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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16)화 (116/173)

116화

“생일 선물. 혹시 바라는 게 있을까?”

테렌스의 질문에, 발레리는 코를 훌쩍이다 말고 쓰게 웃었다.

선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이 이상으로 당신한테 뭘 바라겠어.

그녀는 아직 발긋한 테렌스의 뺨을 더듬더듬 어루만졌다.

“한 번 더 안아줄래요?”

“…기꺼이 그러겠는데. 그걸 선물이라고 할 순 없지 않나?”

아니, 선물 맞아.

당신과의 추억거리가 한 겹 더 쌓이는 거니까.

“테렌스.”

“…음?”

“빨리 줘요. 엄청 큰 선물.”

엄청 큰 선물? 그게 무슨 말이지.

테렌스는 그녀의 말을 즉각 이해하지 못했다.

발레리는 어물거리는 그의 입술에 다시 키스했다.

이제야 말귀를 알아먹은 테렌스는 그녀의 몸을 곧바로 덥히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자극이 상대방의 정염에 기름을 붓는지.

덮었던 이불은 그들의 밑에서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 아래 작은 침대는 바다 위 물결처럼 끝없이 너울졌다.

한참 뒤, 발레리는 진득한 쾌감에 지쳐 그의 곁에 잠들었다.

닫힌 커튼 틈새로 새벽빛이 비집고 들어왔다.

테렌스는 발레리의 뒷덜미 아래쪽을 조금씩 연하게 물들였다.

군복 재킷의 깃으로 딱 가려질 위치에 맞추어.

잔털이 곤두서는 묘한 자극에 그녀가 뒤척였다.

“…발레리, 난 마음먹었어.”

테렌스는 잠든 그녀의 약지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그가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언젠간 여기에, 반지를 끼울 거다.”

발레리의 감긴 눈 아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

“아흑, 나 한 명이라도 이길 수 있을까요? 다들 나보다 몸도 너무 크고 강해 보이는데….”

프리다가 검을 허리춤에 꽂아 넣으며 한탄하듯 말했다.

방금까지 프리다는 발레리와 함께 ‘문지기 기사 공략법’을 익히고 있던 참이었다.

발레리는 지난 몇 주간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밤낮으로 문지기 기사들에게 대련 신청을 했던 탓이었다.

그동안 석실 연무장에서 장장 72명의 기사와 한 차례씩 검을 맞댔다.

기사들은 발레리의 뜬금없는 대련 신청을 얼떨떨해하면서도 흔쾌히 받아주었다.

발레리는 72명 가운데 59명을 상대로 겨뤄 이겼다.

최근 켄드릭과 매일같이 대련해서 실전 감각을 끌어올린 게 주효했다. 물론 그에게는 또 졌지만.

프리다는 스승이 전투를 치르는 모습을 관찰하며 배울 점들을 수첩에 빼곡히 적어 넣었다.

발레리도 대련을 마치고 문지기별로 특이사항을 정리해 프리다에게 공략법을 가르쳤다.

곰처럼 완력 강한 기사. 표범처럼 민첩한 기사. 여우처럼 요령 있는 기사.

이들을 각각 어떻게 공략할지 함께 전략도 세웠다.

“…힘 자체는 기사들이 훨씬 세긴 하죠. 그래도 황녀님께서 못 이기실 정도는 아니에요. 빠른 발재간과 허를 찌르는 감각이 있으시잖아요.”

“응! 다 발레리한테 배운 거니까, 자신감 가지고 더 연습할게요.”

프리다는 한층 난도가 높아진 수련에 의욕 있게 따라와 주었다.

바뀐 수련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물리쳐야 할 대상이 어떤 검술을 구사할지 모른다. 최대한 여러 상대를 겪어보는 게 승률을 높이는 방법이었다.

그러다가도 지치는 날이 있었다.

바로 오늘처럼.

“아아, 다과회 가고 싶다.”

“다과회라뇨?”

“…모레 어머니께서 중앙궁 뒤 유리온실에서 다과회를 열거든요. 웬만한 귀족 영애들은 다 부르셨대요.”

아, 황녀님은 사교계 이벤트를 좋아하시지.

발레리는 프리다의 말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요란뻑적지근한 무도회를 한 번 겪고 나니 그 비슷한 자리에는 얼씬도 하기 싫었다.

“하하, 그거 참 재밌겠네요.”

그래도 여느 때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저번처럼 대리 참석을 해 달라며 등을 떠밀지 않는 게 어디인가.

“그나저나, 우리 오빠…. 결혼할 수 있을까요?”

프리다는 양팔을 축 늘어뜨렸다. 목소리에 걱정이 잔뜩 묻어있었다.

“…네? 결혼이요?”

“어머니께서 신붓감 고르라고 열어 주는 행사일 거예요. 근데 오빠가 과연 나설지 모르겠어요. 발레리도 알겠지만, 오빤 여자에 관심이 아예 없거든요.”

발레리는 코밑을 쓱 훔쳤다.

‘황녀님께선 오라버니를 잘 모르시는구나. 침대에서는 탐구심과 열정이 엄청나신 분인데.’

모르면 뭐 어떤가. 어차피 여동생이 알 필요도 없고, 알아서 좋을 것도 없는 정보였다.

그리고 언젠간 다른 여자분이 알게 되겠지.

일국의 황태자가 결혼을 안 할 순 없을 테니 말이다.

“그분이 결혼 못 할 이유가 있어요? 그분 좋다는 여자 쌔고 쌨잖아요.”

“막상 구혼장은 안 들어온대요. 남자 좋아한다는 소문이 꽤 오래 돌았거든요. 본인이 적극적으로 구혼장을 돌려도 모자랄 판인데, 그러긴 또 싫어하는 것 같고.”

“…아아.”

발레리는 말문이 닫혔다.

테렌스가 동성애자라는 소문. 그녀는 그 소문이 헛소문이라고 크게 외칠 수 있는 산증인이었다.

“그리고 뭐, 오빤 외모 말고 별다른 매력도 없잖아요. 그냥 미끈하게 잘생긴 걸어 다니는 돌덩어리예요. 무뚝뚝하고, 융통성 없고, 말주변 없고, 공감 능력 없고.”

프리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오라비의 흉을 봤다.

그 말을 잠자코 듣던 발레리의 이맛살이 꼼지락거렸다.

황녀가 무슨 말을 하든 늘 즐겁게 들을 수 있었지만, 이번 주제는 왜 이리 불편한지 모르겠다.

연인의 면모를 함부로 재단하니 속이 상했다. 아무리 그의 친동생이라 할지라도.

“아니에요.”

“응? 뭐가요?”

“남의 말 잘 들어주고, 은근히 세심한 구석도 있던데요. 달변은 아니어도 늘 거짓 없이 진심만 얘기하고요.”

발레리는 무심코 반박하는 투로 이야기했다.

프리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발레리.”

“네?”

“오빠랑 친해졌어요?”

아차.

발레리의 어깨가 경직됐다. 본인의 실수를 이제야 자각해서다.

테렌스의 여동생 앞에서 그의 변호인처럼 굴어 버렸다.

“아하하, 아니…. 그냥 대면 보고를 자주 하다 보니까, 생각보다 괜찮은 분인 것 같더라고요.”

“흠, 이상하다.”

“…네? 뭐가요?”

“난 발레리가 오빠 싫어하는 줄 알았거든요. 오빠가 찾아올 때마다 막 불편해했었잖아요.”

사실이긴 했다.

테렌스가 아침 수업을 참관하러 오던 시절, 발레리는 그의 행차를 알리는 문소리가 들릴 때마다 얼굴을 티 나게 구겼다.

프리다는 그걸 알면서도 넘겼다. 죄 없는 발레리를 체포해서 가둔 오라비의 업보라고 생각했다.

‘…네, 그땐 그랬었죠.’

발레리는 별로 멀지 않은 과거를 떠올리며 귀밑머리를 벅벅 긁었다.

“지금은 안 불편해요.”

“다행이다. 둘이 언제 화해한 거예요?”

석방된 이후 딱히 싸운 적은 없는데, 화해를 할 건덕지가 있나.

남아 있던 불편한 감정은 봄볕에 고드름 녹듯 서서히 녹아내리던걸.

“지내다 보니 원만해진 거죠, 뭐…. 근데요 황녀님.”

“응?”

“다과회는 모레 몇 시에 한대요?”

연인의 미래 신붓감을 물색하는 행사가 열린다는데.

호기심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

테렌스가 유리온실에 등장한 건 다과회가 시작된 지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황후 레베카는 화끈거리는 낯을 부채로 식히고 있었다.

한껏 치장하고 와서 하염없이 대기하는 귀족 아가씨들을 볼 낯이 없었다.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는 오늘 다른 일로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차가 다 식었는데, 다시 끓이라고 일러둘까요?”

“다과를 하도 먹었더니 이제 배가 부르네요.”

여인들은 테렌스의 부재에 은근히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트레이 위의 과자들이 동나도록 주인공이 나타나질 않고 있으니 말이다.

“내년도 예산안 처리 때문에 얘가 주말에도 안 쉬어서…. 금방 올 거예요.”

황후는 곤란한 표정으로 유리온실 입구 쪽을 흘겨보았다.

이제야 테렌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여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예를 표했다.

황후는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으며 아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테렌스, 이게 무슨 예의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내년 방위비 예산안 항목 중에 숫자가 안 맞는 게 있어서….”

“그건 내일 봐도 되잖아. 시간 내서 온 아가씨들을 이렇게까지 기다리게 하면 어떡하자는 거야.”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아들을 나무랐다.

테렌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적어도 마흔 명의 아가씨들이 그를 멀거니 응시하고 있었다.

“…늦어서 송구합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그는 모두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눈부신 백금발 미남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귀족 영애들은 굳은 표정을 풀고 환영의 미소를 머금었다.

테렌스는 잠시 눈을 날카롭게 세웠다.

수많은 여인 가운데 그가 직접 초청한 유일한 손님을 찾기 위해.

그의 시선은 에이바 볼드윈 공녀에게 멈추었다.

공녀는 테렌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가릴 데는 다 가린 수수한 베이지색 드레스 차림이었다.

테렌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그는 테이블을 돌며 몇몇 아가씨들과 가벼운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뒤, 마지막에는 에이바의 옆에 착석해 의자를 바짝 당겼다.

“답신이 없어서 안 올까 걱정했는데. 와 줘서 고맙군.”

“오라면 와야지 어쩌겠어요. 전하한테 미련 있는 것처럼 보일까 봐 좀 짜증 나긴 하지만.”

“그래서, 로널드 업튼이 누군지는 좀 알아봤나?”

“아유, 성격도 급하셔라. 여기서 말하긴 좀 부적절한 주제네요. 그 얘긴 약속 따로 잡고 만나서 하실까요?”

같은 시각 발레리는 중앙궁 뒤뜰의 풀덤불 속에 숨어 있었다.

다과회가 한창인 유리온실을 몰래 들여다보며.

그녀는 일요 채플 예배가 끝나자마자 이곳에 잠입해 있었다.

호기심을 눌러 보려다 실패한 결과였다. 제 연인의 신붓감이 누가 될지 심히 궁금했다.

그러나 테렌스는 약속 시각이 한참을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덕분에 발레리는 덤불 속에 엎드려 꼬박 30분을 잤다.

침을 닦으며 일어나 보니 테렌스가 와 있었다.

홀짝홀짝 차만 마시던 여인들은 그가 등장한 뒤부터 화색을 띠며 활발히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인들의 낯빛은 회색으로 바랬다.

테렌스가 단 한 명에게만 집중하기 시작하면서다.

에이바 볼드윈 공녀였다.

테렌스와 에이바. 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아 있었다. 귓속말도 수차례씩 주고받았다.

“뭐야? 왜 계속 공녀랑만 얘기하지.”

발레리는 둘의 대화 장면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 같기는 한데, 둘 다 표정은 무미건조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공녀가 테렌스의 재킷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더니 그 안으로 무언가를 불쑥 집어넣었다.

테렌스는 그 물건을 얼른 소매에서 꺼내 재킷 안쪽 주머니에 옮겨 넣었다.

발레리의 시선에 의문이 가득해졌다.

“볼드윈 공작 뒷조사하고 있다면서, 공작 딸이랑은 왜 저렇게 친하게 지내는 거야? 그리고 저 공녀, 황궁 떠난 지 좀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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