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두목은 잘 지내고 있을까…. 지금쯤 북부는 모든 게 얼음덩어리일 텐데.’
2월은 정말 추웠다.
칼레바니아 황성은 북부에 약간 치우쳐 있었기에 더 그랬다.
발레리는 황태자궁 창밖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붉은색 벨벳 드레스를 입고, 캐시미어 소재의 검은 외투를 착용한 채였다. 손에는 얇은 모직 장갑이 끼워져 있다.
오늘은 황제 부부와 만찬을 함께하는 날이었다.
약속시간을 두 시간 앞두고 테렌스는 발레리를 황태자궁으로 불렀다.
레이븐의 안내에 따라 3층 귀빈실에 입성하니, 하녀들이 들어와 이렇게 드레스와 외투를 입혀 주고, 얼굴에 화장을 해서 흉터도 가려 주었다.
외투 가슴께에 붉은 장미 모양 코르사주도 달렸다. 작은 손가방도 받았다.
“이제 다 된 거예요?”
“네, 아가씨. 그럼 저희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하녀들은 일을 다 마치고 방에서 사라져 주었다.
혼자 남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노크 소리가 들리고 테렌스가 들어왔다.
그는 발레리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두 뺨을 장밋빛으로 붉혔다.
기실 홀딱 반한 표정이었다. 발레리는 이제 그의 얼굴을 읽을 줄 알았다. 그는 과거에도 같은 표정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 의미를 몰랐지만.
“…아이고, 침 떨어지겠다. 낮에 보는 건 오랜만이라 새롭고 예쁘죠?”
테렌스는 그녀의 말에 입가를 슥 훔쳤다. 당연히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는 민망해서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오늘은 제대로 에스코트할 수 있게 해 주겠나?”
“에스코트? 그게 뭐더라…. 아, 팔짱 끼라는 거죠? 무도회 때 켄드릭한테 했던 것처럼 하면 되려나.”
테렌스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왜 굳이 그자 이야기를 꺼내 마음을 쓰이게 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때보다는 좀 더 애정을 담아서 끼워 줬으면 좋겠는데.”
“네네, 그래야죠. 내가 오늘 아니면 언제 대낮에 그쪽 팔짱 껴보겠어요.”
테렌스는 문득 뭐가 생각났는지 창가로 가서 커튼을 하나하나 다 닫았다. 마지막으로는 출입문도 굳게 잠갔다.
“갑자기 왜 공간을 밀폐하고 그래요, 무섭게?”
“키스하고 싶어서.”
“아 싫어요!”
“…왜.”
테렌스는 간식을 빼앗긴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발레리는 피식 웃었다. 이 진지하고 근엄한 인간이 어린애처럼 굴게 하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스킨십 거부하기.
“립스틱 다 지워져요.”
립스틱은 하녀들이 건네준 손가방에 들어있었다. 하지만 다시 칠할 자신이 없었다. 화장을 제 손으로 해본 적이 없으니까.
“립스틱, 가방에 있지?”
“네.”
“내가 다시 발라줄게.”
“…자신 있어요?”
“이제 왼손으로 글씨도 곧잘 쓰는데. 립스틱이야 못 바를 거 없지 않겠나?”
솔직히 발레리도 그와 입을 맞추고 싶었다. 테렌스의 침실 외의 장소에서 숨을 섞는 게 오랜만이라 흥분되기도 했다.
“흠, 한 번만 믿어 볼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테렌스는 그녀의 입술을 한 입에 삼켜버렸다.
벌어진 틈으로 따뜻한 혀가 밀고 들어왔다.
테렌스는 발레리의 것을 제 것으로 감싸 녹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곧 그녀의 입술을 핥으며 립스틱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흐읍, 뭐야. 왜 다 먹고 그래요.”
“의외로 맛있어서.”
테렌스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발레리는 이 행위가 키스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외투를 벗어 가방과 함께 소파로 내던졌다.
뒷덜미를 잡고 있던 테렌스의 왼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드레스의 양쪽 어깨 부분을 끄집어 내렸다. 육감적인 근육질 어깨가 완전히 드러났다.
여기서 만족할 리 없었다. 그는 발레리의 옷을 쭉 더 내렸다.
이제 입술이 내려올 차례였다.
발레리는 고개를 젖히며 그의 머리통을 껴안았다. 질척이는 소리가 너무 적나라했다. 테렌스는 입안의 살덩이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하으, 여기까지. 이러다 늦겠어요.”
그녀는 흔적이 생기기 전에 얼른 상의를 끌어올렸다. 소파에 던져진 외투도 다시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발레리, 이따 밤에 올 거지?”
“오지 말라고 해도 올 건데요.”
“그럼 내 침실 말고, 여기 귀빈실로 오겠나?”
“네? 왜…? 아…. 네! 그럴게요.”
발레리는 그의 의도를 뒤늦게 간파했다. 오늘 밤 밀회 장소를 바꾸자는 말이었다.
뭐, 여기도 침대랑 소파가 있으니까.
그녀는 얼굴이 홧홧해진 채로 손가방을 뒤적거렸다. 립스틱이 나왔다.
“뚜껑 열어서 나한테 줄래?”
테렌스는 립스틱을 받아 그녀의 입술에 살살 문댔다. 하녀들이 발라줬던 때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꼼꼼히 잘 발랐다.
발레리는 립스틱 바르기에 한창 집중하는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지금 보니 입술에 립스틱이 덕지덕지 묻었다. 그녀는 얼른 손을 뻗어 그 자국을 엄지로 문질러냈다.
같은 입술 색을 띤 채로 그의 부모를 만날 순 없었다.
대외적으로 이들은 황태자와 병사 사이였다. 그래야만 했다.
만찬장은 중앙궁 동관 1층에 있었다.
테렌스는 예고했던 대로 발레리를 제대로 에스코트했다.
현재 그는 드레스 차림의 그녀와 팔짱을 낀 채 화려한 복도를 나란히 걷고 있었다.
몇 번씩이나 그는 옆에 선 여인을 곁눈질했다. 평소에도 예뻤지만, 오늘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입꼬리의 보조개가 사라질 생각을 않는다.
언젠가 네 남편이 되어 곁에 선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날이 온다면 나는 정말 소원이 없을 것 같은데.
테렌스는 대뜸 발레리의 장갑 낀 왼손을 잡고 약지를 만졌다.
역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뭐야, 왜 갑자기 손을 잡고 그래요. 얼른 안 빼요?”
그녀의 다급한 속삭임에 테렌스는 바로 손을 거뒀다.
발레리는 자나 깨나 반지를 끼고 있었다.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돌려준 적은 없지만, 테렌스는 그녀가 늘 반지를 끼고 있는 게 자신에 대한 마음을 나타낸다고 여겼다.
테렌스는 발레리가 점점 저를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요즘 그의 품 안에 깊이 안겨 잠을 청했다.
말로는 추워서 그런다지만 함께 있는 내내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가만히 잠든 척하고 있으면 발레리가 뺨과 눈꺼풀, 콧잔등에 입을 맞춰오는 게 느껴졌다.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뭐가 그렇게 좋으신지 모르겠네….”
발레리는 마냥 행복해 보이는 연인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오늘은 아마….
공개적으로 그의 곁에 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하지만 떳떳하지는 못했다.
그녀 자신이 아니라, 발레리 로빈슨으로서 그의 함께하는 것이니까.
만찬장에 도착했다.
발레리는 프리다에게서 배운 예법대로 인사를 했다.
“제국의 태양과 달이신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한쪽 가슴에 손을 대고 다소곳이 몸을 숙이니 제법 모양이 났다.
인사를 마치자 황후의 시녀가 다가와 외투를 가져갔다.
황제와 황후는 만족스레 미소하며 그녀에게 앉으라 권했다.
발레리는 테렌스와 나란히 착석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황후가, 테렌스의 건너편에는 황제가 자리했다.
음식이 하나둘씩 서빙되기 시작했다.
‘…황녀님한테 식사 예절 배워두길 잘 했네. 무도회 때 못 써먹은 걸 오늘 쓰게 될 줄이야.’
화려하고 복잡하게 장식된, 밤톨 크기의 갖가지 음식들이 계속해서 나왔다.
발레리는 집중력을 발휘해 포크질과 칼질에 정성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황제 부부와 테렌스의 대화에도 적당히 맞장구를 쳐 줘야 했다.
그러고 있자니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테렌스는 옆에서 내심 놀라고 있었다. 발레리의 테이블 매너가 이렇게 점잖아졌을 줄은 몰랐다. 원래 수프를 대접째 들이켜던 사람이,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자세로 식사에 임하고 있었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전혀 나지 않았다.
황제는 발레리를 흡족하게 쳐다보고 있다가, 본론을 꺼냈다.
“존 로빈슨이었나? 아가씨의 아비 되는 자에게 작위를 내릴까 하네. 우리 프리다가 건강해진 건 다 자네 덕분이야. 게다가 공작의 밀수 혐의와 관련한 제보도 해 주고 말이야.”
발레리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또 다른 종류의 작위 하사 제안이었다. 이번엔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에게 들어온 것이었다. 그녀의 가짜 아버지인 존 로빈슨은 실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그녀는 턱을 낮게 수그린 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뇨? 아뇨 아뇨. 아뇨. 그러지 마세요. 정말 아버지가 싫어할 거예요.”
“음? 딸이 가문의 명예를 세운 대가로 공을 받는 것인데 싫어할 리가 있나. 준남작 가문이 되면 약소하나마 영지도 하사될 거고, 아가씨도 괜찮은 혼처를—”
“아니, 아닙니다. 그런 거 원한 적 한 번도 없어요. 제발, 제발 주지 마세요. 부탁드립니다.”
발레리는 포크를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아 간절히 빌었다.
황제는 콧잔등을 긁었다. 모처럼 통 크게 호의를 베풀려 하는데, 뭘 이렇게 필사적으로 거절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발레리, 그렇게까지 거절할 필요는 없는데….”
테렌스가 목소리를 낮춰 그녀에게 속삭였다. 발레리는 못 들은 척했다.
그는 연인의 태도가 짐짓 아쉬웠다.
서로 마음도 통했고 프리다의 실력도 눈에 띄게 발전했으니, 이젠 좀 호의를 받아들여도 될 텐데.
그리고 신분이 어느 정도 상승해야 그녀를 비로 맞이할 명분이 생기지 않겠는가.
황제 또한 어떻게든 그녀의 노고를 치하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음, 일단 아가씨의 아버지에게 서신을 보내 의향을 묻도록 하지.”
“…아, 아버지는 글을 모르세요.”
“그럼 직접 불러서….”
“아뇨! 아니, 그게 바, 바빠서 못 올라오실 거예요. 제발 아무것도 주지 마세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저희 아버지는 부담스러운 걸 제일 싫어하세요. 그냥 저한테 꼬박꼬박 월급 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맛있는 음식도 이렇게 대접해 주시고….”
발레리는 황제에게 다시 한번 두 손을 모아 읍소했다.
“흠….”
황제 언짢은 듯 헛기침했다.
“모처럼 생각해 주셨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
“아가씨에게 최대한 성의 표시를 하려 했는데. 그렇게 거절하니 썩 유쾌하진 않군.”
발레리는 또다시 실감했다. 가짜 신분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찝찝하고 찔리는 일인지.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결코 가볍게 식사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그 정도로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황녀님께선 스스로 노력해서 강해지신 거고, 저는 그저 요령만 알려드렸을 뿐입니다. 마력석 밀수 제보는 그저 아는 사람한테 전해 들은 걸 상신했을 뿐이고요.”
발레리는 황제에게 사과하며 맥없이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