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황후는 맞은편에 앉은 발레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일단 욕심이 없어 보이는 게 좋았다. 기품은 다소 부족했으나 정중하면서 겸손했다. 체격이 좀 커서 그렇지, 이국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탄탄하고 건강한 몸이 마음에 들었다.
‘…자작가 딸 정도만 됐어도, 우리 테렌스 짝으로 한번 생각해 봤을 텐데. 건강하니 후사를 보는 데도 문제가 없을 테고.’
황후는 그녀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꼭 전할 말이 있었다.
“전해 들었어요. 다음 달에 프리다와 함께 외출하고 싶어 한다고요.”
“아, 네 그렇습니다.”
“아가씨한테는 미안하지만 들어줄 수 없어요. 여행 준비를 마치는 날까지…. 프리다를 외출시킬 수는 없습니다.”
황후는 완강하게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발레리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한 번 축인 뒤 입을 열었다.
“여행 준비요? 황녀님께서 뭘 더 준비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분은 충분히 강하세요. 외출을 못하실 정도는 절대 아닙니다.”
“…….”
“테, 아니 황태자 전하께서도 일전에 저만 호위로 데리고 외출하셨다가 무사히 돌아오셨는걸요. 황녀님께서도 변장을 하시고, 제가 호위로 동행한다면 안전할 겁니—”
“로빈슨 양.”
발레리의 장황한 발언을 중간에 뚝 끊은 건 황제의 목소리였다.
그는 난감한 얼굴이었다.
“…네, 폐하.”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그러네. 우리도 프리다를 바깥에 내보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
그러니까 그 말할 수 없는 사정이 뭔데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또다시 눈앞에 놓였다.
발레리는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기분이었다. 기껏 열심히 집어넣은 음식들이 뱃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아이가 지하 생활에 지쳐 마음에 병이 들었었는데도 그러지 못했어. 알다시피 우리는 프리다를 끔찍이도 사랑한다네. 우리가 그랬던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고 생각해 주게.”
황제의 목소리는 타이르는 듯하면서도 강단이 있었다.
발레리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황녀님을 당당하게 이곳에서 데리고 나갈 그럴 방법은 이제 없는 걸까.
이 방법이 불가능하다면 30명의 문지기 기사들을 뚫고 빠져나오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하기는 할까.
여러 생각이 교차하니 한숨만 나왔다.
그녀는 정말 황궁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아끼고 사랑하는 황녀의 터전이자, 저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연인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러고 있자니 가슴의 다른 쪽 편에서는 단원들의 얼굴이 방울방울 떠올랐다.
나를 딸처럼, 여동생처럼, 조카처럼 아끼며 길러준 사람들.
조용히 숨어 살며 이 나라를 탈출하기만을 기다리는 그 사람들.
그들을 떠올리니 또 마음이 무거워졌다.
***
—케빈, 이번에는 네가 가야겠다.
케빈은 두목 피어스로부터 임무를 하나 받았다.
지난여름 때처럼 황궁에 잠입해서, 기다란 통 하나를 발레리에게 전달하라는 내용이었다.
피어스는 그 통과 함께 쪽지 하나를 그에게 쥐여 주었다.
—발레리 녀석한테 꼼꼼히 읽어 보라고 해라. 중요한 내용이라고.
케빈은 까막눈이었다. 내용이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에게 전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피어스도 그것을 노렸다. 루카스가 이 피리의 쓰임새를 안다면 어떻게 쓸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두목하고 발레리는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은 걸까.”
북부에 머물던 케빈이 황궁에 다다르기까지는 꼬박 사흘이 걸렸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달무리가 뿌옇게 번져 있었다.
새카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주변을 살폈다.
차디찬 겨울밤이라 그런지 지난여름에 왔을 때보단 경비병의 인적이 드물었다.
황궁 서쪽 성벽에는 마른 덩굴식물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는 끝에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성벽 위로 던져 고정한 뒤 그 위를 가볍게 타 넘었다.
케빈이 등에 메고 있는 자루 입구에는 기다란 통의 일부분이 비쭉 나와 있었다.
피어스가 북부의 대상단주 스테판에게서 빌린 물건이라고 했다.
스테판은 그 물건을 빌리는 대가로 볼드윈 공작과 관련된 몇 가지 정보를 요구했다.
그사이 공작이 몰락한 덕에 스테판이 찾아 달라던 정보는 금방 얻어다 줄 수 있었다.
20여 분 뒤 채플에 입성한 케빈은 기억하고 있던 동선을 따라 발레리의 방문을 찾아 두드렸다.
똑똑.
“…누구세요?”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새벽이 꽤나 깊었는데, 자다 일어난 목소리는 아니었다.
“나야, 케빈.”
발레리는 문을 활짝 열어줬다. 그녀는 콧물을 훌쩍거리며 반갑게 웃어 보였다.
“어, 왔어? 추운데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들어와.”
방 안도 그리 따뜻한 건 아니었다. 이제 보니 발레리의 어깨 위에는 담요가 하나 둘려 있다.
“잘 지냈어, 케빈?”
“뭐, 그럭저럭. 두목 심부름 왔어. 북부 대상단주 스테판한테서 빌려온 거래.”
케빈은 기다란 통과 함께 손바닥만 한 쪽지를 발레리에게 전달했다.
발레리는 어리둥절해 하며 물건을 받아들었다.
“…이게 뭔데? 이거 악기 통 아니야?”
“글쎄, 안 열어봐서 모르겠어. 자세한 건 그 쪽지에 쓰여 있을 거야. 두목이 꼼꼼히 읽어 보라던데.”
케빈의 말을 듣자마자 발레리는 쪽지를 다급히 펴서 읽기 시작했다.
「V, 건강히 지내고 있니?
북부의 겨울도 조금씩 저물어 가는구나. 이젠 추위에 익숙해진 듯도 해. 밤새 뽀얗게 내린 눈을 밟으며 아침을 맞이하는 것도 어느덧 하나의 일과가 됐다.
동시에 의뢰인과 약속한 시간도 점차 다가오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발레리, 최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사파이어를 가지고 나오려는 네 마음을 알고 있다.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그래서 최후의 방법을 하나 찾아 네게 전달한다.
함께 보낸 통에는 ‘세이렌의 피리’가 들어 있다. 오래전에 네가 북부 사탄 놈에게서 훔쳤던 그 피리야.
이 피리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깊은 잠에 빠진다.
경비 인력을 한꺼번에 잠재우고 목적물을 가지고 나올 수 있는 수단이라는 거다.
물론 약속 시한이 될 때까지 네가 하는 설득 작업을 이어가되, 아무리 해도 안 되면 최후에 그 피리를 쓰면 될 것 같다.
알다시피 후폭풍이 클 테니, 최대한 ‘계획성 있게’ 사용했으면 한다.
감기 조심하고.
언제나 네 안위를 생각하는 P가.」
‘계획성 있게’에 방점이 찍힌 걸 보고 발레리는 피식 웃었다.
피어스는 가끔 그녀에게 비슷한 경고를 하곤 했다. 실력 믿고 몸으로 밀어붙이지 말고, 제발 좀 치밀하게 설계한 뒤에 움직이라고.
하지만 애초에 호기심이 많고 성격이 급한 걸 어떡하나. 무슨 일이든 일단 몸으로 부딪히고 봐야 마음이 놓이는 것을.
안 그러려고 노력은 하지만 행동 자체를 교정하는 건 쉽지 않았다.
발레리는 쪽지를 고이 접어 책상에 올려놓은 뒤 악기 통의 뚜껑을 열었다.
과연 피리 하나가 들어 있었다. 단단한 나무로 깎아 만든 일자형 목관악기였다.
‘난 피리 불 줄 모르는데, 그냥 아무렇게나 불어서 소리만 나면 되는 건가?’
발레리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손안의 물건을 세심하게 뜯어봤다.
낯이 익긴 하다. 꼬마 시절 볼드윈 공작의 머리맡에 놓였던 이 물건을 슬쩍하던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당시보다 몸집이 커져서 그런지, 피리의 크기가 그때보다는 작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물건이…. 문지기 기사들을 한꺼번에 쓰러뜨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겠구나. 황제랑 황후가 끝까지 허락하지 않으면 이걸 쓰는 수밖에 없겠네.’
말하자면 보험이 생긴 것이었다.
발레리는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며 피리를 통 안에 집어넣었다.
***
일과가 없는 토요일 아침.
발레리는 시험 삼아 피리를 꺼내 불어 봤다.
—삐익.
고막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에 미간이 구겨졌다. 손끝으로 구멍 몇 개를 번갈아 막아 봤지만 썩 좋은 멜로디는 나오지 않았다. 연주법을 모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도 불어 대서 이젠 귀가 아릴 정도였다.
발레리는 회의감에 빠졌다. 이게 대체 보통 피리랑 뭐가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다.
세이렌 여신의 상징 같은 것도 새겨지지 않았고, 별다른 장식도 없었다.
일단 연주자한테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게 틀림없었다. 잠이 오기는커녕 정신이 또렷해지기만 했다.
“뭐야, 이거 진짜 효과 있는 거 맞아?”
그래서 발레리는 방문을 빼꼼 열고 고개만 내놓은 채 복도 양쪽을 살폈다.
마침 복도 끝에 당직인 남성 사제 한 명이 예배실 쪽으로 이동하는 게 보였다.
사제와의 거리는 적어도 서른 걸음쯤이었다. 설마 이렇게 멀리 있는데 저기까지 들리려고.
그녀는 피리의 취구에 입을 가져다 대고 숨을 한껏 불어넣었다.
—삐익.
발레리는 피리를 쉼 없이 불며 사제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그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그러다가 멈추었다. 오른손으로 벽을 짚는다. 그리고….
털썩.
복도 한복판에 픽 쓰러졌다.
“헉, 이거 뭐야? 진짜 이 소리 듣고 저러는 거야?”
발레리는 방 안에 피리를 던져 넣고 사제를 향해 한달음에 뛰어갔다.
사제는 사지에 힘이 빠진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 봐도 소용없었다.
가슴에 귀를 대 보니 심장 소리는 느리고 규칙적이다. 정말 평화롭게 잠자는 사람처럼.
발레리는 집게손가락으로 그의 눈꺼풀을 억지로 열었다.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저기! 사제님!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반응이 없었다.
급기야 발레리는 사제의 양쪽 뺨을 번갈아 후려치기 시작했다.
짝! 짝!
찰지고 경쾌한 소리가 복도 한가운데서 점점 크게 울렸다.
발레리의 매운 손에 사제의 양쪽 뺨이 붉게 부어올랐다. 그런데도 사제는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그녀는 손을 거뒀다. 여기서 더 때렸다간 볼의 실핏줄이 터질 것 같았다.
—쿠울….
아픔을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건지, 사제는 여전히 숙면에 빠져 있었다.
“어휴, 진짜…. 괜히 효과 시험한답시고 이게 무슨….”
발레리는 자책감을 꾹꾹 누르며 사제의 몸을 들쳐 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