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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26)화 (126/173)

126화  

황제는 단호히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명이 아니라 이천 명을 호위로 붙여도 안 될 일이다. 그자들이 언제 습격할지 어찌 아느냐.”

“그래서 보검을 가져간다는 거예요, 아버지. 어차피 오벨론을 제외하면 집행관은 네 명밖에 없잖아요. 많이 와봐야 두세 명 아니겠어요? 형벌 집행하느라 바쁜 작자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저 잡으러 나올 리도 없을 거고요.”

“하아, 프리다. 또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구나….”

골머리가 아팠다. 딸은 실력이 강해진 만큼 간도 무지막지하게 커져 있었다.

“아버지. 저한테는 운명을 믿으라면서요. 왜 그 주인공인 저를 믿어 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어떤 위험에 처하든 저는 이겨내고 돌아올 자신 있어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를 안 믿는 게 아니야. 그자들을 믿지 못하는 거지. 프리다, 외출은 안 될 일이다. 어차피 출정이 끝나고 돌아오면, 그 아가씨와 함께 어디든 다닐 수 있을 거다.”

“그래, 프리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걸 너도 알고 있잖니. 난 네가 금방 돌아올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후에는 로빈슨 양과 어딜 다녀도 좋아.”

황제와 황후는 귀한 딸을 석실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프리다는 맥이 빠졌다.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몸과 마음이 아픈 딸을 장장 5년 동안 가둬둔 사람들이다.

고작 한두 번의 설득으로 넘어갈 리 없다고 생각했다.

‘석실에 찾아오실 때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얘기해야겠어. 출정하기 전에…. 정말 한 번만 나가보고 싶어.’

***

지하세계의 무수한 자색 촛불들은 여전히 음산하고 기괴한 공간을 희미하게 밝혔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요철투성이인 검붉은 벽 위에 네모난 액자 하나가 걸렸다.

제1 집행관 바일론은 그 앞에 서서 액자 안에 든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허리춤까지 찰랑거리던 백발은 하나로 높이 묶은 채였다.

“이 그림은 볼 때마다 정말 엘로이스와 똑같이 생겼습니다….”

말끝이 잔물결처럼 떨렸다. 그는 엘로이스가 전대 최고 집행관을 참수하는 장면을 그대로 본 목격자였다.

초상화는 주인공만큼이나 화려한 금빛 액자에 담겨 있었다.

오벨론은 그 액자를 울퉁불퉁한 벽에서 그나마 가장 평평한 부분에 고정해 두었다. 망자들을 처벌할 때 쓰는 대못으로 직접 박은 것이었다.

“…몇 대가 흘렀어도 한 핏줄이다. 인간의 외모는 대대로 유전되니, 안 닮을 순 없겠지.”

오벨론은 바일론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바일론보다 반 뼘은 컸다. 인간계 단위로 환산하자면 2미터는 훌쩍 넘을 것이다.

바일론은 상관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청각이 없는 그는 입 모양을 볼 수 없는 각도에서는 누군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오벨론은 바일론이 제 말을 듣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들으라고 한 말도 아니었다.

지금 그의 금안에 비치고 있는 건, 언젠가 제 아내가 될 여인 프리다의 초상화였다.

“…정말 얼굴만 보면 동일인 같군.”

오벨론은 초상화 속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며 덧붙였다.

앞서 오벨론은 황제에게 답신을 보내며 황녀의 초상화를 달라고 요구했다.

「내 얼굴을 그려 보냈으니, 내 궁금증 또한 해소해 줘야 하지 않겠소? 시중에 판매되는 초상화 말고, 최근 모습을 담은 그림을 새로 그려서 보내 주시오.」

하지만 지하 석실로 외부 화가를 부를 순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림을 취미로 그리는 문지기 기사 바제프 경이 붓을 잡았다.

처음에 바제프는 긴장해서 갈피를 못 잡았다. 다행히 망친 밑그림 몇 장을 버리고 나니, 아내와 딸의 얼굴을 수백 장씩 그려낸 실력이 나왔다.

그가 그린 그림은 프리다가 풍겨내는 특유의 분위기를 전부 담지는 못했으나, 수려한 이목구비는 정확히 들어가 있었다.

오벨론과 바일론이 초상화 앞에 딱 붙어 있으니, 스텔론은 까마귀로 변신해 날아와 오벨론의 어깨에 앉았다.

그녀는 까마귀의 형상으로 입을 열었다.

“오벨론 님. 곧 다음 집행이 시작됩니다. 또 황녀의 초상화를 보고 계신 겁니까.”

“…아무리 봐도 날 처단할 위인으로는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스텔론, 네 보기엔 어떠냐.”

“흠, 엘로이스 황제와 얼굴은 정말 많이 닮긴 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몸이 왜소해 보이네요. 어쩌면 건강 문제가 아직까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텔론도 프리다의 초상화를 보며 감상평을 내놨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프리다는 수련을 거듭한 끝에 꽤 근육질이 되었으나, 타고난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다부진 전사 체형이었던 엘로이스보다는 확실히 덜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그림 속에서도 평상시 걸치던 흰 셔츠와 가죽 바지 차림이었다. 머리만 짧았다면 필시 열다섯 정도 먹은 소년으로 보였을 것이다.

“인간은 겉으로 판단해선 안 되지. 하지만 엘로이스보다 약해 보이는 건 사실이야.”

오벨론은 이렇게 말하며 과거의 한 예언을 떠올렸다.

—오벨론, 네가 인간의 힘을 빌어 집권했으니, 인간에 의해 멸망할 각오도 되어 있을 테지. 널 그 자리에 앉힌 엘로이스가 언젠가 칼레바니아 황실에 환생한다.

그의 임기가 막 끝났을 때, 시에나 여신은 이 같은 예언을 전달했다.

최고 집행관의 임기는 인간 세계의 단위로 환산하면 500년이었다.

지금은 제국력 676년. 현시점에서 오벨론의 임기는 176년을 넘긴 셈이었다.

임기를 완전히 채운 오벨론은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그 환생자가 제 임기를 끝내러 오기라도 한다는 말씀입니까.

—네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그럴 것이다.

—시에나 님, 저보다 사후세계 집행관 일을 잘할 수 있는 천자는 없습니다. 죄목과 죄질에 따라 형을 세분화하고, 약자를 해한 이들의 처벌 수위도 합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래서 제게 심판권까지 넘겨주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오벨론, 내 너의 유능함을 의심치는 않는다. 그렇다 해서 내가 법에 명시한 임기를 무시하고 치세를 영원히 이어갈 권리까지 주어지는 건 아니다.

—아직 최고 집행관으로 마땅한 자가 없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임기가 지났는데도 저를 그냥 두고 계신 것 아닙니까.

—아니. 네가 스스로 물러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후회하기 전에.

오벨론은 시에나의 자진 사퇴 권고를 또다시 거부했다.

시에나는 고개를 저은 뒤 이런 경고를 남겼다.

—집행관에게 심판까지 맡기면 어김없이 임기를 어기고 독재를 하려 들더군. 오벨론, 네 전대 집행관인 스갈론처럼 굴다간 그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그로부터 수십 년 후.

아직 지상에 엘로이스가 환생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오벨론은 마력석이 당장 급한 던컨 황제를 구슬려 계약을 맺었다.

지하세계를 둘러싼 마력석 광산—암흑에 뒤덮여 있던—을 황실에 넘기는 대신에, 추후 태어날 황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집행관이 맺는 계약은 시에나 여신의 인장이 있어야 효력을 얻었다.

오벨론의 요청으로 지하세계에 강림한 시에나 여신은 계약서를 한 번 훑은 뒤 한참을 목청 높여 웃었다.

—집행관이 인간을 비로 맞아들인다는 말은 처음 듣는군. 이러나저러나 너를 죽일 여인이다. 죽음을 앞당겨 맞고 싶어서 이러는가, 오벨론?

시에나 여신은 비소를 띠며 물었다.

거기에 오벨론은 이렇게 답했다.

—제게 내리신 운명과 정면 승부할 겁니다. 어떻게든 그 인간 여자가 절 죽이지 못하게 만들 겁니다.

—인간 여자가 널 사랑하게 된다면, 죽이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겨우 인간에게 사랑받으려 애쓰는 그런 구차한 일은 벌이지 않습니다.

—뭐 다른 방법이 있나 보군. 어디 한번 힘차게 발버둥 쳐 봐. 결국엔 어떻게 되는지 나도 보고 싶구나.

저를 죽일 인간을 아내로 맞아들여봤자 오벨론이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살아있는 인간의 생사에 관여할 수 없었다. 청부 등 간접적인 방식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여신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계, 즉 칼레바니아의 법을 이용하기로 했다.

한 남성이 여성을 자신의 통제하에 둘 방법이 존재했다.

그게 바로 결혼이었다.

하지만 칼레바니아 황실은 황녀를 끈질기게 싸고돌았다. 원래대로라면 스무 살에 이곳에 와야 했다.

5년의 시간을 주었으나 황실은 또 황녀를 어떻게 빼돌릴지 모른다. 황녀가 제 운명을 알게 된다면, 언제 예고 없이 찾아와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벨론은 조바심에 몸서리쳤다.

지하세계 한 편에 성을 한 채 만들었다. 얼른 그녀를 사로잡아 그곳에서 안전히 재워 두어야 한다. 수명이 다할 때까지.

만물을 녹일 수 있는 용광로도 만들었다. 그곳에 저의 목숨을 끊을 유일한 무기인 보검을 던져 넣어야 한다.

황녀는 물론 약속된 날짜에 자진해서 찾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약속을 두 번이나 어긴 황실이었다.

그래서 오벨론은 보험을 하나 만들었다.

다른 인간의 힘을 빌려 보기로 했다.

황녀와 보검을 약속된 날짜에 무사히 눈앞에 대령할 또 다른 방법이었다.

오벨론이 작성한 의뢰서에는 악의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황녀를 산 채로 데려오라는 말.

황실의 보검을 가져오라는 말.

수단에 대해선 일언반구 하지 않았으니, 악행 사주라고 할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 의뢰를 수행할지는 인간의 재량에 맡기면 되는 일이었다.

시에나 여신도 의뢰서에 별말 없이 인장을 찍어 주었다. 가벼운 비웃음과 함께.

오벨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마 인간이라면 납치와 도둑질이라는 죄를 스스럼없이 범할 수 있겠지.

천계의 법에 묶여 있는 나와는 달리.

그리고 그 의뢰서를 누가 받게 될지는 이미 점찍어 두었다.

와이어 숲에서 수백 년 간 지켜본 인간들 중 가장 간이 큰 자.

지하세계로 잡혀 들어간 이들이 떨어뜨린 무기를 겁도 없이 주워가던 자.

바로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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