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셀레스틴.
제국 최고위 사제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자 대신관 다음 서열.
신전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긴 흑발을 틀어 올려 비녀로 고정했다.
셀레스틴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치렁치렁한 순백색 사제복 자락이 발치에서 너울거렸다.
경건한 자세로 성호를 긋고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자, 그녀의 머리 위에 이채로운 광륜이 떠올랐다.
여신과 직접 통하고 있다는 표식이었다.
“기도 올리겠나이다.”
셀레스틴은 여신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신력을 보유한 유일한 사제였다.
제국에서 가장 높은 성직자인 대신관조차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에나는 셀레스틴이 대화 내용을 발설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셀레스틴이 ‘신탁’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누설할 수 있는 건 극히 일부뿐이었다.
“시에나 님, 제 믿음이 부족한 탓일까요. 제가 아는 황녀 프리다는 유약한 여인입니다. 그곳에서 집행관을 처단할 수 있을지 확신이 가지 않습니다.”
셀레스틴은 잠자코 시에나의 답을 기다렸다.
얼마간의 공백 끝에 그녀의 귀에 시에나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셀레스틴. 황녀가 그곳에 혈혈단신으로 가지는 않을 터인데, 무엇을 걱정하느냐.]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음성을, 셀레스틴은 조용히 경청했다.
“네, 사제들뿐 아니라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황녀를 뒤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모든 건 보검을 든 황녀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조력자를 원한다는 것이냐.]
“네, 의미 있는 조력자를 보내 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엘로이스의 반지.]
셀레스틴의 까만 눈동자가 살짝 뜨였다. 그 안에 희뿌연 광채가 구름처럼 일어났다.
“반지? 무슨 반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엘로이스가 스갈론을 처단할 때 쓰지 않고 남겨 둔 것이다. 황제의 반려자가 대대로 그 반지를 후임에게 계승하고 있다.]
스갈론이라면 오벨론 전에 있던 최고 집행관, 즉 전대 마왕이었다.
지금의 오벨론처럼 임기를 연장하려 애쓰던 스갈론은 엘로이스의 손에 처단당하면서 소멸했다.
이후 최고 집행관에 등극한 오벨론은 지하세계의 앞마당이었던 암흑의 땅을 엘로이스에게 넘겼다.
자신의 임기를 열어준 대가로.
그 땅은 지금의 칼레바니아가 되었다.
[그 반지에도 내 가호가 깃들어 있다. 그 주인이 오벨론 앞에 나아갈 용기가 있다면, 반지에 담긴 힘으로도 몸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귓가에 시에나의 부연 설명이 계속해서 들렸다. 셀레스틴은 다시 눈을 감고 귀를 세웠다.
“그 주인이라면, 황후 레베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다. 엘로이스의 반지는 곧 다음 대 주인에게 넘겨진다. 그자가 조만간 너를 찾아올 테니, 엘로이스가 묻힌 곳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시에나의 마지막 답변이 그녀의 귓가에 쟁쟁하게 울렸다.
음성이 끝나자 셀레스틴의 머리 위에서 광륜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두 눈을 떴다.
까만 눈동자 안에 비치던 광채는 어느덧 사라져 있었다.
“엘로이스 황제가 묻힌 곳이라면….”
셀레스틴은 급히 환복하고 황궁으로 갈 채비를 했다.
한 시간쯤 뒤 그녀가 등불을 들고 찾아간 건물은 칼레바니아 건국기념관이었다.
한쪽 벽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엘로이스의 전신 초상화.
셀레스틴은 그 앞에 멀거니 서서 엘로이스의 왼손 부근에 등불을 비추었다.
시에나 여신의 말대로, 약지에 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다.
“의외로 단출한 반지구나.”
짧은 감상을 마친 셀레스틴은 손을 뻗어 초상화의 액자 테두리를 천천히 쓸어보았다.
그녀의 손끝에 무언가가 잡혔다.
—딸깍.
손잡이였다.
***
테렌스와 발레리는 마차에서 차마 하지 못한 것들을 침대 위에서 매듭지었다.
그 여파로 발레리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평화롭게 잠자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테렌스는 침대맡 서랍에서 반지를 꺼냈다.
굳은살이 울룩불룩한 발레리의 네 번째 손가락에, 테렌스는 반지를 조심스레 끼워 보았다.
‘손마디가 굵어서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 맞는군.’
하지만 잘 맞으면 뭘 하나.
반지를 주는 의미를 안다면 받지도 않으려 할 텐데.
테렌스는 씁쓸히 입맛을 다시며 반지를 다시 빼냈다.
“목걸이를 만들어서 걸어줘야 할까. 네가 부담스럽지 않으려면.”
그의 얕은 한숨에 발레리의 귓가에 난 솜털이 산들거렸다.
테렌스는 고개를 돌려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이 너무 밝아서일까.
잠이 오지 않는다.
언젠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들은 아스라이 멀어 보였다. 저 달과 별만큼이나.
‘넌 아직 가벼운 연애를 바라겠지. 과연 네게 청혼할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
테렌스는 잠든 그녀의 머리칼을 정답게 쓰다듬었다.
“…왜 네겐 받기만 하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어.”
발레리와 함께하는 시간은 테렌스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볼드윈 공작의 밀수 혐의에 관해서도 영양가 넘치는 정보를 제공했다.
덕분에 곧 조사에 탄력이 붙을 것이다.
테렌스는 손수건을 반으로 접어 발레리의 감긴 눈 위에 살포시 올려두었다.
그는 발소리를 죽여 책상으로 향했다.
의자에 앉은 그는 기름등을 켜고 깃펜을 잡았다.
그리고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
테렌스는 모처럼 주말에 짬을 내 프리다를 찾아왔다. 그는 여동생과 차를 마시며 주간 근황을 듣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아 버렸다.
“발레리 생일이… 지났다고?”
“응! 꽤 됐는데. 몰랐어?”
“…….”
“켄드릭이랑 여기 불 다 꺼놓고 깜짝파티도 해 줬어. 발레리가 감동해서 막 눈물까지 흘리더라니까.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
충격에 휩싸인 테렌스는 찻잔을 탁자에 덜컥 내려놓았다.
왜?
왜 다른 날도 아니고 본인 생일을 말 안 하고 넘어간 거지.
친구들과는 파티까지 해 놓고, 왜 연인인 내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서운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오빠, 왜 그래? 차가 좀 떫게 우려졌어?”
오라비의 속을 알 길이 없는 프리다는 생글거리며 케이크 조각을 입안에 한가득 떠 넣었다.
“…아니. 선물은 뭘 해 줬지?”
“으음, 내가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했어.”
“무슨 소원.”
“그건 내가 충분히 강해지면 얘기해 주겠대. 문지기 기사 열 명하고 대련해서 이겨 보라는데, 약점을 좀 더 보강해서 다음 달부터 도전해 보려고!”
프리다는 얼그레이 크림이 덕지덕지 묻은 포크를 자신 있게 척 들어 보였다.
제 스승을 닮은 명랑한 미소가 얼굴에 가득 흘렀다.
근력운동 강도를 꽤 높였다더니, 한때 헐렁했던 셔츠 위로 팔근육이 제법 잡혔다.
정수리에 꽉 올려 묶은 그녀의 백금발은 분수대의 물빛처럼 경쾌하게 반짝였다.
체구는 작지만 옹골차고 야무진 전사의 모습이었다.
여동생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눈에 띄게 강해져 있었다.
프리다가 여기까지 성장한 게 다 누구 덕인지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졌다.
오늘처럼 밝은 날에는 낮에 만나서 웃으며 칭찬해 주고 싶은데.
자꾸 발레리에게 서운한 감정이 올라왔다.
어떻게 제 생일을 말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있을까. 생일이면 생일이라고 말을 하는 게 그렇게 힘든 건가.
‘…섭섭하지만 갈등으로 번지지 않으려면 대화로 잘 풀어야겠지.’
테렌스는 발레리와 갈등의 도화선을 만들지 말자고 굳게 마음먹었다.
연애를 시작하며 그녀가 제시한 조건이 있었으므로.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술 한잔 짠하고 미련 없이 보내주기.
그는 이별의 단초를 조금도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오빠,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
“결혼은 언제 해? 나랑 동갑이니까 이제 막 노총각 대열이잖아.”
프리다가 천연한 얼굴로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테렌스는 찻잔을 입술에 대려다 동작을 멈췄다.
결혼이라.
요즘 들어 가장 어렵게만 느껴지는 과업이었다.
황후는 반지를 내어주며 마음 가는 사람에게 청혼하라고 했다.
하지만 두렵다. 용기 내서 반지를 내밀었을 때, 발레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하면.
“볼드윈 공녀도 짐 싸서 집에 돌아갔다며. 오빠가 얼마나 안 만나주면 그랬을까. 나 다 알아. 일한답시고 집무실에만 처박혀 있었지?”
“만나자고 찾아왔을 때 안 만나준 적은 없어. 공녀가 떠난 건 내게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리다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휴, 오빠가 직접 찾아갔었어야지. 그렇게 수동적으로만 있으면 어떡해? 공녀도 되게 자존심 상했겠다.”
프리다는 줄곧 불만이었다.
그녀는 제 오라비처럼 여자 보길 돌같이 하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저 철석같이 다물린 입에서 여자 얘기가 나온 적이….’
“프리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잔걱정하지 말고 수련에 정진해라.”
테렌스는 여동생의 참견을 일시에 차단했다.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확실해지기 전에는.
***
커다란 통창으로 밝은 햇살이 들어오는 중앙궁 서관 응접실.
황후 레베카에게 예고 없이 한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사제 셀레스틴이었다.
두툼한 숄을 걸친 황후는 긴장 띤 미소로 사제를 마주했다.
속으로는 의아했다. 황제가 다급히 호출하지 않는 이상, 셀레스틴이 황궁에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왜 자발적으로 찾아온 거지. 그것도 엘리엇이 아닌 나에게.
찻잔을 감싸 쥔 황후의 손안에 축축한 땀이 배어들었다.
“…황후 폐하.”
“네, 사제님.”
“혹 황태자 전하께 정혼자가 있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신력이 뛰어나다는 사제가, 느닷없이 황태자의 정혼 여부를 묻고 있다.
황후는 셀레스틴의 의중을 헤아리려고 눈을 곧추떴다.
그러나 사제의 표정에는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는 심해처럼 고요했다.
“테렌스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뇨, 없습니다.”
“그렇다면 연인이 따로 있습니까?”
“내가 알기론 없어요. 사제님, 그런 건 왜 물으실까요?”
“…….”
셀레스틴은 답하지 않았다.
과묵한 손님을 앞에 두고, 황후는 애써 눈을 휘었다.
‘이 사제는 언제나 저 할 말만 하고 입을 닫곤 했지. 신탁을 가져왔을 때도, 여신의 전언이 끝난 뒤엔 계속 침묵했고.’
“…마침 내가 다과회를 열어서 귀족 영애들을 초청할 참이었어요. 테렌스가 자연스럽게 연애를 시작할 수 있게요.”
“그렇군요.”
셀레스틴은 단조로운 어투로 대답하며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