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여신 시에나의 신탁을 가져온 사제 셀레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최고 집행관 오벨론. 그를 처단할 방법이 존재한다고.
인간의 무기가 아닌, 여신 시에나의 보검.
그걸 들어 마왕을 교체할 자가 이미 황실에 태어났다고.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건국 황제 엘로이스가 유물로 남긴 그 보검은 저주받은 물건에 가까웠다.
여신과 공명이 맞지 않는 자는 보검을 만질 시 영구적인 상처를 입었다.
보검을 함부로 만졌다가 한쪽 손을 못 쓰게 된 선대 황제만 여럿이었다.
그런데도 테렌스는 그 신탁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굳게 믿었다.
마왕비로 팔려갈 여동생을 위해, 애먼 실종자들의 구출을 위해 기꺼이 검을 들겠다고 다짐했다.
일국의 황태자이자, 프리다의 하나뿐인 오라비로서.
그리고 모든 건 그의 착각이었다.
패기 있게 검 자루를 쥐었던 오른손에는 깊은 화상만이 남았다.
아마 죽을 때까지 아물지 않을 상처였다.
그 손 위에는 통각을 조금이나마 완화해 주는 특수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테렌스는 제 손바닥을 차분히 내려다봤다. 이젠 연인에게도 제 처지를 고백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면서.
“발레리.”
“네.”
“난 아마 오른손을 계속 못 쓸 거야.”
“안 그래도 너무 안 나아서 걱정했었는데…. 혹시 상처 좀 봐도 돼요?”
테렌스는 발레리에게 오른손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침대에서 그녀를 안을 때조차 오른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었으니까.
그가 장갑을 벗는 건 하루에 한 번, 레이븐이 마법으로 소독을 해줄 때뿐이었다.
‘그래, 너에게라면 못 보여줄 것도 없지.’
테렌스는 장갑 끝을 왼손으로 천천히 잡아당겨 벗었다. 찌릿한 통증으로 미간이 구겨졌다.
환부가 그대로 드러났다.
시뻘건 피부의 진피층이 고스란히 노출돼 있었고, 곳곳에 올라온 수포는 방금 돋아난 것처럼 울룩불룩했다.
“하으, 어떡해….”
그의 손목을 잡은 발레리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이제 통증은 꽤 익숙해졌어. 다만 아쉬운 건…. 널 왼손으로밖에 못 만진다는 거다.”
테렌스는 다시 장갑을 끼우며 쓸쓸히 웃었다.
그리고 눈앞의 연인을 보며 목이 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 저는 왼손만으로 충분히 좋던데요.”
발레리의 눈동자가 야릇한 호선을 그리며 테렌스를 향했다.
“그리고 뭐, 손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테렌스의 입술이 곧바로 입술을 덮쳐왔다.
진한 입맞춤을 주고받으며, 발레리는 한층 두꺼워진 군복의 단추를 풀었다.
테렌스의 왼손은 그 어떤 날보다 분주히 움직였다.
***
“…공주님,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이 새벽에.”
공주님?
먼동이 희붐한 새벽, 발레리는 채플 방문에 열쇠를 밀어 넣다가 멈칫했다.
익숙한 호칭,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렸다.
탁한 카키색 머리칼에 능글거리는 호박색 눈동자.
펠런 단원 루카스가 찾아와 있었다. 옷은 어디서 났는지, 발레리처럼 황궁 근위병 차림이었다.
“하암…, 밤새 우리 공주님 기다리느라 나 목 빠질 뻔했잖아.”
루카스는 도적단 펠런의 공인 미남이자 알아주는 난봉꾼이었다.
두목 피어스 밑에서 수양딸처럼 자란 발레리를, 그는 늘 공주님이라 칭했다.
번죽거리며 공주님, 공주님 할 때마다 발레리는 질색했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이 호칭만을 고수했다.
“…볼드윈 공작 얘기하러 왔지? 일단 들어와.”
발레리는 방문을 열고 새 손님을 맞아들였다.
“케빈이랑 나랑 거기 말단으로 취직해서 뺑이 좀 쳤어. 남부 억양 쓴다고 처음엔 배척당했는데, 우리가 워낙 빠릿빠릿하니까 조금씩 잘 해주더라.”
루카스는 볼드윈 공작령의 마력석 장신구 생산시설에 위장 취업한 상태였다.
장신구를 만들고 남은 마력석 부산물들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
“너 같은 한량이 공장 잡부 일이라니. 적성 안 맞아서 힘들었겠다.”
“그야 뭐, 군대에서 더 고생하는 우리 공주님 생각하면서 버텼지.”
올해 서른인 루카스는 이미 수년 전 군을 제대했다. 군 생활이 얼마나 고역인지 익히 알았다.
“그래서, 좀 알아낸 건 있고?”
“응. 장인들이 마력석 깎고 남은 가루들을 한데 모아두는데. 수상한 인간들이 그걸 어디로 가져가더라고? 열심히 따라붙었지.”
루카스는 손바닥 크기의 납작한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자, 여기 샘플도 가져왔어.”
발레리는 주머니를 받아들고 끈을 풀었다.
그 내용물은 보랏빛 광택이 흐르는 검은 가루였다.
불규칙한 크기로 잘게 부서진 형태였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마력석이었다.
“…이걸 크세니아로 빼돌린다는 거지? 간도 크네.”
“응, 새벽 세 시에 라이호프로 가는 배에 실리는 거 확인했어.”
역시 두목의 말이 맞았다.
마력석 밀수출이었다.
발레리는 손끝으로 가루를 만지작거렸다. 루카스는 한층 심각해진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공주님.”
“…야, 나 곧 스물셋이야. 이젠 제발 좀 이름으로 불러.”
“아 왜, 한 번 공주님은 영원한 공주님이지.”
“염병.”
발레리는 고개를 흔들며 질색했다. 루카스는 이죽이죽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양 볼을 꼬집어 당겼다.
“근데 뭐가 이렇게 예뻐졌어? 우리 공주님, 군대에서 연애라도 하는 거야?”
발레리는 진저리를 치며 그의 손목을 쳐냈다.
“이 양아치가 미쳤나. 배때기에 칼빵 놔줘?”
공주님과 양아치.
이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루카스는 단언컨대 펠런 단원 중에 사생활이 가장 난잡한 인물이었다.
외롭다고 노래를 부르며 매번 거리로 나가 하룻밤 상대를 찾는 녀석이었으니.
그는 결혼 여부를 불문하고 모든 성인 여자들에게 추파를 날리고 다녔다.
양심은 있는지, 저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발레리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않았다기보다는 못했다는 편에 더 가까웠다. 그랬다간 피어스에게 목이 달아났을 테니까.
“우리 공주님 성질 여전하네. 근데 제보 받아준다는 관리가 누구야? 두목한테 듣자 하니 꽤 높은 사람이라던데.”
“…있어, 그런 사람.”
“혹시 직접 만나게 해줄 수 있어? 지도 보여주면서 좀 자세히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 비덴티움 하나 훔쳐서 기록까지 했어.”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목걸이를 꺼내 발레리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비덴티움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보고 들은 기록을 그대로 내보일 수 있는 수단이니까.
비덴티움은 특수 마력석 장신구 중에서도 가장 비싼 축이었다.
제작 과정이 까다로워 생산량 자체가 극히 적었고, 취급하는 마도구 상점도 손에 꼽힐 만큼 드물었다. 값보다는 희소성 때문에 웬만한 귀족들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비덴티움을 훔칠 생각을 하냐.”
발레리는 목걸이 끝에 달린 반투명한 프리즘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무도 안 볼 때 창밖 풀숲으로 하나 던져 놨다가 퇴근길에 주워서 가져왔지. 물론 두목이 제시한 아이디어야. 필요한데 살 돈 없으면 훔쳐야지 어쩌겠어.”
“두목은 진짜 천재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비덴티움 숫자 안 맞아서 전 직원이 속옷까지 다 벗고 소지품 검사하는데 겁나 쫄리더라. 당연히 안 걸렸지만.”
피어스는 철두철미한 인물이었다.
20년 동안 귀족들의 비위를 캐고 다니며 모든 증거를 기록하고 수집하는 습관이 있었다. 사소한 의뢰서조차 한 장 버리지 않고 모두 간직했다.
피어스의 목에 걸린 무지막지한 현상금은 9할 이상 귀족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었다.
펠런에 보물고를 털린 것도 화가 났지만, 비위를 들켜 약점을 잡힌 게 귀족들에게는 더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근데 발레리, 왜 내 질문에 답이 없어? 그 관리 만나볼 수 있는 거야?”
“흠….”
발레리는 고민에 빠졌다.
루카스를 테렌스와 직접 대면시키기엔 걸리는 게 많았다.
일단 루카스는 발레리가 황궁에 있는 이유를 잘 모른다.
피어스는 그녀가 신분을 속이고 근위병으로 입대한 이유에 대해, 딱 이렇게까지만 설명했다.
—발레리가 황궁에서 작업하고 있는 게 있다. 구체적인 건 묻지 말고, 용건만 잘 전달해라.
“…만날 수 있을 거야. 얘기 해 볼게.”
“자 여기. 내가 묵고 있는 근처 여관 주소야. 나 밤에는 바쁜 거 알지? 용건 있으면 해 떠 있을 때 찾아와.”
루카스는 발레리의 손에 쪽지 한 장을 쥐여 주고 떠났다.
***
“황태자 전하가 찾아왔습니다.”
중앙궁 서관, 황후 레베카의 서재 문이 스산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제복 차림의 테렌스가 걸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어, 거기 앉으렴.”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파를 가리켰다.
모자는 시종이 내 온 커피 두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벽난로가 지직거리며 타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불을 피우시는군요.”
“요즘 날씨가 꽤 을씨년스럽잖니.”
테렌스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웬 여인의 초상화 하나가 한쪽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저 그림은 뭡니까?”
“안 그래도 저 초상화 얘기하려고 불렀단다. 이스티아 하르만 대사가 주고 갔어.”
“아, 네.”
“건국제 무도회 때 만난 발렌틴이라는 여자를 찾아 달라고 하더구나. 근데…. 우리나라에 그런 이름을 가진 귀족 아가씨는 없었어.”
발렌틴?
테렌스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초상화를 자세히 응시했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흑발 아래 새카만 눈동자. 구릿빛으로 그은 피부. 반질반질하게 칠해진 탐스러운 주홍빛 입술.
그림 속 여인을 관찰하던 테렌스의 낯빛이 차츰 딱딱하게 굳어졌다.
심각하게 닮아 있었다.
지난밤 뜨겁게 살을 맞댔던 연인의 얼굴과.
첫눈에 알아보지 못한 건 이마와 눈썹, 코의 생김새가 미묘하게 달라서였다.
아무래도 가면에 가려졌던 부분은 상상해서 그렸기에 정확도가 떨어지는 듯했다.
“귀부인들한테 보여주니까, 프리다의 서신을 읽은 대리인하고 비슷하다고 하던데. 그 여자 대체 누구니? 프리다에게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하고.”
“아….”
“너랑 춤도 췄다길래, 너는 아는 사람일까 해서. 혹시 외국인 아가씨니?”
“…저도 모릅니다. 대사가 이 여자를 찾는 이유는 뭡니까?”
테렌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별로 예감이 좋지 않았다.
“왕자비로 삼을 생각인가 봐. 첫눈에 반했다고 하던걸.”
“…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테렌스는 가늘게 떨리는 왼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치솟았다.
‘…감히 누굴 아내로 삼겠다는 거지. 나조차 함부로 청혼하지 못하는데.’
바싹바싹 타는 그의 입술 사이에서 뜨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