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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11)화 (111/173)

111화

“…긍정적인 사이다. 너야말로 발레리와 무슨 사이지?”

발레리와의 관계를 묻는 루카스에게, 테렌스는 이상한 대답을 했다.

긍정적인 사이는 또 무슨 소리람. 발레리는 미간을 좁혔다.

“아유, 저희도 아주 긍정적이죠. 피는 안 섞였지만 아주 찐한 오빠 동생 사이인걸요.”

루카스는 발레리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발레리는 그에게 입 모양으로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아주 살벌한 비속어였다. 테렌스는 그녀의 반응을 보고 마음을 다소 놓았다. 발레리는 그의 말에 전혀 동의하는 것 같지 않았다.

루카스는 다시 테렌스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정확히 어떤 직위이신지는 모르겠는데, 그 나이에 파란 관복으로 승진하는 게 가능해요? 집안이 되게 좋으신가 보다.”

“…집안은 좋은 편이다. 승진은 글쎄, 아직 안 했는데.”

저기요, 황태자 전하.

거기서 더 승진하면 황제잖아요.

왜 이 새끼 쓸데없는 질문에 일일이 대답을 해 주고 있냐고요.

발레리는 테렌스를 보면서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와, 아예 파란 관복부터 시작한 거예요? 형씨, 다이아몬드 수저신가 보다.”

“…잡설이 길군. 본론부터 얘기하지.”

루카스는 기다렸다는 듯 음식이 놓인 접시들을 한쪽으로 치웠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생산시설 내부의 도면을 펼쳤다.

그는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짚어 가며 알기 쉽게 설명했다. 장인들이 마력석을 가공한 뒤 남은 부산물을 어떻게 처리하고, 어디에 모아 두는지.

“새벽 두 시쯤 마차 세 대가 공장 앞에 도착해요. 복면 쓴 남자 열두 명이 나와서 이쪽 창고를 열고 마력석 가루 상자를 마차에 실어요.”

그다음으로 루카스는 볼드윈 공작령 북부의 지도를 펼쳤다.

그는 몽당연필을 들고 생산시설에서 사피로스 강으로 가는 루트를 쭉 연결했다.

새벽에 이름 모를 작자들이 마력석 부산물을 어떤 경로로 옮겨 가는지 나타내는 궤적이었다.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가 그은 선은 지도에 표시된 길이 아니라 엉뚱한 지점에 걸쳐져 있었다.

“잘 닦인 길이 버젓이 있는데, 일부러 이쪽 풀숲으로 돌고 돌아서 가더라고요? 가끔은 시냇가 쪽으로도 빠져요. 중앙에서 파견한 치안대 검문을 피하려는 것 같았어요.”

루카스는 지도에 구불구불한 선을 여러 개 그었다. 모두 사피로스 강 부두로 향하는 선이었다.

“밀수품은 평일에는 새벽 세 시 배에 실리고, 주말에는 네 시 넘어서 실려요. 하역은 늘 똑같은 놈들이 해요. 뭐 당연히 매수한 거겠지만요.”

루카스는 언변에 능했다.

피어스가 증인으로 케빈 대신 그를 보낸 이유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루카스에게 씩씩대던 발레리는 어느덧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테렌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도를 유심히 살피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도 이 시설의 도면까지는 접했지만, 자네는 공장 내부 사정을 어찌 그리 잘 알고 있지?”

“두 달 넘게 그 공장 잡부로 일했으니까요. 제가 워낙 손이 빨라서, 장인분들이 저 그만둘 때 얼마나 아쉬워하셨는지 몰라요.”

루카스는 그에게 빙그레 미소 짓더니, 돌연 표정을 굳혔다.

“문제가 있는데요.”

“…문제?”

“가루를 어떻게 빼돌리는지는 알았어요. 근데 관련 자금이 어디서 어디로 흐르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저희가 금전 거래 현장을 본 건 아니니까요.”

테렌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마 최종적인 이윤은 공작에게 가겠지만, 공작은 해당 시설의 직접적인 주인이 아니었다.

당연히 바지사장이 존재했다. 지금 섣불리 혐의를 제기했다간 공작이 꼬리를 자를 수 있었다.

“가끔 어떤 남자가 찾아올 때마다 바지사장이 쩔쩔매면서 극진히 모시거든요? 그 사람이 좀 수상한데, 찾아도 정보가 잘 안 나와요. 미행도 너무 잘 따돌리고.” 

“이름을 아나? 내가 알아보겠다.”

“로널드 업튼이요.”

테렌스는 가슴팍에서 수첩과 연필을 꺼내 그 이름을 받아 적었다.

“철자가 이게 맞나?”

“아마 그럴 거예요. 의외로 악필이시네요.”

“…이 밖에 다른 증거는 없고?”

“에이, 형씨. 저 그렇게 허술하지 않아요.”

루카스는 뒷주머니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비덴티움.

목걸이 착용자가 보고 들은 걸 모두 기록해 준다는 특수 마력석이었다.

테렌스의 동공이 급격히 확장됐다.

“…비덴티움? 이걸로 증거를 기록했다는 건가?”

테렌스가 모를 리 없었다.

비덴티움이 얼마나 희귀한 마도구인지.

무엇보다 루카스의 증언이 사실임을 못 박아줄 수 있는 장치였다.

“네. 일터에 얼마 없는 것 중에 하나 슬쩍했어요. 아시다시피 공장 안에서는 착용을 못 해서, 밖에서 감시할 때랑 말 타고 마차 따라붙을 때만 걸었고요.”

“간도 크군.”

“하하, 절도죄로 집어넣진 말아 주세요. 저 공익 제보자잖아요?”

잠시나마 신뢰감을 주던 루카스는 다시 너구리처럼 능글댔다.

테렌스는 그의 뺀질거리는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되바라진 태도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발레리에게 필요 이상으로 친근하게 대하는 것도 그렇고. 형씨라는 호칭 또한 심히 거슬렸다.

“아, 저기, 손 좀 펴보세요.”

발레리의 말에 테렌스는 왼손을 펼쳤다.

그녀는 작은 주머니를 꺼내 그의 손바닥에 소량의 가루를 쏟아주었다.

“루카스가 공장에서 가져온 샘플이에요.”

테렌스는 손바닥에 놓인 검은 가루에서 보랏빛 광택을 확인했다.

마력석이 맞았다.

제보자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지듯 상세한 설명부터, 필요 이상으로 구체적인 증거품까지.

전부 자신이 원하던 정보였다.

지금까지 북부로 파견했던 그 어떤 정탐꾼보다 나았다.

“…자 형씨, 그럼 저는 어떤 보상을 기대하면 될까요?”

루카스는 양 손바닥을 살살 비비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그는 제 달변에 상대방이 매료됐다는 걸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밀수 신고는 그 규모에 따른 포상금이 정해져 있다.”

“아이고, 정말 생긴 대로 딱딱하게 구시네. 다른 품목도 아니고 마력석인데, 좀 후하게 쳐주시면 안 돼요?”

“비덴티움, 이 안에 든 기록을 보고 나서 결정하겠다.”

제보가 끝났다.

세 사람은 조용히 음식을 들었다.

테렌스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카스는 떠나려는 그에게 얼른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전 여기 묵고 있어요.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시고요.”

“그러지.”

루카스는 뒤돌아선 테렌스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형씨, 이름은 알려주고 가셔야죠.”

“…테리.”

잠시 고민하던 테렌스는 제 아명을 댔다.

그 외에 다른 이름은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

“아가씨, 채플까지 마차로 태워 줄까요?”

발레리는 레이븐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레이븐이 몰고 온 마차는 술집 베일리스에서 약 10분 거리에 세워져 있었다.

마차 쪽으로 걸어가는 내내 테렌스는 한 마디도 없었다.

화난 건 아니겠지.

발레리는 그의 눈치를 보며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죄송해요. 쟤가 좀 버르장머리가 없죠.”

“…별난 자였어. 너와 닮은 구석도 있고.”

마차 문이 닫혔다.

테렌스는 그제야 그녀의 어깨에 왼팔을 두르며 볼을 비벼왔다.

화난 건 아니구나. 발레리는 뺨을 꾹 누르는 압력에 눈을 살포시 찡그렸다.

“제가 걔랑 닮았다고요? 와,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다른 건 아니고, 자유분방하다는 뜻이야.”

“하하, 예의 없다는 말을 되게 잘 돌려서 말씀하시네요.”

발레리는 토라진 것처럼 뺨을 부풀렸다. 테렌스는 그 보드라운 살결 위에 쪽, 쪽, 입을 맞췄다.

“저자는 도발적이긴 한데, 별로 위기감이 안 든다.”

“위기감이라뇨?”

“너하고 뭐가 있는 것 같진 않아서. 그냥 친구잖아. 그렇지?”

딱히 질투 대상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발레리의 입술 사이에서 풋, 하고 웃음이 샜다.

“저 댁 말고 다른 남자 없는데요. 쓸데없는 위기감 같은 거 갖지 마시죠.”

“댁이라니. 그렇게 정 없이 부르면 내가 서운한데, 공주님.”

“어휴, 진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발레리는 그의 팔뚝을 찰싹 내리쳤다. 이럴 때 보면 테렌스도 참 능글맞은 구석이 있었다.

“그나저나, 저자는 왜 널 공주라 부르지?”

“글쎄요…. 아버지 밑에서 일하던 사람이라 그런 거 같아요.”

공주라는 호칭이 붙은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발레리가 두목 피어스의 수양딸이기 때문이었다.

“흠, 억양을 들으면 너처럼 남부 출신인데…. 머나먼 북부까지 가서 취직한 이유가 궁금하군.”

“하하, 그러게요. 요즘 워낙 마력석 장신구 사업이 잘나가니까 궁금했나 봐요.”

발레리는 얼른 테렌스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루카스에 대한 그의 호기심이 더 발동하기 전에 대화를 멈추고 싶었다.

뜬금없이 시작된 키스였으나, 테렌스는 그녀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입안을 달콤하게 적셔 주었다.

마차가 황궁 정문을 통과할 때쯤, 둘은 이마를 맞붙이고 숨을 골랐다.

“테렌스.”

“응.”

“까만 머리도 잘 어울려.”

발레리는 테렌스의 흑발을 쓰다듬었다. 그는 다정한 손길을 느끼며 푸른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런가? 레이븐이 골라 준 가발인데.”

“뭐랄까, 되게 지적이면서도 야해 보여요.”

테렌스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누군가에게 야하다는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 표현, 되게 자극적인 거 아나?”

“자극받으라고 한 말인데.”

발레리는 기다렸다는 듯 테렌스의 무릎 위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부터였다. 마차에 습습한 공기가 들어차기 시작한 건.

마부석에 앉은 레이븐은 등 뒤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평지를 달리는데 왜 이런 소리가 난담?”

레이븐은 고삐를 느슨히 잡고 귀를 쫑긋거렸다.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흐으, 여기까지만 해요.”

“먼저 불붙여 놓고 이러기인가?”

“뒤처리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이따 방에서 마저 해요.”

아하, 그런 거였어?

레이븐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가 보기에 두 사람은 무도회 때 눈이 제대로 맞았다.

‘무도회 이후엔 따로 보고도 안 받고 만나러도 안 가서 의아했는데. 야밤에 침실에서 밀회하고 있었다 이거지.’

최근 황궁에 자자한 소문이 하나 있었다.

정색의 대명사로 군림하던 황태자가 전례 없이 웃음을 보인다는 얘기였다.

각료 회의 때도 간혹 미소를 띠어 대신들을 놀라게 했고, 이전 같았으면 귓등으로 흘렸을 관리들의 농담에 피식 웃기도 했다.

집무실에서 혼자 서류를 볼 땐 입꼬리를 스멀스멀 올리다가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어쩐지. 플라토닉 러브로는 그런 야릇한 미소가 나올 리가 없어.”

그렇다고 업무 효율이 떨어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발레리가 한창 튕겨서 마음고생할 때 보다 훨씬 나았다.

매사에 의욕이 있어 보였다.

무엇보다 잠도 이전보다 잘 자는 것 같았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레이븐은 다시 고삐를 틀어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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