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셀레스틴은 로브에 달린 후드를 고쳐 쓰고 숨을 죽였다.
아마 예를 표해야 하겠지. 황태자의 반려가 될 자라면 틀림없이 귀족가의 영애일 터이니.
그녀는 긴장된 낯빛으로 계단 쪽을 응시했다.
이제 곧 반지의 주인이 계단 밑으로 내려와야 할 텐데….
아무런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몇 초를 더 기다려 봤지만 아직도 기척이 없었다. 셀레스틴은 고개를 갸웃했다.
문을 열어 놓고, 왜 안 들어오고 있을까.
직접 올라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셀레스틴이 계단 위에 한 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
계단을 슬금슬금 내려오던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꺄아아악!”
그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행색이 특이했다. 온몸에 딱 붙는 시커먼 옷차림에, 눈 부근만 뚫린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키가 매우 크고, 몸매는 상당한 근육질이었다. 성별이 잘 분간되지 않았지만, 앙칼진 비명을 들어서는 여인 같았다.
누구지.
셀레스틴은 정체불명의 여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여인은 계단 한가운데 주저앉아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오금에 힘이 풀린 것 같았다.
“으어어억! 오지 마! 오지 마!”
여인이 셀레스틴을 향해 훠이훠이 두 손을 내저었다.
셀레스틴은 어이가 없었다.
이상한 반응이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거기에다 좀도둑 같은 복장은 대체 무엇인지.
셀레스틴의 속에서 갖가지 의문이 올라왔다. 그러나 일단 예를 표하긴 해야 했다.
여신께서는 이 자가 반지의 주인이라고 했으니.
“처음 뵙습니다, 아가씨. 사제 셀레스틴 인사드립니다.”
셀레스틴은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어…? 유령…, 아니었어요?”
그 결과는 유령 취급이었다.
셀레스틴은 후드를 벗어 여인에게 얼굴을 보였다.
일단 유령이라는 오해는 해소해야 했다.
“…어?”
“아가씨, 방금 말씀드렸듯 저는 시에나 여신을 모시는 사제 셀레스틴입니다. 유령이 아닙니다.”
셀레스틴은 꽉 쥔 석장 끝에 성력을 더 불어넣었다. 그 끝에서 한층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
여인은 두 눈을 끔뻑거리며 셀레스틴을 쳐다보고 있었다. 복면 너머로 눈동자가 훤히 보였다. 입고 있는 옷만큼이나 새카만 색상이었다.
어리둥절한 걸 보니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듯했다.
“혹시 여기서 찾는 물건이 있으신지요.”
셀레스틴은 최대한 예를 갖추어 물었다.
“네, 네?”
귀가 어두우신 분인가. 셀레스틴은 목을 한 번 가다듬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찾는 물건이 있어서 오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 아가씨.”
“…저, 절 아세요?”
“줄곧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여인은 벽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셀레스틴은 그 행색을 다시금 훑었다. 허리에는 장검과 단검을 하나씩 찼다. 가죽 벨트에는 갖가지 금속 장비들이 너덧 개 꽂혔다.
귀족 영애는 무슨.
영락없이 도적이었다. 그것도 꽤 중무장한.
정녕 이자가 반지의 주인인 것인가.
셀레스틴은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
발레리는 벽을 짚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세 번 골랐다.
유령인 줄 알고 혼비백산할 뻔했는데. 얼굴을 보니 아까 낮에 본 그 검은 머리 여자 사제였다.
그런데 자꾸 이상한 말을 한다.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찾고 있는 물건이 있느냐면서.
태도는 왜 이렇게 공손한 걸까. 자꾸 아가씨, 아가씨 하는데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나 지금 옷도 그렇고 되게 수상해 보일 텐데, 왜 이렇게 협조적이지? 궁금한 거 물어봐도 되는 건가?’
발레리는 제 뺨을 툭툭 치며 이성을 되찾으려 애썼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댔으니까.
‘날 해치려는 건 아닐 거야. 해치려 했다면 이미 저 석장으로 나한테 번개라도 내리쳤겠지.’
발레리는 결심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의연하고 당당하게 굴어 보자고.
“그, 어, 찾는 물건이 있기는 한데요. 근데 여기 묘실 맞죠?”
“네. 엘로이스 황제와 버나드 황제, 루벤 황제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루카스가 말한 대로, 이곳에는 건국 초기 황제 셋이 묻혀 있었다. 세 명밖에 없다는 걸 보니 아마 반려자들은 따로 매장된 듯했다.
“아하하, 그렇구나. 잠깐 둘러만 봐도 될까요?”
“…그러시죠.”
발레리는 셀레스틴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계단을 내려왔다.
널찍한 묘실에는 세 개의 제단이 있었다. 그 뒤에 유골함으로 보이는 화려한 상자 셋이 봉안돼 있었다.
아마 제일 화려한 가운데 것이 엘로이스의 것이겠지.
그곳의 제단에는 눈부신 황금 상자 하나가 올라가 있었다.
석장의 빛이 그 상자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마치 뒤에서 후광이 나오는 것 같았다.
발레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저, 저거 무기 상자잖아. 그치? 맞지?’
그녀는 장갑 낀 손으로 두 눈을 벅벅 비볐다.
루카스, 네 말이 맞았어.
무덤이 답이었나 봐.
왜 진작에 이 생각을 못했을까.
발레리는 상자 앞에 다가가 손을 서서히 뻗었다.
수전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손끝이 후들후들 떨렸다.
—파직.
“앗 따가워!”
발레리의 손 위로 가느다란 번개 한 줄기가 내리꽂혔다.
셀레스틴의 석장에서 나온 것이었다.
“흐으, 아파…. 사제님, 둘러봐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왜 갑자기 그러세요?”
“반지를 가지고 계십니까?”
“반지요? 무슨 반지요?”
발레리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사제를 쳐다봤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셀레스틴이 고개를 흔들며 발레리의 앞을 막아섰다.
“저기, 사제님. 제가 이게 진짜 필요해서 그래요. 한 번만 열어보면 안 될까요?”
“반지를 가지고 오시면, 그때 열어드리겠습니다.”
“대체 무슨 반지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발레리는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말을 할 거면 좀 알아듣게 해야지. 다짜고짜 반지라고 하면 그게 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셀레스틴은 대답 없이 석장을 위협적으로 치켜들었다.
또다시 번개를 내리칠 기세였다.
발레리는 질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아직도 벼락을 맞은 양손에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으억, 알겠어요! 알겠어요! 안 만질게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지요, 아가씨. 반지를 가지고 오시기 전에는 문을 열어드리지 않겠습니다.”
—팟.
눈부신 섬광이 발레리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두 팔로 눈을 가려 봤지만 허사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발레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떠보니 엘로이스의 초상화 앞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액자 뒤에선 더 이상 빛이 나지 않았다.
발레리는 메고 있던 자루에서 야광석을 꺼내 주위를 밝혔다.
그리고 액자의 오른쪽 테두리를 다시 쓸어보았다.
이상하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다.
“뭐야, 아까 그 손잡이 어딨어.”
발레리는 손에 힘을 주어 액자를 벽에서 살짝 떼어 보았다.
그 뒤엔 차가운 벽뿐이었다.
묘실로 통하던 문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하아,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발레리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엘로이스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 저한테 왜 이러세요. 그 보검 좀 순순히 넘겨주시면 안 돼요?’
엘로이스의 근엄한 미소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응, 안 돼.’
“휴우…. 세상에 반지가 얼마나 많은데 반지를 가지고 오래.”
발레리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띄는 무언가가 있었다.
초상화 속 엘로이스의 네 번째 손가락. 거기에 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별 장식 없이 단순한 반지였다. 보석이 박혀있어야 할 자리에 금속 덮개 같은 게 씌워져 있었다.
“흠, 이젠 황제의 패물함을 뒤져야 하는 건가.”
또 그 중앙궁 침실에 잠입해야 한다니. 일복 하나는 타고난 도적이었다.
***
테렌스와 레이븐은 집무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한쪽 벽면을 바라보았다.
레이븐은 비덴티움 목걸이를 들고, 지팡이 끝을 대 그 안에 빛을 쏘았다.
집무실의 크림색 벽지 위에, 곧바로 기록된 영상이 재생되었다.
루카스의 증언에는 틀린 게 하나 없었다.
영상은 볼드윈 공작령의 마력석 장신구 생산시설 앞에서 시작했다.
깊은 새벽. 복면을 쓴 괴한들이 나타나 마력석 가루 상자를 마차에 실었다.
마차가 출발했다. 루카스는 말을 타고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그 뒤를 밟았다.
우거진 풀숲과 굽이치는 개울가를 지나, 그 마차는 정말로 사피로스 강 부두로 향하고 있었다.
“와, 현장을 빼도 박도 못하게 잡았네요.”
“그러게 말이다.”
“제보자가 참 대단해요. 미행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요. 정탐꾼으로 영입해도 되겠어요.”
마력석 가루를 담은 상자가 배에 실리는 장면까지 나왔다.
배가 부두를 떠나는 것까지 지켜본 루카스는 다시 말을 타고 어딘가로 향했다.
이번에는 어딜 가는 거지.
테렌스와 레이븐은 그의 행적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루카스는 말에서 내렸다. 아까 지나쳤던 개울가 근처였다.
멀찍이 한 여인이 보였다. 파이프 담배를 물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각도상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루카스는 그 여인을 향해 말을 걸었다.
—어, 두목? 거기서 뭐 하세요?
여인은 루카스를 발견하자마자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신경질을 냈다.
—야 이놈아, 목걸이 빨리 안 벗어? 그걸 여태껏 걸고 있으….
비덴티움 목걸이는 곧바로 빛을 잃었다.
여기서 기록이 끝난 듯했다.
테렌스와 레이븐은 서로를 쳐다봤다.
“전하, 방금 두목이라고 한 거 맞죠?”
“…그런 것 같다.”
비덴티움에는 몇 가지 맹점이 있었다.
한 번 기록된 영상은 편집할 수 없다.
그리고 마법사가 아닌 한, 그 기록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기록 맨 마지막에 등장한 ‘두목’이라는 정체불명의 여인은 인상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신기하네요. 여자 행색인데, 목소리는 50대 중년 아저씨였어요.”
“레이븐, 아까 그 부분에서 멈춰 봐.”
테렌스가 굳은 얼굴로 명령했다.
레이븐은 지팡이를 고쳐 잡고 비덴티움 속에 다시 빛을 쏘았다.
마력으로 빛의 세기를 한참 조절한 끝에 기록의 마지막 부분이 재생됐다.
—야 이놈아, 목걸이 빨리 안 벗어? 그걸 여태껏 걸고 있으….
생김새는 보이지 않았다.
깊은 새벽이라 주변이 어두웠다. 당사자가 곧바로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확인할 수 있는 건 대략적인 몸매와 차림새뿐이었다.
일단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길었다. 허리에는 붉은 치마를 둘렀다. 어깨는 떡 벌어졌고 목에서는 걸걸한 쇳소리가 났다.
“전하, 아무리 봐도 여장 남자인데요. 담배 피울 때 쪼그려 앉은 자세가 저희 외삼촌이랑 똑같습니다.”
“두목이라….”
테렌스는 턱끝을 매만지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