테렌스의 가시 돋친 말투에 프리다는 입술을 비쭉거렸다.

오라비의 말은 틀린 게 딱히 없었다. 프리다는 지난가을까지만 해도 마지막 축일일지도 모른다며 온 백성 앞에 순백색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었다.

“뭐, 그야 내가 그동안 실력도 많이 늘었고, 또….”

딱히 변명거리가 더 생각나진 않았다.

사실 프리다가 이번 여행을 고집하는 것도 그 ‘마지막 타령’의 일부였다.

무도회 때, 프리다는 발레리의 입을 빌려 거짓 발표를 했었다.

봄에 여행을 떠날 예정이라고.

황녀가 예고 없이 사라졌을 때 모두를 안심시키기 위한 연막이었다.

와이어 숲 깊은 곳을 지나 지하세계로 향하는 일.

여행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출정이었다. 정략결혼 상대와 결혼하는 척을 하며 그를 척살하기 위한.

그곳에 가는 길목이 즐거울 리 없다.

물론 마차 안에서 창밖으로 풍경은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연무장 벽에 걸려 있는 액자를 보는 것보다도 못할 확률이 높았다.

아마 기사들은 마차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하겠지. 그래, 볼일 볼 때나 잠깐 나오게 해 주려나.

프리다는 그날이 오기 전에, 정말 그날은 생각하지 않은 채 자유롭게 바깥을 누비고 싶었다. 

물론 자신이 운명에 주어진 일을 모두 해낼 거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정말 혹시나. 만에 하나. 그대로 마왕의 신부가 되어 지하세계에 갇혀 버리는 경우의 수도 있으니까.

그럴 때를 대비해 그녀는 ‘마지막’으로 세상을 만끽하고 싶었다.

게다가 프레이저 후작령이라니. 언젠가 한 번쯤은 가보고 싶었던 여행지다.

프리다는 저를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고 싶었다.

발레리도 그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그녀가 소개해 주는 사람이라면 필시 괜찮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테렌스는 외출을 갈망하는 여동생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공감해 줄 순 없었다. 그는 안전주의자였다.

“프리다, 네 실력이 향상된 건 객관적인 사실이야. 신탁의 주인공인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위험을 감수해도 되는 건 아니다.”

“…오빠도 생각하는 건 아버지 어머니랑 똑같구나. 그래, 내가 무모해 보이는 거 알아. 하지만 집행관들이 나한테 덤벼든다 해도 난 살아남을 자신 있어. 어차피 그 사람들 나 죽이지도 못하잖아.”

“그래, 공격을 못하니 죽일 순 없겠지. 하지만 그들에 대해서 우린 알고 있는 게 많이 없다. 네가 계약에 묶여있는 한, 널 순식간에 지하세계로 이동시킬 가능성도 있어.”

“상관없어, 오빠. 지하세계에 데려다주면 나야 환영이지. 어차피 보검도 있으니 그걸로 오벨론을 죽이면 되는 거 아니겠어? 여신님이 적어도 그 목에 칼 들이댈 기회는 주시겠지. 무려 신탁의 주인공인데.”

테렌스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예전의 프리다가 아니었다. 각오가 이 정도로 단단할 줄은 몰랐다. 아마 말려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대로 놔두면 계속해서 부모님을 설득할 태세였다.

“…완강한 건 부모님이 아니라 너구나. 만일 허락이 떨어져서 외출한다 하더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책임은 네가 져야 할 거다.”

테렌스는 식사를 마친 뒤 차도 마시지 않고 일어섰다.

더 이상 이 주제로 이야기했다간 남매간의 의가 상할 것 같았다.

***

“발레리, 나 어제도 거부당했어요. 그래도 예전보다는 좀 덜 말리세요. 이젠 조금씩 포기하시는 것도 같고…. 그래도 희망이 보여요. 알죠? 나 계속 설득할 거예요.”

오전 수련을 마친 후 휴식시간.

프리다와 발레리는 점심 식사가 나오길 기다리며 수통에 담긴 찬물을 나눠 마시고 있었다.

프리다는 꼬박 두 주를 넘게 황제 부부를 설득했다. 식사를 하러 찾아오면 끈질기게 외출 이야기를 했고, 생각날 때마다 루퍼트를 통해 서신을 보냈다. 외출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그 모습은 산책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새끼 강아지 같았다.

“…뭘 그렇게까지 하세요.”

발레리는 솔직히 당황했다. 프리다가 이 정도까지 외출에 열의를 보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설득에 성공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었다.

테렌스도 그렇게 말했다. 황제 부부는 마음이 약해지기는 했으나, 전혀 딸의 외출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이와 상관없이 발레리에겐 최후의 수단이 남아 있었다.

세이렌의 피리. 그걸 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황녀는 부모의 뜻을 거슬러서라도 나갈 의향이 있을 것인가.

그게 관건이었다.

발레리는 물을 꿀떡꿀떡 넘기는 프리다의 목울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녀님.”

“…응?”

프리다가 입술에 물방울을 매단 채 대답했다.

평소보다 낮게 깔리는 발레리의 목소리가 어딘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혹시 말이에요. 정말 혹시…. 저 문지기들을 뚫을 방법이 있다면요.”

“응? 문지기들을 뚫는다고요?”

“네.”

프리다는 발레리가 문지기 30명과 겨루는 상상을 했다.

아마 발레리는 마력을 다룰 줄 모르는 평범한 인간일 것이다. 그러니 검술을 익혔겠지. 방어용 마력석을 가득 박아놓은 방패가 없다면, 아마 그녀는 마법사들에게 무참히 패배할 것이다.

불에 타거나, 전기에 지져지거나, 꽁꽁 얼어붙거나….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발레리에게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 안 돼요. 발레리, 그런 무모한 생각은 하지 말아요. 내가 어떻게든 설득을 할 테니까—”

“아뇨, 황녀님. 몰래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싸움 같은 거 안 하고, 아무도 다치지 않고요.”

프리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싸움 없이 여기서 몰래 나가다니…?”

발레리는 제 가슴을 덮고 있는 체인 메일의 표면을 슥슥 만졌다. 땀에 젖은 손에서는 쇠 냄새가 났다.

아직 그 수단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황녀님.”

“응, 말해요.”

“정말 여기서 몰래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면…. 저와 동행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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