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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21)화 (121/173)

121화  

루카스는 북부 공작령 한구석의 침엽수림 깊은 곳에 들어와 있었다.

두툼한 목도리에 귀마개, 장갑으로 중무장한 그는 걷는 내내 몇 번씩이나 뒤를 돌아봤다. 북부로 올라오는 동안 누군가에게 뒤를 밟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미행 따라붙은 것 같았는데…. 어떻게 잘 따돌린 것 같네.”

빽빽한 나무들 위에 흰 눈이 소복이 쌓였다. 밤새 몰아치던 눈보라가 그치니 그래도 걸을 만은 했다.

루카스는 나침반을 따라 새로 마련된 아지트에 다다랐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온 곳은 아주 낡아빠진 오두막이었다.

프레이저 후작령에 있는 아지트의 절반 크기조차 되지 않았다.

이곳에 머무는 단원은 스무 명 남짓.

들어오니 모두가 온몸을 누빔 옷으로 꽁꽁 싸매고 있었다. 다들 콧잔등이 빨갛게 익어서는, 작은 벽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루카스는 이들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가장 안쪽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두목 피어스가 두꺼운 담요를 덮은 채 웅크려 자고 있었다. 루카스는 그를 흔들어 깨운 뒤 눈앞에 종이봉투 하나를 펄럭펄럭 흔들어 보였다.

“두목, 공주님한테서 반가운 편지가 왔어요.”

“…어어, 그래.”

피어스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거구가 움직이자 침대를 받친 나무판자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발레리 걔가 워낙 글씨를 못 써서, 말하는 걸 제가 다 받아 적어 왔어요.”

“잘했다.”

서신을 받아든 피어스는 눈을 슥슥 비빈 뒤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P, 목표물의 위치는 정확히 파악됐어요. 약속된 날짜에 가지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사파이어는 여전히 24시간 동안 삼엄한 경비에 둘러싸여 있어요. 밖으로 옮겨지는 3월 말까지 그럴 거래요.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사파이어를 강제로 훔쳐서 가져갈 생각은 없어요. 지금으로서는 훔칠 방법도 없고요. 우리 단원들 전부가 침입해도 안 뚫릴 병력이에요. 마법사도 꽤 있어서 함부로 덤볐다간 끝장날 거예요….

그래도 아직 시간 남았어요. 사파이어를 정당하게 가져가고 싶다고 말할 기회가 곧 있을 것 같아요. 안 받아들여지더라도 계속 설득할 거예요. 저를 많이 믿어요. 거기에 기대고 있어요. —V」

루카스는 피어스의 어깨너머로 쪽지를 훔쳐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두목, 무슨 사파이어길래 그래요? 최상품 콘플라워 블루 사파이어라도 되나.”

“…몰라도 된다.”

“근데 발레리 말이에요. 황궁에 보석 훔치라고 잠입시키신 것 같은데, 그걸 훔칠 생각이 없다는 건 무슨 말이래요? 정당하게 가져온다는 건 또 뭐고요. 세상에 정당한 도둑질이 어디 있답니까?”

루카스가 꽤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냈다. 피어스는 답하지 않았다.

사파이어.

아마 황녀를 나타내는 암호일 것이다.

피어스는 서신을 고이 접어 털조끼 안쪽에 집어넣은 뒤, 치마폭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여전히 여자 행색을 하고 있었다.

“…발레리 얘는 왜 이렇게 머릿속이 꽃밭인지 모르겠다. 훔치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도 있을 텐데.”

피어스가 새빨갛게 칠해진 입술로 나직이 투덜거렸다.

“두목, 그러니까 왜 그 천하태평하고 물러터진 애를 황궁에 보내셨어요. 걔보다 실력은 좀 떨어져도, 저처럼 기민하고 현실 판단 잘하는 선수한테 맡기셨어야지.”

루카스가 느물대며 피어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또한 발레리를 어릴 적부터 지켜봐 온 사람이었다.

발레리는 도둑치고 태평한 성격이었다. 신체 능력과 기술은 발군이었으나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움직이는 타입은 아니었다.

제 실력을 믿으니 두려울 게 없었겠지만.

피어스는 루카스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무릎을 탁 쳤다.

무언가를 굳게 결심한 듯 턱 근육에 힘도 잔뜩 주었다.

“…가자, 루카스.”

“어딜요?”

“최후의 보루를 빌리러.”

***

피어스가 찾아간 곳은 공작령 서부, 에오스 해에 접해 있는 무역 중심지 마렌이었다.

그 한가운데는 제국 최고의 무역상이자 대상단주 스테판의 점포가 자리했다.

피어스는 스테판이 점포에 언제 출근하는지 알고 있었다. 스테판은 늘 같은 시간, 오후 4시쯤부터 움직였다.

스테판은 예상한 시간에 정확히 등장했다. 피어스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이오, 스테판.”

“…피어스? 진정 그대가 맞습니까?”

스테판은 피어스의 행색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악수를 받는 것조차 잊고서.

한때 덥수룩한 수염을 자랑처럼 달고 다니던 사내가, 지금은 웬 마녀 꼴을 하고 찾아왔으니 말이다.

이내 스테판은 그의 변장 사유를 납득했다. 악명 높은 현상범이니 강도 높은 위장을 하고 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여긴 펠런의 천적인 볼드윈 공작의 영지였다.

그는 피어스를 얼른 집무실로 맞아들였다.

피어스는 그 안에 들어서자마자 제 목적을 밝혔다.

“세이렌의 피리를 좀 빌릴 수 있겠소?”

세이렌의 피리는 스테판의 가문에 대대로 가보로 내려오는 물건이었다.

칼레바니아 서부를 껴안고 있는 대양, 에오스 해의 여신 세이렌이 그의 조상에게 선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피리는 신묘한 기능이 있었다.

연주를 듣는 사람은 물론, 심지어 동물들까지 깊은 잠에 빠지게 했다.

10여 년 전, 만성 불면증에 시달리는 볼드윈 공작은 스테판에게 세금 체납 혐의를 뒤집어씌워 이 피리를 강탈했었다.

아무리 돈을 준다 해도 가보랍시고 팔지를 않으니 방법이 없었다.

스테판은 도적단 펠런에 의뢰해 그 피리를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가보를 되찾아준 피어스를 은인이라고 생각했다.

“…저희 가문의 피리를요? 얼마나 오래 필요한 겁니까?”

스테판은 곤란한 듯 구레나룻을 긁적였다.

피어스를 못 믿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 잃었던 가보를 순순히 타인에게 넘기기엔 주저되었다.

“내년 봄까지만 좀 빌립시다. 내 잘 쓰고 돌려주겠소.”

“…피어스, 피리를 어디다 쓰려는 겁니까? 불면증이 생긴 거라면 약을 먹으면 될 텐데요.”

“내가 쓰려는 게 아니오. 우리 단원들의 생존이 걸려 있는 일이 있소. 무고한 이들의 피를 최대한 덜 흘리는 방식으로 하고 싶어서 그러오.”

피어스는 고개까지 숙이며 간절히 호소했다.

잇속에 빠른 스테판은 잠시 고민한 뒤 그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흠,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 상단의 의뢰를 좀 받아 주겠습니까?”

“…무슨 의뢰요?”

“공작의 뒤를 좀 캐줬으면 합니다.”

피어스는 흔쾌히 알았다고 했다.

추운 북부에 더 머무르는 건 꺼려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

그 시각 볼드윈 공작 또한 마렌에 있었다. 그는 참모진을 대동하고 여러 상가를 시찰하는 중이었다.

요즘 마력석 장신구 판매량이 다소 떨어졌다. 품질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직접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시장 곳곳을 누비던 공작은 이 지역의 대표 상단주인 스테판의 점포에 이르렀다.

그가 잠시 멈칫했다. 스테판의 집무실에서 누군가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여인이었다. 덩치가 눈에 띄게 컸다.

키는 무려 190센티미터에 가까웠다. 떡 벌어진 어깨는 철근처럼 단단해 보였다.

치렁치렁하고 긴 곱슬머리,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 코밑과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자국이 남아 있었다. 치마가 어색한지 어기적거리며 걷는 모습이 괴상했다.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수상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여인은 공작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른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밖에 서 있던 젊은 남자의 팔짱을 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공작님, 뭐 저런 여자가 있답니까. 여장남자인 것 같은데요….”

뒤에 있던 공작의 참모도 여인을 멀뚱히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공작은 얼른 여인의 행적을 눈으로 쫓았다.

불과 몇 초가 지났을 뿐인데, 여인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공작이 정체 모를 불쾌감에 휩싸인 건.

저택 집무실에 돌아와서도, 공작은 찝찝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마력석 밀수출과 관련된 참모의 보고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참, 공작님.”

보고를 마친 참모가 덧붙일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공작은 말해보란 듯 턱을 까딱였다.

“발레리 로빈슨이란 여자 말입니다. 프레이저 후작령의 자택에서 부모와 함께 살더랍니다. 금발에 녹안이라고 하는데, 공녀님 방 앞에서 봤던 그 병사랑은 다른 인물인 것 같습니다.”

발레리의 정체에 대한 보고가 이제야 들어왔다.

사실 공작이 그녀에 관해 알아보라고 참모진에 지시한 건 석 달 전쯤이었다.

그러나 한시가 바쁜 참모진에게 이 조사는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 있었다.

“…가짜 신분이란 얘기군.”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오늘따라 자꾸 그 쥐새끼들이 떠오르는구나. 수배를 피하려 여장하는 거, 가짜 신분으로 위장하는 거…. 전부 그 쥐새끼들 취미인데 말이지.”

쥐새끼들이란 공작이 도적단 펠런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었다.

수년 전 공작이 아편 사업에 손댔을 때 펠런 단원 하나가 신분을 숨기고 잡부로 취직했었다. 그 잡부는 공장 안의 현금을 모두 가로챈 뒤 아편을 모두 불태우고 잠적했다.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일도 있었다. 공작은 당시 깊은 숲속에서 은밀히 불법 독초를 재배했었다. 그러다 숲지기로 위장한 누군가가 그 밭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그 사람은 피어스라는 이름의 청년이었다. 그는 수년 후 펠런을 결성해 사사건건 공작이 하는 일에 훼방을 놓았다.

빠드득.

공작의 다물린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새었다.

“그림쟁이 하나 불러와. 내가 그 계집 생김새는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초상화를 의뢰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말씨는 분명 남부 억양이었다. 초상화가 완성되면 프레이저 후작령에 정탐꾼을 보내. 저잣거리에서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지 조사하라고 해라.”

“네, 알겠습니다.”

참모는 머리를 한 번 조아린 뒤 공작의 집무실을 떠났다.

“하하, 그런 계집을 황궁에 두다니 황제 놈도 치밀하지는 못하군. 어디서 굴러먹다 온 계집인지는 뒤져보면 나오겠지. 기분 나쁘게 낯이 익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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