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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13)화 (113/173)

113화


셀레스틴은 황후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오른손 약지에 알 굵은 에메랄드 반지 하나, 그 위에 얇은 실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엘로이스의 초상화 속에 있던 그 수수한 반지는 없었다.

반지가 곧 다음 주인에게 넘겨진다고 했었는데.

황후가 끼고 있지 않다면, 황태자에게 넘긴 것일까.

그런데 그는 연애조차 시작하지 않았다니.

“아읏….”

상념에 잠겨 있던 셀레스틴이 별안간 한쪽 머리를 짚고 신음했다.

“사제님? 왜 그러시죠? 어디 편찮으세요?”

놀라서 벌떡 일어난 황후의 목소리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개골을 둘로 쪼개고 그 안을 날붙이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덮쳐왔다.

시에나 여신과의 대화 내용을 허락 없이 누설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직접적인 언급은 물론이고, 관련 암시를 하는 것조차 여신은 허용하는 법이 없었다.

셀레스틴은 머리를 양손으로 꽉 부여잡은 채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화, 황태자 전하께 전해주십시오. 마음먹은 일이 있다면, 서두르는 게 좋겠다고요.”

그녀는 이 말만 남긴 채 황급히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황후는 창가에 턱을 괴고 셀레스틴의 떠나는 뒷모습을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마음먹은 일이라…. 테렌스에게 물어보면,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지 얘기해 주기는 할까….”

속을 알 수 없는 건 저 사제뿐만이 아니었다.

아들이야말로 제 마음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곧 올해의 마지막 달이 다가온다. 중앙궁 앞 정원의 나무들도 하나둘씩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황후는 따뜻한 찻물을 연거푸 들이켜며 헛헛한 속을 달랬다.

“이제 프리다가 아니라, 테렌스의 결혼이 만인의 걱정거리가 될지도 모르겠네.”

***

“이 예쁜 건물에 사람이 묻혀 있었다니. 겉보기엔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발레리는 혼자 중얼거리며 작은 건물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그녀가 방금 입성한 곳은 칼레바니아 건국기념관이었다.

마침 근무가 없는 토요일이니, 날 밝을 때 이곳을 좀 더 자세히 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여름 이곳에 찾아왔을 때는 나름대로 샅샅이 뒤졌다고 생각했다.

벽에는 그림뿐이었고 창고에도 그림과 조각상, 미술품 관리에 쓰이는 잡다한 도구들뿐이었다.

‘어쩌면 내가 발견 못 한 입구 같은 게 있을지도 몰라.’

기념관 안에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발레리는 마음을 놓고 두리번거리며 바닥과 벽, 천장을 샅샅이 살폈다.

“…낮에는 괜찮은데, 밤에는 무서워서 못 오겠단 말이지.”

그녀는 엘로이스의 초상화 앞에 정면으로 마주 섰다.

“와, 그땐 밤에 봐서 잘 몰랐는데 황녀님이랑 진짜 똑같이 생기셨네.”

굵게 물결치는 긴 백금발과 짙푸른 사파이어색 눈동자. 희고 매끈매끈한 피부와 생기 넘치는 붉은 뺨.

다른 점이 있다면, 프리다보다 좀 더 강인하고 굳센 인상이었다. 도전적인 눈빛도 그렇고, 몸집도 좀 더 커 보였다.

아마 대단한 의지를 가진 검사였겠지. 나라를 건국할 정도의 기백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 옆 벽면에는 2대 황제 버나드와 3대 황제 루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각각 엘로이스의 장남과 맏손자였다.

“금발에 파란 눈은 이 나라 황족 종특인가 보네.”

몇 달 전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에 잡힌 건 초대 볼드윈 공작의 초상화였다.

깊숙이 들어간 퀭한 눈과 불거진 광대뼈. 지금의 볼드윈 공작과 다를 게 없었다.

“뭐야. 볼드윈 공작도 제 조상이랑 똑같이 생겼잖아. 어휴, 재수 없어.”

잊고 있던 찝찝함이 발레리의 이마에 깊은 구김살을 만들었다.

무도회 때 그에게 정체를 들킨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했다.

공녀의 방문 앞에서 잠시 마주친 것만으로 그녀를 알아본, 무서운 눈썰미의 소유자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있었다. 공작은 10여 년 전 공작저에서의 악연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직 별말 안 나오는 걸 보면 내 존재를 잊어버린 게 아닐까. 그래, 뭐 내가 중요한 사람도 아니고 금방 까먹었겠지.’

“누구시죠?”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발레리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흰 사제복을 입은 중년 여인이 그녀를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셀레스틴은 발레리가 들어올 때부터 그녀를 주시하던 차였다.

웬 병사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건물 내부를 샅샅이 살피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 수상했다.

“아하하, 저기, 그게….”

곱상하고 말끔하게 생긴 젊은 병사였다. 크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황궁 근위병입니까?”

“아아, 네. 황궁 채플 근위병 발레리 로빈슨입니다.”

발레리?

보통은 여자에게 붙는 이름이었다.

셀레스틴은 발레리의 얼굴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목소리도 보통 남자들보단 음역이 높은 것 같지만…. 황궁 근위병이 여자일 리는 없겠지.’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발레리의 얼굴을 계속 훑었다. 발레리는 민망해하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아하하,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었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발레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이 사제라면 이 건물의 구조를 더 잘 알지 않을까.

“저기, 사제님. 여기 창고 말고 다른 방이 있을까요?”

“묘실을 찾습니까?”

“묘실이…. 있어요?”

발레리는 처음 듣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진짜로 있긴 있나 보네. 아, 근데 왜 또 무서워지지.’

그녀는 마른침을 목 뒤로 넘기며 사제의 답변을 조용히 기다렸다.

“네, 있습니다. 나도 그대에게 하나 묻겠습니다.”

“네? 저한테요?”

“남자입니까?”

“아뇨, 여잔데요. 하하.”

여자라고?

셀레스틴은 혼란스러운 듯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칼레바니아가 언제부터 여성의 군 입대를 허용했는지. 그것부터 생각해야 했다.

문득 셀레스틴은 지난봄에 있었던 사건 하나를 떠올렸다.

남자로 신분을 속이고 입대한 여성이 황태자에게 발각돼 체포되는 일이 있었다. 처벌을 받지 않고 끝났다고 듣긴 했었다.

그런데 그 여성이, 아직도 군에 복무하고 있다는 건가.

셀레스틴은 발레리의 얼굴을 다시금 자세히 관찰했다.

“혹시 그….”

“아, 네. 맞아요.”

발레리는 무안해서 고개를 움츠렸다. 아마 그 사건을 언급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렇게 또 불편한 유명세를 치렀다.

기분도 이상했다. 이 낯선 사제와 눈을 맞추면 맞출수록 심장이 옥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묘실이 있는 걸 알았으니 아무도 없을 때 와보면 되겠지.

“그, 그럼 안녕히 계세요.”

발레리는 건국기념관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

발레리는 그날 밤 테렌스에게 찾아가지 않았다.

대신 작업복 차림으로 건국기념관 앞에 와 있었다.

묘실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밤에 다시 뒤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러려고 들어온 황궁이었다. 황실의 보검의 위치를 하루빨리 파악하고 싶었다.

그녀는 입구 옆의 기둥을 짚고 수차례 심호흡했다. 그러나 방망이질 치는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담력 시험. 그래 담력 시험하러 온 거라고 생각하면 돼. 유령 뭐 별거야? 내가 다 이겨.”

결국 발레리는 발딱대는 심장을 안고 자물쇠를 딴 뒤 건물 내부로 들어왔다.

이상하다.

자루에서 야광석을 꺼내지도 않았건만, 어디선가 빛이 들어와 바닥을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발레리는 빛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찾아 천천히 이동했다.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엘로이스 황제의 초상화 앞이었다.

그 둘레를 따라 묘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야. 저 액자 테두리에서 왜 빛이 나오지?”

발레리는 액자 테두리를 손끝으로 쭉 쓸어보았다.

맨 오른쪽 가운데 높이에서 무언가가 손에 걸렸다.

—딸깍.

손잡이였다.

셀레스틴은 묘실 한가운데 우뚝 섰다.

손에 제 키만 한 석장을 들고서.

석장 끝에서 나오는 빛은 작열하는 태양처럼 묘실 전체를 환히 밝혔다.

셀레스틴의 사막처럼 건조한 시선 끝에는 순도 높은 황금으로 세공된 상자가 자리했다.

작은 항아리 모양의 화려한 상자.

엘로이스 황제의 유골함이었다.

황제의 죽음을 기리는 제단 위에는 유골함만큼이나 번쩍거리는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셀레스틴의 석장이 담길 정도로 기다랗고 큰 무기 상자였다.

지난해 여신 축일, 저 상자는 잠시 지상으로 옮겨졌었다.

무기의 주인을 가려내는 작업을 위하여.

“…보검을 들어 황녀를 구원할 자가 오라비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을 줄이야.”

제국 최고의 신력을 보유한 셀레스틴조차 신의 뜻은 감히 헤아리지 못했다.

시에나는 보검의 계승자가 누구인지 지목하지 않았다. 그저 황실에 보검을 들 자가 이미 태어났다고만 했을 뿐.

셀레스틴은 여신의 허락을 얻어 그 말을 신탁으로 전했다.

당연히 그녀를 포함한 모두가 황태자 테렌스가 보검의 주인이 되어 여동생을 구할 것이라 기대했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려던 테렌스는 한쪽 손을 영영 못 쓰게 되었다.

2대 황제 버나드와 3대 황제 루벤처럼.

마왕의 목을 쳤다는 엘로이스의 보검은 건국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엘로이스의 장남 버나드와 맏손자 루벤도 보검을 계승해 제 권위를 높이려 했다.

그러나 무참히 실패하고 영구적인 상처를 떠안았다.

이후에도 몇몇 황제들이 보검의 손잡이를 쥐어 보았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일부 황제들은 보검 계승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보검에 저주가 걸려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곳 묘실은 여러모로 비극이 많았던 장소였다.

셀레스틴은 입구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반지의 주인은 무슨 이유로 이곳을 찾는 걸까.”

여신은 이곳 묘실에서 반지의 주인을 기다리라 했었다. 그 주인이 황녀의 의미 있는 조력자가 될 거라며.

문득 셀레스틴에게 궁금증이 일었다.

황태자의 반려될 자가 굳이 이곳을 찾을 이유가 무엇인지.

마침 이곳 묘실은 여신의 보호 아래 놓인 성소였다.

따라서 신전에서처럼 여신에게 직접 기도를 올리며 소통할 수 있었다.

“기도 올리겠나이다.”

셀레스틴은 두 눈을 감고 성호를 그었다. 어김없이 머리 위에 광륜이 떠올랐다.

“시에나 님. 반지의 주인이 굳이 이곳을 찾는 연유는 무엇인지요.”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셀레스틴은 무응답을 예상했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여신은 얄궂게도 언제나 선택적으로 답변했다.

답을 주는 경우 보다 그러지 않는 때가 훨씬 많았다.

셀레스틴은 여신이 가끔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녀는 반쯤 포기한 얼굴로 석장을 고쳐 쥐었다.

그제야 음성이 들려왔다.

[찾는 물건이 있을 것이다. 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아직은 때가 아니라 일러라.]

물건?

무슨 물건을 찾는다는 것인지.

셀레스틴의 까만 눈동자에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딸깍.

그녀가 다른 질문을 올리려는 찰나, 묘실 입구에서 소리가 들렸다.

반지의 주인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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