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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10)화 (110/173)

110화

‘베일리스’

발레리는 눈앞에 있는 술집 간판을 손안의 쪽지와 번갈아 가며 확인했다.

쪽지는 며칠 전 루카스가 방문 밑으로 밀어 넣은 것이었다.

「미어터지는 황성에서 그나마 조용한 술집이더라. 제보하기 적당할 것 같아서 골라 봤어.」

“이 주소면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테렌스가 이따가 잘 찾아오려나?”

어젯밤 그녀는 테렌스에게 약속 장소를 통보하며, 먼저 루카스와 만나고 있겠다고 말했다.

루카스와는 따로 나눌 이야기가 있었다. 테렌스를 만나기 전에 주의사항도 당부해야 했고.

테렌스는 한 시간 뒤쯤 레이븐과 함께 따로 오기로 했다.

발레리는 술집 문을 툭 밀고 들어갔다. 저 멀리 루카스의 얼굴이 보였다.

“여어, 공주님 왔어?”

가장 구석 자리에 앉은 루카스는 여전히 뺀질거리는 태도로 발레리를 맞이했다.

“아 쫌! 사람 있는 데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사람 우리밖에 없는데? 주인도 아까 자리 비우더라.”

발레리는 주위를 둘러봤다. 모든 테이블이 텅 비어 있었다. 정말 사람이라곤 둘뿐이었다.

“뭐야, 일곱 시 넘었는데 왜 사람이 없어?”

“난들 아나. 일단 관리 오기 전에 황제들 묘지 위치부터 얘기할게.”

묘지 얘기에 발레리는 괜히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말해 봐.”

“1대부터 3대까지는 황궁 건국기념관.”

“어어, 계속해 봐.”

필요한 정보는 바로 나왔지만, 발레리는 티 내지 않고 루카스의 설명을 계속 들었다.

‘뭐야, 내가 가본 데잖아? 거긴 황궁 북쪽 게이트 바로 앞에 있는 박물관인데…. 거기 사람이 묻혀 있다고?’

칼레바니아 건국기념관이라면 황궁 최북단에 있는 단층 건물이었다.

규모는 채플의 절반도 안 될 만큼 작았으며, 황녀가 기거했던 라벤더궁처럼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양식으로 지어졌다.

내부엔 초대 황제 엘로이스를 비롯한 건국 초기 황제들과 초대 볼드윈 공작 등 개국 공신들의 초상화 수십 점이 걸려 있었다.

특히 엘로이스의 전신을 담은 입상화는 한쪽 벽면 전체를 덮을 만큼 거대했다.

그림 속 엘로이스는 붉은색 제복 차림으로 왕홀을 치켜들고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허리를 짚은 왼손의 약지에는 덮개가 씌워진 수수한 반지가 은은히 빛났다. 얼마 전 테렌스가 황후로부터 넘겨받은 그 반지였다.

엘로이스 황제의 유해는 2대 황제 버나드, 3대 황제 루벤과 함께 지하 묘실에 안치돼 있다.

발레리는 지난여름 황궁 박물관들을 뒤질 당시 그곳에도 갔었다.

‘거긴 창고에도 그림이랑 조각상밖에 없었는데.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가 있었나? 왜 생각이 안 나지….’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건물 1층에는 창고 외에 딱히 어디로 통하는 문이 없었다.

건물의 앞뜰, 뒤뜰에는 자그마한 화단뿐이었다.

‘…내가 못 봤나 보다. 근데 왜 하나가 아니라 그 아들에 손자까지 삼대가 묻혀 있는 거야. 무서워서 돌아버리겠네, 진짜.’

그뿐인가. 아마 그 배우자들까지 총 여섯 명이 매장돼 있을 수도 있었다.

발레리의 창백한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꽉 말아 쥔 주먹 안에도 습기가 가득 들어찼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 겁먹은 것 좀 봐. 너무 걱정하진 마. 애장품은 관짝이랑은 다른 상자에 담겨 있을 테니까.”

루카스가 짐짓 안쓰러워하며 팔을 뻗었다. 옷소매로 그녀의 이마를 닦아 주려는 요량이었다.

“치워.”

발레리는 그의 손목을 맵게 후려쳤다.

“딱딱하긴. 우리 공주님, 이래서 시집은 어떻게 가려고 그래.”

“시집은 내 사전에 없다고 골백번은 얘기했거든. 우리 양아치, 기억력 좀 챙기고 다니자?”

“…아쉽다. 공주님이 한 삼 년 만 일찍 태어났으면 오빠가 부인 삼았을 텐데.”

이 미친놈이 터진 게 입이라고 막 지껄이지.

발레리는 불끈거리는 주먹을 확 치켜들었다. 루카스는 움찔거리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아으, 공주님이 때리면 오빠는 아파요.”

이 와중에도 쉬지 않고 공주 타령이었다.

마음 같아선 정말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싶었으나 발레리는 순간적인 인내력을 발동했다.

문득 그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생각나서다.

“루카스.”

“…어? 왜 안 때려?”

“고마워. 내가 말한 거 알아봐 줘서.”

방금까지 그녀는 내면의 폭력 본능을 모두 방출할 기세였다.

그런데 갑자기 온화한 얼굴을 하고는 고맙단 소릴 하고 있었다.

기이한 태세 전환이었다. 루카스는 제 얼굴을 보호하고 있던 양팔을 천천히 내렸다.

“…뭐야, 공주님? 그러니까 더 무서운데.”

“약 하나만 구해주라.”

“약? 공주님 약쟁이였어? 나 약은 취급 안 해. 순수한 육체적 즐거움만 추구한다고.”

순수하긴 개뿔. 본인처럼 꼭 불순한 생각만 하지. 발레리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마약 말고. 진짜 약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무슨 약인데.”

“…트라우마 치료제.”

루카스가 호박색 눈을 끔뻑거렸다. 트라우마 치료제라면 그냥 약도 아니고 마법약이었다. 생산 과정에서 마법사의 주술이 들어가는.

“으잉? 그거 엄청 비싼 마법약이잖아. 귀족들이 실연당했을 때나 먹는 거 아니야?”

“어, 맞아. 그럴 거야.”

“그게 왜 필요한데, 공주님?”

왜긴.

나 잠깐 좋자고 그 사람 인생에 대책 없이 뛰어든 거 수습하려고 그러지.

모든 게 끝나면, 그 사람 기억에서 깔끔히 퇴장해 주고 싶으니까.

그 사람의 첫사랑은 내가 아닌 다른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으니까.

켜켜이 쌓여 가는 추억들은 나 혼자만의 기억으로 간직하면 족하니까.

발레리는 울컥 솟구치는 쓰라린 생각의 파편들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러고 있자니 가슴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이 기분이 헛헛했다.

“…그냥, 그냥 잔말 말고 좀 구해 줄 수 없어?”

“흠, 기억 지우는 기간에 따라 값이 다를 텐데. 몇 개월? 아니면 몇 년?”

“모르겠어. 일단 반년 치.”

그녀는 의자에 걸쳐둔 자루에서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꺼내 툭, 내려놓았다. 두 달하고도 보름치 임금. 약값을 치르고도 남을 만큼 두둑한 금액이었다.

“…역시 우리 공주님은 거래할 줄 아는 사람이야.”

“정기적으로 의원에서 진료 받고, 상담 받아야 처방받을 수 있을 거야. 약 가지고 오면 수수료 더 줄게.”

“충성, 충성, 충성. 공주님 사랑합니다, 충성. 이 오빠가 또 실연당한 연기 잘하잖아.”

실연이라면 실제로 많이 당하기도 했었다. 의사 앞에서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는 것처럼 꾸며내는 건 루카스에게 일도 아니었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금화 주머니를 얼른 자루에 챙겨 넣었다.

“공주님, 근데 관리분은 언제 와?”

“곧 와. 미리 경고하는 건데, 너무 버릇없게 굴지는 마. 꽤 높은 사람이니까.”

“공주님, 날 뭘로 보는 거야. 나만큼 예의 바른 사람이 어디 있다고.”

“염병하지 말고 공대라도 깍듯이 해.”

끼익.

마침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술집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시커먼 흑발에 하늘색 눈동자를 한 키 큰 남자.

그리고 초록색 로브로 온몸을 감싼 작달막한 남자였다. 등에 커다란 자루를 메고 있었다.

전자는 테렌스, 후자는 레이븐이었다.

발레리는 벽시계를 흘끗 쳐다봤다. 약속 시간까지는 15분이나 남아있었다.

“어, 일찍 오셨네요.”

“아이고, 안녕들 하십니까. 근데 어느 쪽이 관리분이시죠?”

루카스가 일어나 싹싹하게 손님들을 맞이했다.

“나다.”

테렌스가 손을 들고 대답했다.

흑발에다가 검푸른 관리 복장을 하고 있으니 정말 인상이 달라 보였다.

백금발에 제복 차림일 땐 매끈하게 세련된 황태자였다면, 흑발이 되니 차분하고 지적인 분위기의 엘리트 관리 같았다.

이젠 뭘 뒤집어써도 그냥 잘나 보이는구나.

연인의 새로운 모습에 발레리의 심장은 또다시 엇박자로 뛰었다.

레이븐은 술집 주방에서 식기를 가져와 테이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루에서 빵과 소시지, 과일을 꺼내 접시에 놓아 주었다. 황궁에서 바리바리 싸온 음식들이었다.

발레리는 레이븐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왜 음식을 가져오셨어요? 술집에서 시키면 될 텐데.”

“아아…. 전, 아니 그 저분께서 하루 동안 여길 대절하셨거든요. 저희 말고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요.”

대절?

이 술집을 아예 통으로 빌렸다고?

발레리와 루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캬, 진짜 높은 분 맞나 보네.”

루카스가 중얼거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럼 즐겁게 대화 나누세요.”

음식을 다 꺼낸 레이븐은 물컵과 식기까지 놓아준 뒤 문밖으로 나갔다.

식탁이 다 차려지자 루카스는 곧바로 발레리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테렌스가 눈으로 찜해 두었던 자리였다.

심기가 잠깐 불편해진 테렌스는 목을 큼, 가다듬으며 발레리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오늘 처음 뵙겠습니다. 루카스 메이필드예요.”

루카스는 덧니까지 훤히 드러내며 넉살 좋게 악수를 청했다.

발레리는 속으로 당황했다.

어떡하지. 테렌스는 오른손으로 악수 못 할 텐데.

보다 못한 그녀는 테렌스를 대신해 루카스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대리 악수였다.

“뭐야, 왜 공주님이 악수를 해?”

“어, 나도 반가우니까. 하하.”

“와, 높은 관리라길래 나이 지긋한 분이 나올 줄 알았는데. 나보다도 훨씬 어려 보이네요. 연배가 어떻게 돼요?”

루카스가 테렌스의 외모를 찬찬히 뜯어보며 물었다.

“…스물다섯.”

테렌스는 제 나이를 사실대로 말했다. 굳이 거짓말을 한 겹 더 두를 생각은 없었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네. 루카스는 긴장이 풀어졌는지 입꼬리를 슥 올렸다.

“형씨, 우리 공주님이랑은 무슨 사이예요?”

루카스가 발레리의 어깨 위에 팔을 척, 올리며 물었다.

‘형씨? 이게 진짜 돌았나?’

발레리는 그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이를 꽉 깨물었다.

그래, 루카스 네 버르장머리가 어디 가겠어. 두목한테도 매번 깝죽거리다가 한 대씩 얻어맞는 놈이.

“손 안 치워? 관리와 병사 사이지 뭐야.”

그녀는 거칠게 어깨를 털어냈다. 강한 반발에 루카스는 팔을 바로 치웠다.

“아유, 우리 공주님 또 오빠한테 앙탈 부리네.”

테렌스는 분노와 혼란이 한곳에 뒤섞인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단 공주님이라는 호칭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

“…공주님?”

“네, 젊고 유능하신 관리분께서 우리 공주님이랑 어떤 사이인지 궁금해서요.”

미친놈이 왜 여기서까지 공주 타령이야.

얼굴에 철판을 깐 건지, 아니면 정말 눈치가 없어서 이러는 건지.

발레리는 당장 손날로 루카스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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