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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19)화 (119/173)

119화  

종업원은 발레리를 8번 VIP룸 앞까지 안내했다.

그는 약간 불안한 눈길을 보낸 뒤 천천히 사라졌다.

이곳은 베스타 틸리스. 예상했던 것만큼 퇴폐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조명도 환했고, 곳곳에 놓인 가구와 조각품도 고풍스러웠다. 주점보다는 고급스러운 살롱 분위기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도 밀실이 있는 술집이라는 건 변하지 않지.

발레리는 한 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조금이나마 이성을 되찾기 위해서.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문에 귀를 슬쩍 댔다.

말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흑발이신 모습이 더 제 취향인 것 같네요. 멋져요.”

“…쓸데없는 말 말고. 본론부터 시작하지.”

일단 남자 목소리는 테렌스가 맞다.

후우, 흑발이라는 걸 보니 가발을 쓰고 변장해서 왔나 보다.

저 교태로운 목소리를 지닌 여자와 만나기 위해.

“하아, 처음부터 너무 딱딱하신 거 아녜요?”

뭐? 딱딱해?

발레리의 눈에 핏대가 불쑥 솟았다. 머릿속에 온갖 불순한 상상이 일어났다.

‘저 미친 여자가 지금, 뭐가 딱딱하다는 거야?’

이성의 끈은 바로 끊겼다.

콰쾅!

거센 발길질과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문고리 위에 있던 잠금장치는 발차기의 충격으로 인해 나무에서 떨어져 달랑거렸다.

밀실에 있던 두 남녀는 거의 경기를 일으키듯 발작하며 발레리 쪽을 쳐다봤다.

흑발의 테렌스와 털모자를 눌러쓴 여인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다 옷은 겉옷까지 갖춰 입었다. 둘 사이의 간격도 멀었고 접촉도 전혀 없었다. 가운데 테이블 위에 얼음과 위스키가 든 술잔 두 개만 놓여 있을 뿐.

하지만 발레리는 지금 눈앞에 뵈는 게 없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사랑한다며 이 개새끼야! 내가 사귈 땐 서로만 보자고 했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워서 뒤로는 공녀랑 결혼 준비하고, 이런 데서 몰래 여자나 쳐 만나고 있냐!”

앉아 있던 여자는 쩌렁쩌렁 울리는 괴성에 귀를 막았다.

테렌스의 얼굴은 핏기 없이 허옇게 질렸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레리의 팔목을 잡았다.

“바, 발레리, 일단 진정해.”

“놔!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제보는 무슨, 까고 있네. 그럼 흑발이 취향이니, 뭐가 딱딱하다느니 그딴 소리가 왜 들리는데?”

발레리는 테렌스의 손을 탁 쳐냈다.

그때 삐걱,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엄청난 소음을 듣고 놀라서 돌아온 종업원이었다.

“손님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무 문제없어요. 문 잠금장치는 내가 보상할 테니, 이만 나가 보세요.”

종업원을 다시 내보낸 건 여자의 목소리였다.

“푸하하하….”

이윽고 여자는 웃음을 빵 터뜨렸다. 그녀는 눌러쓰고 있던 털모자를 확 벗어 던졌다.

매생이처럼 고운 결의 갈색 생머리. 앳된 얼굴. 고동색 눈동자.

에이바 볼드윈 공녀였다.

“푸훕, 발레리, 나야 나. 내가 초장에 아부 좀 한 거 가지고 오해했나 보다. 진짜 그냥 제보만 하러 온 거 맞아.”

“…하아, 아름다운 비밀 요원이 공녀님이었어요?”

발레리가 맥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나니 온몸에 힘이 다 빠져 있었다.

“응, 나야. 근데 결혼이라니? 나 이분이랑 결혼할 생각 이제 없는데.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정말 공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발레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공녀의 표정을 살폈다.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근데 전하,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예요? 발레리 너는 이분 바람 현장 잡으러 온 거고? 아흑, 재밌어.”

에이바는 푹신한 소파를 주먹으로 팡팡 두드리며 한참을 까르르 웃었다.

테렌스는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두통이 지근지근 밀려왔다. 발레리가 지금 이 장소에 왜 출몰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름다운 비밀 요원을 언급하는 걸 보니, 쪽지를 읽은 것으로 짐작되긴 했다.

그는 발레리를 향해 손짓했다.

“발레리. 일단 이리 와서 앉아. 네가 못 들을 말은 아니니, 너 보는 앞에서 에이바와 대화하겠다.”

발레리는 뾰로통한 얼굴로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테렌스와 에이바는 진짜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로널드 업튼. 큰오빠가 운영하는 카지노 관리하는 인간이더라고요.”

“소공작이 카지노 사업을 하나?”

“네, 뭐 불법이지만…. 이것도 어쩌다 보니 까발리게 되네요. 아무튼, 밀수 자금은 전부 카지노로 흘러 들어가는 거로 확인됐어요. 야밤에 비밀 장부 뒤지느라 얼마나 쫄리던지.”

“고생했군. 이 정도면 연결고리는 제대로 파악된 것 같다.”

“증거품은 여기 있고요. 아버지 새 소식 전해드리자면, 어머니랑 이혼 절차 마치고 정부랑 재혼했어요. 내 이복 여동생은 라이호프 주 대공위 받는 크세니아 황자랑 곧 결혼하고요.”

발레리는 둘이 얘기하는 걸 가만히 들었다.

듣자 하니 공녀는 제 오라비와 아버지의 부정을 낱낱이 까발리고 있었다. 특히 크세니아와의 석연치 않은 연결고리를.

발레리는 공녀에게 가문의 비위를 고발하는 이유를 물었다. 공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간단해. 아버지와 오빠가 지은 죄에 합당한 벌을 받게 하고, 내가 그 자리에 앉으려고.”

본론이 끝났다.

이제 에이바의 질문 세례가 시작됐다.

“하핫, 발레리. 황태자와 병사 사이라면서, 나한테 거짓말 한 거였어?”

“…아 그땐 진짜 아무 사이 아니었어요.”

발레리는 머쓱한 얼굴로 쭈뼛거렸다.

“그랬구나. 나랑 전하랑 결혼 준비한다는 오해는 뭐야?”

“이 사람이 공녀님을 다과회에 직접 초청했다고 들어서요.”

발레리가 공녀의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 모든 건 오해였고, 분기탱천해서 깽판을 쳤다는 사실이.

테렌스는 발레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다과회는 공녀가 황성에 찾아와야 할 명분으로 이용한 거다. 본격적인 얘기를 하려면 따로 약속을 잡아야 하기도 했고.”

설명을 마친 그는 에이바에게 당부했다.

“공녀, 발레리와 내 사이는 좀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

“…여부가 있겠나요. 난 공작위 말고 관심 없어요. 순순히 못 본 거로 해 드리죠.”

용무를 마친 세 사람은 술집을 나섰다. 공녀는 담백한 작별 인사와 함께 털모자를 눌러쓰고 사라졌다.

몹시 춥고 어두운 새벽이었다.

테렌스는 발레리의 손을 잡아 이끌고 레이븐이 모는 마차에 올라탔다.

“…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내 책상에서 쪽지를 봤나?”

“네. 아름다운 비밀 요원님하고 밀회라도 하시는 줄 알았죠.”

발레리는 여전히 입이 삐죽 나와 있었다. 테렌스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샜다.

“에이바가 쪽지를 좀 이상하게 써 놓긴 했지.”

“네. 공녀님 잘못도 아예 없진 않다고 생각해요.”

“…오해가 생긴 과정은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개새끼라는 말은 생전 처음 듣는다. 내가 그렇게 원망스러웠나?”

발레리는 고개를 숙였다.

문득 서러움이 목구멍에 가득히 북받쳤다.

창피했다.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추한 질투심이 폭발해 버렸다. 이 남자를 향한 독점욕이 이 정도까지 부풀어 오를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걸 속속들이 들켜 버렸다. 이 남자에게, 그리고 제삼자에게.

밤에만 만나는 연인으로 지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주려 했는데.

어차피 헤어질 테니, 다른 누굴 만나든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부질없는 욕심이 몸집을 키웠다.

한 번도 받은 적 없는 종류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고 나니까. 몸정 맘정 다 깊어지고 나니까.

그냥 이 사람은 계속 내 남자였으면 좋겠다.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걸 뻔히 아는데도.

“으흑….”

발레리의 눈에서 눈물이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테렌스는 화들짝 놀라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발레리? 갑자기 왜 울지?”

“쪽팔려. 너무너무 쪽팔려. 그래도, 으흑…. 자꾸 의심이 가는 걸 어떡해….”

“의심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다과회, 흐흑. 황녀님이 당신 결혼 상대 물색하는 자리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걸 듣고 어떻게 안 가보냐고…. 거기서 공녀랑 둘이 아주 귓속말도 하고 쪽지도 주고받고. 어떻게 의심을 안 해….”

테렌스는 말을 잃었다.

발레리가 몰래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것보다 아니 대체, 날 무엇으로 보는 건가.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나를 못 믿는 건가.

서운한 가운데서도 그의 입가에는 깊은 보조개가 피어올랐다.

“발레리, 그 말은….”

“뭐요.”

“내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 게 싫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나?”

“겨, 결혼이야 뭐 다른 여자랑 하겠지만. 나 만날 때는 잠시 계획을 접어두라—”

“발레리.”

테렌스는 돌연 얼굴을 굳히며 말허리를 잘랐다.

“…네.”

“너 외에 다른 여자는 없어.”

그는 발레리의 이마와 콧등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아으, 진짜.”

발레리는 얼굴을 찡긋하며 고개를 저었다.

감당하기엔 너무 당도가 높은 말이었다.

그래도 애써 반박하지는 않았다.

이 남자는 언젠가 자신이 이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테니까.

“내가 같은 오해를 또 사기 싫어서 그러는데.”

테렌스가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왼손 좀 주겠나?”

발레리는 오른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왼손을 내밀었다.

약지에 무언가가 쑤욱 하고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면 징표가 되겠지.”

발레리는 벌게진 눈으로 왼손을 내려다봤다.

수수한 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다.

빛바랜 플래티넘 소재인 것 같은데.

보통 보석이 박혀 있어야 할 자리에, 뭔가 덮개 같은 게 씌워져 있었다.

반지의 생김새가 완전히 눈에 들어오는 순간.

발레리는 그대로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어깨를 당겨 안으며, 테렌스는 덧붙였다.

“내가 무슨 결혼을 한다는 거야. 사랑하는 여인이 버젓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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