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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22)화 (122/173)

122화  

테렌스는 집무실의 탁상 거울을 들여다보며 제복 칼라 매무새를 고쳤다.

오늘 그가 착용한 검은색 제복은 굳은 표정과 어우러져 금욕적이고 절제된 인상을 줬다.

평소의 흰색 제복을 입었을 때보다 엄숙해 보였다.

그의 모습은 첫 강론을 앞두고 긴장한 청년 사제, 혹은 중요 재판을 앞둔 젊은 법관처럼 보이기도 했다.

테렌스의 곁에서 꼼꼼히 증거품을 챙기던 레이븐은 그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결전의 날이네요. 준비는 되셨어요?”

“…그래.”

테렌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오늘 테렌스는 황제 엘리엇에게 볼드윈 공작의 마력석 밀수 혐의를 정식으로 제기할 예정이다.

어젯밤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도착했다.

웬 전서조가 테렌스의 침실 창가에 날아들었다. 발목에 서신이 묶여 있었다. 아델라, 즉 에이바가 보낸 것이었다. 제 아비와 로널드 업튼이 독대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대화 내용은 엿듣지 못했다지만, 마력석 생산 시설과 불법 카지노 사업장을 관리하는 인물의 보고 라인 끝에 공작이 있다는 증거였다.

이미 테렌스는 수 주 전부터 황제에게 예고해 두었다.

볼드윈 공작과 관련해 고발할 사항이 있다고.

황제는 매번 정책에—특히 평민을 위한 복지 정책—딴지를 거는 공작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귀족 사회에서 그가 점한 위치를 생각하며 표면적으로는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공작의 부정에 관한 고발이 들어와도 황제는 늘 경고 선에서 마무리했다. 전혀 내키지는 않았으나, 개국공신이자 제국 제1의 귀족 가문을 그 이상으로 건드릴 순 없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경고 선에선 그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테렌스는 레이븐만을 대동한 채 황태자궁을 빠져나왔다.

하늘이 다소 어둑한 아침이었다.

그는 예고했던 시간에 정확히 맞추어 중앙궁 동관의 황제 집무실에 찾아왔다.

벽난로가 훈훈하게 타오르는 집무실에서 황제는 사람 좋은 미소로 아들을 맞아주었다.

“그래, 테렌스. 공작이 이번에는 무슨 부정을 저질렀느냐.”

황제는 여상한 투로 물었다.

공작은 민생에 전혀 신경 쓰지 않기로 악명이 높았다. 이번에도 여느 때처럼 황실에서 구휼 명목으로 지원한 금품을 애먼 데 썼겠거니 싶었다.

“비위가 큽니다. 일찍 말씀드릴까 했지만, 사건의 연결고리를 좀 더 확보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테렌스는 공작의 마력석 밀수 혐의와 관련해 제보받은 사안을 소상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추가로 파악한 정보도 덧붙였다.

루카스로부터 넘겨받은 공작령의 지도를 펴놓고 밀수품의 이동 경로까지 구체적으로 부연했다.

그의 말을 잠자코 듣던 황제의 얼굴빛은 하얗게 질렸다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파랗게 식었다. 그때부터는 뒷목을 잡았다.

종국에는 책상을 쾅, 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여느 때처럼 눈감아줄 만한 수준의 부정이 아니었다.

어떻게 일국의 고위 귀족이 타국에 군수품을 밀수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어떻게 개국공신 가문에서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벌인단 말이냐.”

테렌스는 이게 다가 아니라는 듯 재킷 주머니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 루카스로부터 건네받은 비덴티움이었다.

“…밀수 현장을 잡은 목격자의 기록도 있습니다. 레이븐, 비덴티움을 좀 부탁한다.”

레이븐은 테렌스의 지시에 따라 프리즘 안에 빛을 쏘았다.

황제의 서재 벽면에 루카스의 미행 장면이 그대로 재생됐다.

물론 맨 끝부분의 ‘두목’ 장면이 나오기 전에 레이븐은 지팡이의 빛을 거두었다.

기록을 전부 확인한 황제는 망연자실했다.

프리다의 출정 계획을 짜는 데만 몰두하다 보니 다른 사안들을 등한시했다는 걸 실감했다.

천만다행이었다. 내정의 대부분을 도맡다시피 한 테렌스가 국경 근처의 일까지 챙기고 있어서.

“…테렌스, 네 정보원들이 황실 직속 정보기관보다 낫구나.”

“운이 좋아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았을 뿐입니다.”

황제는 테렌스의 왼손을 감싸 쥐고 거듭 고마움을 표시했다.

테렌스는 발레리와 에이바를 생각했다. 9할,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은 그녀들의 도움이었다.

***

테렌스의 조언에 따라 황제는 공작령에 은밀히 병력을 파견했다. 그들은 정확한 시간에 표적을 덮쳤다.

이렇게 마력석 생산 시설과 사피로스 강 부두의 밀수 현장에서 일어난 일은 공식적인 사실로 확인됐다.

공작의 장남 사이러스가 밀실 술집으로 위장해 운영하던 카지노도 간판이 떨어졌다.

사이러스는 현행범으로 체포돼 황실 지하 감옥에 수감됐다. 공작 또한 강제로 연행돼 황궁 인근 피오르탑에 구금됐다.

며칠 후 부자는 긴급 재판에 회부되었다.

황제 부부와 테렌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부자는 피고인석에 나란히 앉아 법정 진술에 임했다.

“모든 게 사이러스가 은밀히 꾸민 일입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아버지, 어떻게 그런….”

“카지노 사업과 마력석 밀수에 저는 관여한 적이 없습니다. 로널드 업튼은 먼 친척의 아들일 뿐입니다. 그와는 절대로, 안부 이상의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없습니다.”

공작은 끝까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그 태도에는 이유가 있었다. 황실 기사들이 저택에 들이닥치기 전에 증거를 인멸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핵심 인물인 로널드 업튼은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돌연사한 뒤였다. 부검 결과 그의 피에서는 백사의 맹독이 발견됐다.

카지노에서 공작저로 흘러드는 자금은 그때그때 공예품과 미술품으로 감쪽같이 세탁되고 있었다.

모든 혐의를 뒤집어쓴 사이러스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아버지의 연관 사실을 고발해 봤자 저는 물귀신이 될 뿐이었다.

공작은 퀭한 눈빛으로 아들을 흘겨보며 무언의 뜻을 전달했다.

‘혼자 죽어라. 집안 멸문시키기 싫으면.’

재판 결과, 주범인 사이러스에게는 교수형이 선고됐다. 집행일은 공란으로 남겨두었기에 사실상 종신형에 가까웠다.

크세니아와의 외교 관계는 파탄이 났다.

제국 최북단의 국경 지대에서는 공작가의 기사들이 철수하고, 황궁에서 파견한 중앙군 병력이 배치됐다.

공작의 차녀—이전까진 혼외 딸이었던—와 크세니아 3황자의 혼약 또한 전면 무효화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세니아에서는 황태자 데스몬드를 특사로 파견해 칼레바니아에 유감을 표명했다.

데스몬드는 자국 황실이 이 사안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잡아뗐다.

마력석 수입과 관련해서는 언제나 합법적인 경로만 추구했다는 주장도 펼쳤다.

퍽이나 그랬겠다.

황제 엘리엇은 코웃음을 쳤다. 동석한 테렌스도 차가운 미소 속에 환멸을 애써 감췄다.

데스몬드의 변명은 볼드윈 공작이 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공작과 혼담이 오가던 3황자 선에서 꼬리를 잘라 버렸다. 3황자는 황족 신분을 박탈당한 뒤 이름 모를 섬에 유배될 예정이라고 했다.

“역시…. 권력 앞에서는 피도 자식도 없는 건 저 나라도 마찬가지군.”

황제 엘리엇은 데스몬드와 함께 떠나는 크세니아 사절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권태를 느꼈다.

크세니아는 3황자의 저택에서 압수했다는 마력석 가루의 전량을 칼레바니아에 반납하겠다고 약속했다.

수천만 갈렌의 배상금도 지불했다.

곧이어 황궁에 도착한 마력석 가루는 예상보다 어마어마한 양이었으나, 테렌스는 이것이 전부가 아닐 것으로 추정했다.

당연히 볼드윈 공작도 처벌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무기한 가택연금.

죽을 때까지 저택 밖으로는 단 한 발짝도 내놓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재산도 상당량을 몰수당했지만 목숨만큼은 부지할 수 있었다. 개국공신 가문의 가주인데다 제국 유일 공작이라는 이유로.

귀족파의 거두인 그의 명줄까지 끊어놓기엔 증거가 한 끗 부족했다. 테렌스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더 이상의 증거를 모으기엔 시간이 없었다.

귀족회의에서는 공작의 작위 박탈이 안건으로 다뤄졌다. 보류 결정이 났다. 후계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황제는 수사에 기여한 공녀 에이바가 공작령을 임시로 통치하게 했다. 대신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 그녀의 보좌역 겸 감시인으로 두었다. 공작의 피가 섞인 한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각한 공작은 허울뿐인 작위만을 유지하며 저택에 근신했다.

참모진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나마 가장 충성스러웠던 참모 하나만큼은 저택의 집사 겸 전령이라는 명목으로 부릴 수 있었다.

공작저 앞뜰은 황실에서 파견한 병력이 삼엄하게 경비를 섰다.

그 광경을 창밖으로 내려다보던 공작은 눈을 희번덕이며 참모에게 지시했다.

“아으…! 그렇게나 철저히 했는데…! 마력석 공장 일은 어떻게 새어 나갔는지 알 수가 없어. 혹시 최근에 공장에 수상한 놈들이 없었는지 조사해 봐라.”

일주일 뒤 보고가 올라왔다.

최근 남부 억양을 쓰는 잡부 두 명이 취직했었다고. 손끝이 야무지고 성실해서 장인들의 신임을 받았으나, 두어 달 만에 그만두고 잠적해 버렸다고.

“그, 그 버러지 새끼들이!”

공작은 괴성을 지르며 집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부서진 가구 파편들과 여러 집기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펠런.

그자들이 확실했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공작은 문득 제게 얼마 남지 않은 사병들을 떠올렸다.

영지 내의 사병들은 모두 중앙군에 의해 해체됐지만, 그가 은밀히 지방에 파견해둔 일부 병력은 아직 그의 휘하에 놓여 있었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장기말이었다.

경비가 가장 느슨해지는 늦은 밤, 공작은 참모를 침실로 불러냈다.

“이 시간에 어인 일이십니까, 공작님.”

“…영지 밖에 남은 우리 애들, 몇 명이지?”

“글쎄요. 오십 정도일 겁니다.”

공작은 화색을 띠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정도면 돼. 후작령에 혹시 펠런의 아지트가 남아있는지 샅샅이 뒤져보라 해. 그놈들이 해체했다는 소문이 거짓일지도 모른다. 후작한테 안 들키게 은밀히 움직여야 한다.”

참모는 네, 라고 대답한 뒤 자리를 떴다.

“…남아있는 벌레들은 싹 다 박멸해 주지.”

공작은 제 손등에 선명한 잇자국을 보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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