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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20)화 (120/173)

120화  

황태자궁에서 돌아오는 이른 새벽.

발레리는 손을 호호 불며 채플 방으로 복귀했다.

밤새 텅 비어 있던 방 안에는 썰렁한 냉기가 감돌았다. 그녀는 침대맡의 기름등을 켜고 그 작은 불빛에 언 손을 쬐었다.

왼손 약지 위에서 테렌스가 끼워준 반지가 반짝거렸다.

“이게 테렌스한테 있을 줄이야…. 내 손에 끼운다고 했던 게 이거였구나.”

발레리는 반지 표면을 집게손가락으로 살살 어루만졌다.

손에 맞춘 것처럼 빈틈없이 꼭 맞았다.

정말 그 반지가 맞다. 건국기념관 초상화 속 엘로이스가 끼고 있던.

이걸 이런 방식으로 얻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죄책감이 들었다. 몰래 훔치는 것보다 더 부정한 방식으로 얻은 것 같은, 그런 찝찝한 기분이었다.

만약에 다른 반지였다면 부담스럽다고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이유는 순전히 이 반지가 필요해서였다.

발레리가 반지를 선뜻 받아주자 테렌스는 못내 감격했다.

얼핏 눈가가 붉어진 것도 같았다. 그는 발레리의 오른뺨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비벼왔다. 부드럽고 촉촉한 키스는 마차가 황태자궁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발레리는 그와 입 맞추는 내내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몸을 떨었다.

사지가 저릴 만큼 괴로웠다. 이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만 같아서.

“…떠나기 전에 꼭 돌려줄게요. 말하자면 빌린 것에 가까우니까.”

발레리는 손을 꼭 말아 쥐며 혼자 되뇌었다.

초대 황제 때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이 귀중한 반지를 가지고 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곳에서 보검을 훔쳐 가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벅찼다.

테렌스가 이 반지에 부여한 깊은 의미는 석 달쯤 뒤면 퇴색한다. 쓸모를 다 하면 당연히 돌려줘야 하는 물건이다.

상념에 빠진 사이, 아침 햇살이 점점 밝아졌다.

발레리는 탁상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조금 뒤면 출근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문득 반지를 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이씨, 이 미친 반지, 왜 안 빠져!”

아무리 손가락에서 빼내려고 애써도 반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잡아당기면 잡아당길수록 빠질 것 같은 건, 반지가 아니라 바로 애먼 약지였다.

괴이한 반지였다.

손가락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손가락과 하나가 된 것 같이 굴었다.

일단은 포기해야 했다.

발레리는 결국 양손에 장갑을 끼우고 출근했다.

석실에 들어가기 직전, 그녀는 철문 앞에 서 있던 켄드릭을 잠깐 복도 구석으로 불러냈다.

“야, 이것 좀 빼줘 봐.”

“뭐야, 발레리? 웬 반지를 끼고 있어?”

“…일단 좀 잡아당겨 볼래? 내가 해봤는데 죽어도 안 빠져.”

“네 힘으로도 안 빠지는 반지가 있어?”

발레리는 웬만한 장정만큼 악력이 강한 편이었다. 켄드릭은 의아해하면서도 그녀의 왼쪽 손목을 붙잡고 반지를 힘껏 잡아당겼다.

“으억! 그만! 아으, 손가락 빠지는 줄 알았네.”

켄드릭의 황소 같은 손힘으로도 역부족이었다.

“뭐지, 이상하다. 네 손가락에 꽉 끼어 보이지는 않는데…. 그럼 이거라도 써 볼래?”

그는 벨트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검날을 손질할 때 쓰는 기름이었다.

발레리는 병마개를 얼른 따서 약지 위에 골고루 뿌렸다. 설마 기름까지 발랐는데 안 빠지려고.

“…돌겠네.”

안타깝게도 반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발레리는 결국 손을 씻어낸 뒤 다시 양손에 장갑을 끼웠다.

어차피 검을 잡을 때는 장갑을 껴야 하니까.

그녀는 수업 내내, 그리고 쉬는 시간에도 장갑을 벗지 않았다.

애먼 사람이 옛 조상님의 반지를 끼우고 있는 게 황녀의 눈에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식사 또한 장갑을 낀 채로 했다.

프리다는 그런 발레리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발레리, 아까 아침부터 그러던데. 식사할 때 왜 장갑을 안 벗어요?”

“하하, 손이 너무 시려서요. 요즘 추위가 아주 매섭더라고요.”

석실 안은 전혀 춥지 않았다. 문지기 마법사들이 공기를 데워 놨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계절에 이만한 핑곗거리는 없었다.

***

수업이 끝난 뒤, 발레리는 밤이 깊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필요한 물건을 습득했으니 건국기념관에 가서 확인해야 했다.

과연 묘실로 통하는 문이 열릴지가 관건이었다.

겨울이라 어둠은 빨리 찾아왔다.

그녀는 얼른 작업복을 갖춰 입고 목적지로 향했다.

다시 찾아온 건국기념관의 엘로이스의 초상화 앞.

발레리는 그 앞에서 무슨 의식을 치르듯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액자 테두리를 만졌다.

“…어?”

—딸깍.

예전에 있던 그 손잡이가 드디어 다시 잡혔다. 아직 장갑 속의 반지를 겉으로 내보이지도 않았는데도.

“진짜 이 반지가 맞긴 맞는구나.”

발레리는 문을 최소한으로 열고, 발소리를 죽여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그녀는 황제들의 묘실에 아무도 없길 바랐다.

안타깝게도 묘실은 비어 있지 않았다.

전에 봤던 그 사제, 셀레스틴이 발레리를 담담히 맞이해 주었다. 사제는 여전히 묘실 한가운데 동상처럼 서서 석장 빛으로 묘실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반지, 가지고 오셨습니까?”

“네. 이 반지…. 맞죠?”

발레리는 왼쪽 장갑을 벗어내고 약지를 내보였다.

셀레스틴의 새카만 눈 안에 충격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정녕 이자가 반지의 주인, 그러니까 황태자의 반려라는 건가.

오늘도 어김없이 시꺼먼 도둑 행색으로 찾아온 이 여인이.

아직도 상식선에서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저 손가락에 끼워진 게 엘로이스의 반지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어떤 경로로 얻었든지 간에 상관없이.

“네, 아가씨. 그 반지가 맞습니다.”

“그럼 저 무기 상자 열어봐도 되는 거죠?”

“네.”

“저번처럼 손에 벼락 치시면 안 돼요. 엄청 아팠단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발레리는 셀레스틴의 석장을 흘끔거리며 상자 앞으로 다가섰다.

열 달 가까이 찾아 헤매던 물건이 지금 눈앞에 놓여 있다.

덮개를 열면, 아마 그 보검이 있겠지.

엘로이스의 묘실 제단에 놓여 있으니 그 황제가 남긴 유품이 맞을 거야.

발레리는 눈을 질끈 감고 덮개를 들어 올렸다.

심장이 벌떡대는 소리가 들린다.

‘왜 이렇게 떨리는 거야…. 어떻게 생긴지도 알고 있는데….’

철컥.

발레리는 눈을 떴다.

광택이 살짝 바랜 군청색 실크 위에, 정말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크기부터 모양까지 프리다가 쓰고 있는 검과 대부분 일치했다.

얇은 금사로 만든 덩굴식물이 촘촘히 휘감고 있는 검집. 그 한가운데 박힌 맑은 빛의 거대한 사파이어.

다만 보석의 크기는 프리다가 쓰는 검에 박힌 것보다 약간 컸다.

자루 머리 부분에 새겨진 눈꽃송이 문양은 분명 시에나 여신의 상징이었다. 의뢰인의 피의 맹세 증표에서 보았던 그 문양과 똑같았다.

발레리는 검을 전체적으로 훑었다.

색이 다소 칙칙했다. 700년 가까이 된 유물 치고는 상당히 잘 보존돼 있었지만, 막상 쓰기엔 너무 오래된 검처럼 보였다.

“유물은 유물이네. 날은 멀쩡하려나.”

발레리가 검의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잠깐만요, 아가씨.”

셀레스틴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왜요?”

“함부로 만지면 다치실 수 있습니다.”

“…음, 이미 만졌는데 어쩌죠?”

발레리의 손이 더 빨랐다. 이미 그녀의 손아귀에는 보검의 손잡이가 쥐어져 있었다.

“…아.”

셀레스틴은 당황해서 석장을 놓칠 뻔했다.

이상하다.

수 초가 지났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셀레스틴은 침을 꿀꺽 삼켰다. 경고가 무색하게도 정말 발레리는 멀쩡하게 검을 집어 들었다.

분명 황태자는 저 검을 쥐어보고는 곧바로 고통에 신음하며 내려놓았다. 장갑까지 끼고 있었는데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 이 여인은 검을 검집에서 뽑아들고 한참 동안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셀레스틴은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 여인이 보검의 주인은 아닌데….’

보검의 주인인 황녀가 검을 잡았을 때는 신이한 현상이 있었다.

검 전체에 이채로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녹슬기 직전의 오래된 검이 방금 대장간에서 식혀낸 새 검처럼 변모했었다. 마치 제 주인을 알아보듯이.

셀레스틴은 발레리의 움직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이 도둑 행색의 여인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보검을 구석구석을 만져보고 있었다. 보검이 가짜로 바꿔치기 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발레리는 보검의 날 부분을 손끝으로 쓸어보며 셀레스틴에게 물었다.

“사제님. 이 보검 항상 여기 있나요? 다른 데로 옮겨지지는 않죠?”

“네. 당분간은 여기에 보관될 겁니다.”

“당분간이라면, 얼마나요?”

“…내년 3월 말. 그때까지는 이곳에 있을 겁니다.”

3월 말이라.

발레리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일단은 여기 그냥 둬야겠다. 떠나기 직전에 가져가면 될 테니까.’

지금 슬쩍했다간 황궁 전체에 비상이 걸릴 것이다. 옆에 사제가 두 눈 부릅뜨고 있기도 하고.

‘위치 파악했다고 두목한테 보고해야겠다. 루카스 통해서 서신을 보내면 되겠지.’

검을 제자리에 두고 덮개를 다시 덮으려는데, 셀레스틴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 반지를 어떻게 구하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잠시 빌렸어요. 다시 돌려줄 거예요.”

발레리는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스스로가 참 뻔뻔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바른대로 고하겠는가. 이 반지를 사랑의 징표로 받았노라고. 그것도 이 나라의 황태자로부터.

셀레스틴은 가지런히 난 검은 눈썹을 꾹꾹 눌렀다. 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황후든 황태자든, 이런 여인에게 선뜻 반지를 빌려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여인이 반지를 훔쳤을 거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당장 기도를 올려 여신께 다시 한번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정녕 이 여인이 반지의 주인이냐고. 황녀의 ‘의미 있는 조력자’가 이 사람이 맞느냐고.

“근데요, 사제님.”

발레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또 걸어왔다.

“…네, 말씀하세요.”

“이거 반지요. 무슨 짓을 해도 안 빠지는데, 빼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요?”

셀레스틴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그 반지가 쓸모를 다하면 빼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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