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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15)화 (115/173)

115화

“흐음, 두목이라 하면 보통은 범죄 조직 우두머리 아닌가요?”

레이븐이 지팡이를 품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

테렌스는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맨 위 서랍에서 서류를 하나 꺼내 유심히 살폈다.

루카스 메이필드. 제보자의 신상 조사서였다.

프레이저 후작령 출신의 평민. 부모님은 어릴 적 모두 돌아가셨다. 군 복무는 8년 전 동부 국경지대에서 이행했으며, 지금은 무직 상태.

이렇다 할 특이점이 없었다. 범죄 기록도 말끔했고.

“발레리의 아버지 밑에서 일했다고 듣긴 했다.”

“흠, 농장일 했던 사람치고는 피부도 하얗고 손도 곱던데. 말본새는 또 건달같이 불량했어요. 다짜고짜 형씨, 형씨 하는 게….”

레이븐의 추측을 흘려들으며, 테렌스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했다.

루카스가 만약 특정 조직의 일원이라면 공작의 밀수를 제보할 이유가 무엇일지.

“…볼드윈 공작과 척진 조직 같은 게 있을지 모르겠다.”

“공작 정적이 한둘은 아니잖아요. 혹시 황제파 귀족들이 운영하는 사조직일까요?”

“우리 쪽이라면 내가 아니라 아버지를 통해 공식적으로 보고가 올라왔을 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루카스는 공작령의 마력석 장신구 생산시설에서 일했다고 했었다.

만약 그가 특정 조직의 일원이라면, 위장 취업이었을 확률이 높다.

근무 중에는 무려 비덴티움까지 훔쳐 밀수 현장을 기록해 왔다.

단순히 ‘선량한 제보자’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큰 위험을 무릅쓴 감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까지 공작의 치부를 캐려고 하는, 그런 조직이 존재할까.

테렌스는 서랍을 다시 열었다.

그는 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레이븐에게 내밀었다. 루카스의 여관 주소가 적힌 쪽지였다.

“…사람 하나 붙여 둬.”

“네, 바로 보낼게요.”

***

“아예 패물함을 통째로 훔칠까? 반지를 초상화 앞에 하나씩 들이대다 보면 문이 열릴지도 몰라.”

발레리는 오랜만에 방 정리를 했다. 엘로이스 황제의 묘실에 들어갈 방법을 궁리하면서.

날씨가 건조해서 그런지 어제 빨아 널어둔 검은색 작업복이 한나절 만에 말라 있었다.

그녀는 침대 밑에서 작업 도구 상자를 꺼냈다. 작업복을 그 안에 넣어 두려고.

상자 덮개를 열자마자 그녀는 잊고 있던 무언가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몇 달 전 반딧불이를 넣어두었던 망사 주머니가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아 맞다. 얘네 방생하는 거 까먹었네.”

당연히 녀석들은 바싹 마른 사체가 되어 있었다.

“…그냥 버리긴 좀 그런데. 새들 먹이로 던져 줘야겠어.”

발레리는 새 먹이가 가득 담긴 주머니를 들고 채플 후원으로 나섰다.

그녀는 채플 분수대 옆에 쪼그려 앉았다.

날씨가 꽤 추운데도 참새들은 마른 잔디밭 위를 통통거리며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발레리는 손바닥 위에 반딧불이 사체를 가득 올려놓고 참새들 앞에 내밀었다.

“마음껏 들어. 요즘 겨울이라 먹을 것도 없을 텐데.”

참새들은 팔짝대며 다가와 그녀의 손바닥 위 먹이를 쪼아댔다. 발레리는 손바닥을 콕콕 가볍게 찌르는 감각을 느끼며 새들을 평화롭게 내려다봤다.

“뭐 하지?”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발레리는 반갑게 눈꼬리를 접으며 고개를 돌렸다.

테렌스였다. 그는 제복이 아닌 진회색 모직 재킷을 걸치고 있다. 이동할 때 눈에 띄지 않으려고 입은 듯했다.

“어, 여긴 웬일이세요? 참새 밥 주고 있었어요.”

“너 보러 왔다. 그런데 새 밥으로 뭘 주는 거지?”

“벌레 시체예요. 보시다시피.”

테렌스는 발레리의 손바닥 위를 관찰했다.

벌레들의 정체는 반딧불이 같았다.

그녀의 다른 쪽 손에는 망사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도 새들의 먹이가 가득했다.

“…반딧불이 잡는 취미가 있었나?”

“아, 네. 반짝반짝하니 예쁘잖아요. 잡은 지 좀 된 애들인데, 방생하는 걸 까먹어서 이렇게 처리하고 있었어요.”

“벌레 잡는 게 취미라니, 넌 역시 보통은 아닌 것 같다.”

“여름밤에 황궁 호수 안 가보셨어요? 여기 애들은 알이 굵어서 빛이 진짜 밝아요.”

“그랬나…. 내년 여름에 같이 가보면 되겠군.”

발레리는 테렌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내년 여름은 그녀에겐 너무 먼 미래였다.

‘…아마 그때쯤에 난 여기에 없을 텐데.’

겨울의 초입.

바람결이 거칠어진 가운데 햇살은 여전히 따사로웠다. 그 아래 테렌스의 눈동자는 참 깨끗하게 푸르렀다. 언젠간 내릴 첫눈이 녹으면 저런 색이 날까.

발레리는 얼른 그의 맑은 눈에 제 얼굴을 가득 비추고 싶었다.

그녀는 망사 주머니의 내용물을 잔디밭에 훌훌 쏟아냈다.

그리고 분수대에서 흐르는 물로 손을 벅벅 씻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실래요? 방 다 치우고 다시 부를게요.”

테렌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벤치에 앉았다.

발레리는 방으로 들어가 하던 청소를 마무리 지었다.

작업복이 든 도구 상자를 침대 밑에 고이 밀어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둘이 눕기엔 정말 좁은 침대였다.

둘 다 몸이 큰 편이기에 더 그랬다.

발레리는 테렌스의 왼팔을 베고 누워 낮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처음이었다. 테렌스와 이 비좁은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건.

“불편하죠? 넓은 데서 자다가 이런 데 누우니까.”

“아니. 너와 더 붙어 있을 수 있어서 좋은데.”

“…제가 밤에 가면 되는걸, 굳이 왜 찾아오고 그래요.”

“어젯밤에 네가 안 와서. 빨리 보고 싶었어.”

테렌스가 발레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가 품에 꽉 안겨들었다. 뜨끈한 맨살이 더 넓은 면적에 와 닿았다. 테렌스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감돌았다.

“미안해요. 어젠 정말 피곤해서 쉬고 싶었어요.”

“쉬는 거…, 나랑 같이 하면 안 되는 건가?”

그의 투정 같은 발언에 발레리는 쿡쿡 웃었다.

“뭐래. 우리 같이 있으면 안 쉬잖아요.”

“내가 참으면 돼. 난 그냥 안고만 있어도 좋아.”

“본인이 혼자 참는 것처럼 얘기하네. 저는 지금도 참고 있는데요?”

발레리가 그의 탐스러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모자랐나?”

“아뇨. 키스만 좀 더 해요.”

테렌스는 연인의 요청에 즉각 응답했다.

그는 발레리에게 폭신하고 부드러운 입맞춤을 선사했다.

그녀의 입술은 알알이 익은 포도송이처럼 미끈하고 말캉거렸다. 그 감촉을 음미하던 테렌스는 저도 모르게 틈새를 침범했다.

자극에는 반응이 따라오는 법이었다. 두 사람의 교류는 점점 격해졌다.

발레리는 어느새 테렌스의 가슴을 타고 올라 정신없이 입안을 파고들고 있었다.

테렌스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아 제동을 걸었다.

“…하아, 키스만 하자고 하지 않았나?”

“거봐요. 같이 있으니까 못 쉬겠죠?”

발레리는 그에게서 내려와 다시 왼팔을 베고 누웠다.

테렌스는 이 비좁은 침대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자연스레 왼팔을 베며 밀착해오는 느낌이 짜릿했다. 제 방 안에 이런 작은 침대를 따로 들이고 싶을 정도였다.

“발레리.”

“네.”

“생일 축하해. 많이 늦었지만.”

“…….”

발레리는 잠시 침묵했다. 놀란 듯한 반응이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말 안 했잖아요.”

“석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부분 내게 보고가 올라오니까.”

“…깜짝파티 했던 거 들었겠네요. 서운했겠다. 내가 말 안 해서.”

발레리의 말끝이 가늘게 떨렸다.

미안한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테렌스는 그냥 픽 웃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나? 내 생일은 챙겨 놓고, 네 생일은 왜 아무 말 없이 넘어갔는지.”

“…별로 안 중요하니까 그랬죠.”

“무슨 말이 그렇지? 네 생일이 안 중요할 리가 없는데.”

“저는 제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 몰라요. 두, 아니 아버지가 거리에서 주워 온 날을 생일로 치는 거예요.”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팔베개 위의 연인을, 테렌스는 품 안에 깊이 끌어당겨 안았다.

발레리는 지그시 눈을 감고 그의 체향을 맡았다.

오늘도 몇 번을 안았던 몸에선 부드럽고 다정한 냄새가 났다.

문득 슬픈 예감이 들었다. 지금 이 향기. 품 안의 온도. 맞닿은 살갗의 촉감. 나중엔 이 모든 게 너무 그리워질 것 같았다.

“…발레리.”

“네.”

“생일을 모른다고, 네 탄생의 의미가 퇴색하진 않아.”

“…뭐, 그런가요.”

발레리의 이마에 테렌스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닿았다.

그녀는 탄성에 가까운 날숨을 뱉었다. 콧날이 시큰거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당신한테 이런 말을 들어도 되는 건가.

물밀듯이 밀려드는 죄책감에 눈꺼풀이 파르르 진동했다.

‘생일을 왜 말 안 했나고요? 곧 당신에게는 의미 없어질 날이니까요.’

발레리는 테렌스의 두툼한 등을 고이 쓰다듬었다.

내가 죽지만 않는다면, 생일은 내년에도 오고 후년에도 오겠지.

그때 이 사람은 내 곁에 없겠지만.

“발레리, 난 그저 네가 내 눈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

“고마워. 내가 모르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을 텐데, 그걸 다 헤치고 내 앞에 등장해 줘서.”

테렌스는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입술을 비볐다.

발레리는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곳에 뜨거운 온정이 스미는 듯했다.

한때는 이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이 남자를 아무 데나 쿡 찔러 보면, 손끝이 얼얼할 정도로 시린 느낌이 아닐까 하고.

말도 안 되는 선입관이었다.

어디에 닿아도 따뜻하기만 한 사람이다.

요즘처럼 쌀쌀한 밤, 홀로 침대에 몸을 누일 때마다 그녀는 상상했다. 연인의 커다랗고 포근한 몸이 저를 이불처럼 덮어주면 좋겠다고.

가끔은 이틀의 간격을 참지 못하고 새벽에 나가 그를 품었던 이유였다.

테렌스의 숨소리가 한층 가까워졌다. 입술 점막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언젠가…, 네 아버지라는 분을 꼭 만나보고 싶어.”

“…굳이 왜요?”

“그냥. 좋은 분일 것 같아. 너처럼.”

발레리는 피어스의 사람 좋은 미소를 떠올렸다.

‘나한테만큼은 좋은 사람이에요. 아마 두목이 거둬 주지 않았다면, 난 지금쯤 뒷골목에서 몸을 팔고 있었을 거예요. 거리에서 자란 여자아이들의 가장 흔한 결말이니까….’

하지만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피어스를 테렌스와 대면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피어스는 칼레바니아 전역에서 제일 유명한 현상수배범 중 하나였고, 지금 그녀가 황궁에서 수행할 임무를 준 장본인이었다.

‘그 임무만 아니었다면 이런 죄책감도 없었을 거야. 대신 당신을 만날 수조차 없었겠지.’

순간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발레리는 눈물을 참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런 와중에 테렌스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생일 선물. 혹시 바라는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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