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제국력 676년.
볼드윈 공작가를 둘러싼 사건이 대강 매듭지어지는 사이 새해가 밝았다.
잠에서 막 깬 프리다는 새하얀 털 실내화를 질질 끌며 석실 소파에 가서 앉았다.
티 테이블에는 칼레반 타임스 신년특집호와 따뜻한 홍차가 놓여 있었다. 켄드릭이 요즘 출근하자마자 소리 없이 가져다 두는 것이었다.
프리다는 얼른 신문지를 펼쳐 1면 헤드라인을 봤다. 공작이 저택에서 ‘호화 감금생활’을 하고 있다는 폭로성 기사였다.
공작이 몰락한 뒤 그에 대한 비판 기사는 봇물처럼 쏟아졌다. 기자들도 그동안 칼을 갈고 있었는지 뒤에 쌓아두고 있던 정보들을 날것 그대로 싣기 시작했다.
“…아버진 공작한테 너무 약하셔. 지하 감옥에 가둬도 모자랄 텐데, 아무리 무기한이라지만 가택연금이 뭐야.”
2면, 3면으로 갈수록 공작은 참 대단한 미꾸라지였다. 친자식이 모든 혐의를 덮어쓰도록 둔 게 제일 혐오스러웠다. 프리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신문을 접었다.
쿵쿵.
그러는 사이 발레리가 출근했다.
프리다는 평소와 같이 쪼르르 달려가 스승의 품에 안겼다.
“좋은 아침! 발레리, 잘 잤어요?”
“네, 덕분에요. 황녀님, 대련 준비는 되셨어요? 밖에 기사들 벌써부터 몸 풀고 있던데.”
프리다는 건치가 드러나도록 호기롭게 웃었다.
“헤헤, 당연하죠! 얼른 옷 갈아입고 올게요!”
마침 오늘은 프리다가 석실 문지기 기사들과 대련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프리다의 검술 실력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일취월장했다. 엄청난 연습량과 성실한 근성, 그리고 자유를 향한 굳은 의지가 빚어낸 결과였다.
발레리는 이제 제자가 기사들을 직접 상대할 만큼 성장했다고 판단했다.
이번 달 내내 프리다는 하루에 기사를 두세 명씩 상대할 예정이다. 최대한 다양한 상대와 겨뤄보면서 실전 감각을 이끌어내는 게 목적이었다.
발레리는 대련 시 사용할 무기를 목검으로 지정했다. 아무래도 부상 위험을 줄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이 계획을 테렌스에게 설명하니, 그는 곧바로 엘로이스의 보검과 똑같은 모양으로 깎아 놓은 목검을 마련해 석실로 전달해 주었다.
“황녀님, 다 입으셨어요?”
드레스룸을 둘러싼 가벽 너머로 발레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금방 나갈게요!”
갑옷을 주섬주섬 갖춰 입은 프리다는 한 번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투구를 착용했다. 그녀는 허리춤의 목검 자루를 꽉 쥐며 딱 세 번 되뇌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
정말 의외였다.
기사들은 생각보다 움직임이 느렸다.
첫 대련에서 프리다는 제 발동작이 객관적으로 빠르다는 것을 자각했다.
저보다 훨씬 날랜 스승만 상대하다 보니 민첩성이 늘 부족하다고만 여겼다. ‘충분히 빠르세요’라던 발레리의 칭찬도 그저 입 발린 소리라고만 생각했었다.
이제 보니 진심이 담긴 칭찬이었다.
첫 대련 상대인 줄리언 경은 초장부터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황녀가 우다다다 달려와 빈 공간부터 찌르고 들어오자 자세가 흐트러졌다.
프리다는 발레리의 조언대로만 움직였다. 줄리언 경처럼 우람한 덩치의 사내는 시작하자마자 빠르게 몰아붙여야 승산이 있다고 했다.
그녀의 맹렬한 기세에 줄리언은 계속해서 주춤거렸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석실 철문 앞에서 동료들과 너스레를 떨었다.
—황녀님 자존심 안 상하게 하려면 좀 봐드리는 게 낫겠지?
—줄리언, 당연한 거 아냐? 평소 실력의 십분의 일만 발휘해도 황녀님은 울면서 항복하실걸. 앞길 막히기 싫으면 최대한 설렁설렁해.
—그래. 이것도 사회생활인데, 적당히 해서 기분 맞춰 드려야지! 다녀온다!
져 주기는 개뿔. 입으로 방귀를 뀐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제 자존심에 똥칠을 하게 생겼다. 줄리언은 검 자루를 고쳐 쥐고 눈을 부릅떴다. 더 뒤로 밀리기 전에 반격 동작에 시동을 걸어야 했다.
뒷걸음질을 멈춘 그는 곰처럼 묵직한 동작으로 목검을 휘둘렀다. 이 여자가 아무리 빨라도 내 완력에는 상대가 안 될 거야. 그럼, 그렇고말고.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어깨높이도 안 되는 황녀는 정말 벌새처럼 날아다녔다. 목검이 턱턱 부딪힐 때마다 받는 충격이 꽤 셀 텐데, 그걸 다 흡수해 땅으로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
피하기는 또 더럽게 잘 피한다. 몸집이라도 좀 더 컸다면 어떻게든 맞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말이 쉽지 잘 안 된다. 콩알만 한 여자가 어찌나 폴짝폴짝 바쁘게 뛰어대는지 정신이 사나울 지경이었다.
프리다가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줄리언 경은 뒷걸음질을 치다 동작이 또 꼬였다.
그새 프리다는 빈틈을 포착했다. 얼른 자세를 낮춰 더 다가갔다. 그녀는 상대방의 턱밑을 노려보며 바닥을 딛고 고무공처럼 튀어 올랐다.
퍽—
뭉툭한 목검 끝이 턱밑에 보기 좋게 명중했다.
“흐아악!”
아무리 뭉툭하게 다듬은 목검이라도 그 자리를 찌르면 아프다. 줄리언은 환부를 감싸 쥐며 연무장 바닥에 주저앉았다.
프리다는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그의 목에 칼끝을 겨눴다.
“줄리언 경, 내가 이긴 거 맞죠?”
“아, 예! 그럼요! 황녀님, 정말 놀랍습니다, 아하하!”
줄리언은 목검을 바닥에 놓고 손뼉을 쳤다.
‘와, 이거 장난 아니구먼. 다음 타자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무조건 전력으로 상대하라고 해야 하나.’
그는 이마에 흥건한 식은땀을 훔치며 석실 문밖으로 나갔다.
프리다는 연무장 한가운데 멀거니 서 있었다. 너무나도 쉽게 얻어낸 첫 승리에 얼떨떨했다.
발레리는 흐뭇하게 미소하며 다가가 제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제 말이 맞죠? 아무도 못 이기실 실력은 아니라고요.”
“…나 진짜 안 믿겨요. 진짜 내가 이긴 거 맞아요?”
“네, 그럼요. 근데 점점 어려워질 거예요. 줄리언 경은 첫 상대라 방심한 채로 들어왔겠지만, 황녀님 실력이 알려질수록 기사들은 본실력으로 나올 거니까요.”
“그렇겠네요. 각오하고 있을게요.”
***
발레리는 딱 열 명만 이기라고 했었다. 그래야 제 소원을 들려주겠다면서.
프리다는 정말 딱 열 명만 이기자는 마음으로 대련에 임했다.
겪어 보니 너무나도 소박한 목표였다. 일흔두 명 중에 열 명을 쓰러뜨리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목표는 이미 초중반에 달성됐다. 무려 스물세 번째 대련까지, 기사들은 열이면 열 방심한 채로 들어왔다.
줄리언 경을 비롯한 여러 도전자들이 ‘평소 실력대로 안 했다간 큰코다친다’고 경고해도 그랬다.
하지만 방심한 상태로도 프리다를 쉽게 이기는 기사들도 있었다. 체구가 비교적 작고, 검술 동작이 딱딱 끊어지는 기민한 타입의 기사들이 그랬다. 그들은 발이 꽤 빠른 데다 완력도 프리다보다 강했다. 무엇보다 대련 경험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런 류의 대표격이 바제프 경이었다. 그는 검을 부딪치는 와중에도 “뭐야, 들은 것보다는 별로 안 빠르신데요!”라고 하면서 프리다를 도발했다. 프리다는 그에게 무참히 패배한 뒤 씩씩거리며 눈물까지 보였다.
발레리는 분해하는 제자를 토닥이며 이렇게 조언했다.
“…저렇게 약 올리는 것도 다 심리전이에요. 그냥 한 귀로 흘리셔야 안 흔들려요.”
“흐윽, 알겠어요. 그냥 어제부터 네 번을 연달아 지니까 조금 자존심이 상해서 그래요.”
“이제 기사들이 본실력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 같은데…. 꼼수를 쓰셔야 해요. 갖은 방법을 다 써서 주의를 흩뜨리세요. 어차피 황녀님, 어떤 방법으로든 이기는 것만이 목표라고 하셨잖아요. 페어플레이 이런 건 곱게 접어 두자고요.”
프리다는 순종적인 제자였다.
다음 날부터 석실 연무장에서는 반칙이 난무하는 대환장 쇼가 펼쳐졌다.
눈빛이 날카로워진 만큼 프리다는 야비한 승부를 펼쳤다. ‘어, 저게 뭐죠?’ 하면서 허공을 가리켜 주의를 분산시킨 뒤 공격했다. 뜬금없이 윙크를 날리는 등 미인계를 쓰기도 했다.
바닥에 미끄러지는 척하면서 상대방에게 태클을 걸어 넘어뜨리는 일도 있었다. ‘아 잠깐만, 신발 끈 좀 묶고요!’ 하면서 허리를 숙이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돌진해 허를 찔렀다.
‘아으, 더 이상은 힘들겠다’면서 검을 거두는 척하다가, 승리감에 찬 상대방이 빈틈을 보이자 거리를 좁혀 결정타를 날리기도 했다.
치사하고 졸렬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프리다에겐 정말 이기는 것만이 중요했다.
패배한 기사들은 앓는 소리를 했다.
—황녀님, 비겁해도 너무 비겁하십니다!
—아으, 황녀님, 기사도 정신 어디 두고 오셨습니까!
—그런 눈으로 윙크를 하시면 제가 안 녹고 배깁니까! 아우, 다시 해요 다시!
한창 열을 내며 다시 겨뤄 보자는 기사들을 워워 말리며 밖으로 내보내는 건 집사인 켄드릭의 몫이었다.
어김없이 켄드릭의 차례도 다가왔다. 그 또한 황녀의 석실 문지기 기사였으니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는 황녀의 쉰일곱 번째 대련 상대였다.
제비뽑기로 걸린 순번이었다.
켄드릭은 이미 프리다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발레리와 더불어 프리다가 검술 실력을 닦는 데 일조한 인물이었다.
야근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틈틈이 자세도 교정해 주고 부족한 부분도 보충해 주었으니, 프리다의 보조 스승이라 해도 될 정도였다.
“황녀님, 저는 안 봐 드릴 겁니다. 발레리도 저한테는 얄짤없습니다.”
“하핫, 켄드릭한테는 져도 안 억울해요. 괜찮으니까 부디 본 실력대로 해요.”
안 봐주겠다는 말에는 약간의 거짓이 섞여 있었다. 켄드릭은 초반부에 힘을 완전히 빼다시피 하면서 탐색전을 벌였다.
잘 보니 프리다의 패턴에 새로운 게 몇 가지 추가돼 있었다. 발레리가 속성으로 주입한 속임수 동작이었다.
켄드릭은 웃었다. 순전히 뿌듯함에서 우러나온 미소였다.
‘발레리만큼은 아니지만, 정말 동작을 스펀지처럼 잘 흡수하시네. 근데 어떡하지. 이거 발레리가 저번 주에 나한테 썼던 꼼수인데.’
—탁.
켄드릭은 체중을 실어 프리다의 목검을 비스듬히 내리쳤다. 프리다가 미처 대비하지 못한 각도였다. 검 자루가 프리다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그녀의 목검이 허무하게 바닥에 나뒹굴었다.
켄드릭은 한 번 어깨를 으쓱이며 프리다의 목 앞에 뭉툭한 칼끝을 가져다 댔다.
“하하, 제가 이긴 것 같긴 한데…. 황녀님께 이러고 있으니 무슨 반역이라도 하는 기분이네요.”
“와, 켄드릭은 몸집이 큰데도 동작이 정말 빠르네요. 발레리만큼이나 빠른 것 같아요.”
“…다 쟤한테 배운 겁니다.”
켄드릭은 발레리 쪽을 한 번 슥 쳐다본 뒤 목검을 거뒀다.
그는 아래로 손을 뻗어 프리다를 일으켜 세웠다.
엉덩이를 툭툭 턴 프리다는 훌쩍 높은 위치에 있는 켄드릭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켄드릭, 출정할 준비 됐나요?”
“네? 출정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와이어 숲이요.”
“…….”
켄드릭이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다.
올해는 기회가 있을 거라고 예고했었는데.
황제가 계획하는 일에 드디어 합류할 수 있게 되는 걸까.
“아버지께 곧 말씀드릴 거예요. 자세한 이야기는, 허락이 떨어진 후에 말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녀님.”
“다만 경은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예요.”
“네? 그게 무슨….”
“싸우는 건 다른 사람이 하니까, 잘 지켜보기만 해요. 그러는 것만으로 힘이 될 거예요.”
연무장 한가운데서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발레리는 천천히 다가와 수건 두 장을 건넸다.
둘은 수건을 받아들고 이마와 목덜미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두 분 고생 많았어요. 그럼 이제 우리 저녁 먹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