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아버지가 곧 신전에 재혼 승인을 요청할 거예요.”
“재혼? 공작부인이 떡하니 있는데 무슨 재혼을 한다는 거지.”
연배가 쉰을 훌쩍 넘은 공작이 재혼을 한다니. 금시초문이었다.
“…제 어머니랑 이혼하고, 첫째 정부랑 재혼하려는 거예요.”
“무슨 이유로.”
“정부의 딸을 적녀로 만들어서, 크세니아 황자한테 시집보낼 작정이거든요.”
공작이 크세니아와 혼맥을 맺으려 한다는 말이었다. 반평생을 함께한 아내를 버리면서까지.
테렌스는 에이바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혼자 생각했다.
크세니아 황자들은 모두 서른 줄을 넘겼다. 그중에 미혼이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 3황자가 최근 이혼했다는 기사를 보긴 했다.
“3황자의 재혼 자리인가.”
“네. 사실 절 시집보내려 했었는데, 제가 완강히 거부했더니 이렇게 됐어요.”
“…공작부인에게는 유감이군.”
“아뇨, 오히려 잘된 일이죠. 어머니로서는 폭언과 손찌검에서 탈출할 기회니까요.”
세간에는 공작이 가신들뿐 아니라 처자식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소문을 친딸이 와서 직접 확인해주고 있었다.
테렌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대뜸 와서 아비의 악행을 고발하는 딸의 의도를, 그는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에이바는 그의 앞에 목걸이 하나를 내밀었다.
보랏빛을 띠는 반투명한 프리즘이 달려 있었다.
“비덴티움이에요. 아버지가 어머니와 저를 폭행하는 장면이 모두 담겼죠.”
비덴티움은 특수 가공된 마력석이었다. 목에 걸고 다니면 착용자의 시야에 보이는 게 그대로 담겨 기록됐다.
그 안에 마법으로 빛을 쏘면, 맞은편 벽에 기록된 영상이 재생됐다. 기록 가능한 시간은 짧으면 1시간, 길면 8시간 정도였다.
“굳이 내게 이걸 건네는 이유가 뭐지.”
“제가 아버지와 같은 편이 아니란 증거예요. 아무튼 집에 다시 들어가서 알아볼 생각이에요. 이 작자가 뒤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테렌스는 공작이 또다시 그녀를 폭행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에이바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제 몸은 제가 건사하겠다고. 술 마셨을 때 눈에 띄지만 않으면 된다고.
“저, 꽤 괜찮은 정보원 같지 않나요?”
“…만약에 공작이 몰락한다고 쳐. 그걸로 공녀가 얻을 게 있나?”
에이바는 야심만만한 미소를 입가에 가득 띄웠다.
“이제야 제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았어요.”
“…흠.”
“전하의 옆자리 필요 없으니까, 공작위를 물려받게 해주세요.”
***
“워, 누구예요? 되게 잘생기긴 했는데…, 뭔가 사람 같지가 않네요.”
발레리는 석실에 배달된 큼지막한 초상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이거 보세요, 황녀님. 이거 사람 눈이 아니라 무슨 고양이 눈 같잖아요.”
그녀는 그림 속 남자의 눈동자를 검지로 가리켰다.
찬란한 금빛 홍채 한가운데 동공이 세로로 기다랗게 찢어져 있었다.
“…글쎄요. 생각보다는 사람 같은데요.”
프리다 또한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며 말했다.
그녀의 오랜 정혼자, 오벨론의 얼굴이었다.
뿔 달린 새빨간 마귀가 아닐까 했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초상화 속에 보이는 인물은 그저 은발과 금안을 지닌 젊은 사내였다.
많아야 서른 언저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이가 팔백이 넘었다는 말이 무색했다. 갈색 피부는 팽팽했고 은은한 광택까지 흘렀다.
평생 안 늙는 마법이라도 부리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할 정도로 젊은 외모였다.
낯선 정혼자의 눈을, 프리다는 가만히 주시했다.
발레리의 말대로였다. 길게 찢어진 동공. 이 부분만큼은 인간 같지 않고 섬뜩한 느낌을 줬다.
무감한 표정에선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따뜻하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어떤 성격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사실 얼굴보다는 몸을 보고 싶었는데….’
곧 검을 들고 상대해야 하는 표적이었다. 얼굴 생김새보다는 신체가 얼마나 단련돼 있는지, 그게 더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새카만 로브로 온몸을 친친 감고 있었다. 조금의 힌트도 줄 수 없다는 것처럼.
확실한 건 적어도 작은 덩치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로브로 둘러싸인 어깨 실루엣은 얼핏 켄드릭만큼이나 커 보였다. 키는 얼마나 큰지 모르겠지만.
“근데 황녀님, 웬 남자 초상화예요? 아는 사람이에요?”
안다고 하기엔 아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모른다고 할 수도 없었다. 매일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의식하고 있는 존재니까.
“…글쎄요.”
황제는 오늘 아침 창가에서 이 그림을 발견하자마자 석실로 내려보냈다.
액자 뒷면에 붙어 있던 작은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얼마 안 가 마주할 얼굴이니 한번 봐 두어라. 네 손으로 끝장내야 할 존재라는 걸 똑똑히 기억하고.」
아비의 친필을 보며, 프리다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안 궁금하다고 했는데, 굳이 보내주셨네. 동기 부여하라는 말씀이겠지.’
잠시 후 프리다는 켄드릭을 석실 안으로 불러들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황녀님.”
“이 초상화, 연무장 벽에 걸어 줄래요?”
“…예? 이 초상화를요? 누군데 말입니까?”
켄드릭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림 속 남자를 바라봤다.
어느 외국의 왕족인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낯선 얼굴이었다.
“…저 정원 그림 왼쪽에다가 걸어 줘요.”
프리다는 켄드릭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연무장 벽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석실 연무장에는 그림 두 점이 나란히 걸리게 됐다.
발레리가 선물한 정원 그림, 그리고 오벨론의 초상화.
두 그림을 번갈아 바라보던 발레리는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황녀님, 저 조금 불쾌한데요.”
“응? 왜요?”
“아무리 잘생겼다 해도 그렇죠, 이 일면식도 없는 남자 얼굴을 제가 드린 그림 선물이랑 동급으로 취급하시는 거잖아요.”
귀여운 질투였다. 프리다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하핫, 무슨 그런 생각을 해요. 당연히 발레리가 준 그림이 훨씬 소중하죠.”
“그럼 저 구석에다 걸지 왜 제 그림 옆에다가 거세요?”
“…그냥, 이 얼굴 보면서 연습하면 더 잘 될 것 같아서요.”
프리다는 허리춤의 검 자루를 꽉 쥐며 발레리에게 웃어 보였다.
‘둘 다 내 목표거든요. 하나는 없애야 할 목표, 하나는 이루고 싶은 목표.’
발레리가 선물한 그림은 프리다가 꿈꾸는 일상이었다.
이른 아침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는 정원.
봄꽃으로 가득한 그곳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홍차 한 모금을 마시고 싶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당연히 여기던 일상이었다.
왜 그땐 햇살과 나무, 꽃이 눈앞에 있는 걸 감사하지 못했을까.
지금은 이렇게도 절실한데.
언젠가 그 일상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도 생겼는데.
“발레리.”
“네, 황녀님.”
“만약에 내가 여행에서 돌아온다면….”
“네.”
“그때도 내 친구 해줄 건가요?”
친구.
프리다를 바라보는 발레리의 눈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친구…, 방금 친구라고 하신 거예요?”
“응, 발레리는 내 스승이지만 친구기도 하잖아요.”
프리다는 선한 눈매를 곱게 휘며 말했다.
친구.
다른 누구도 아닌 프리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발레리는 머리를 소곳이 숙였다.
감히. 감히 내가 황녀님의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불릴 자격은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아직 누군지 모르시니 할 수 있는 발언이겠지.’
“…우리 친구 아니었어요? 나만 그렇게 생각했나 보네.”
발레리가 대답이 없자 프리다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서운한 티를 냈다.
살짝 토라진 황녀에게 발레리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감사합니다, 황녀님.”
***
어느 맑은 가을날 밤.
황태자궁 침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이틀에 한 번 찾아오는 밤손님을 두 팔 벌려 환영하듯이.
발레리는 웃음기를 띠며 벽을 가뿐히 타고 올랐다.
“이제 곧 겨울인데 왜 창문을 열어놓고 그래요. 감기 걸리려고.”
그녀는 방 안으로 발을 디디며 잔소리를 했다.
테렌스는 읽던 책을 덮고 창가로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너 들어오라고 열어두는 거다. 아직 그렇게 춥지도 않고.”
“11월은 감기의 달인 거 모르세요? 전 감기 걸린 사람이랑은 뽀뽀 안 할 건데.”
발레리의 경고에 테렌스는 곧바로 창문을 꽉 닫았다.
그가 앉아 있던 책상엔 기름등이 켜져 있었다.
밤 열한시쯤 오면 그는 대개 책을 읽고 있었다. 기사들과 함께 야간 순찰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테렌스, 뭐 읽고 있었어요?”
“…그냥, 뭐.”
“그 책 읽어줘요. 목소리 듣고 싶어.”
발레리는 그의 말소리를 듣는 걸 좋아했다.
낮고 부드럽고 또렷한 목소리 그 자체도 좋았지만, 책 내용을 알고 싶기도 했다.
요즘 그의 관심사가 뭔지. 무엇을 더 알고 싶어서 책을 읽는 건지.
발레리는 테렌스라는 사람을 좀 더 알고 싶었다.
그에게서 지워져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이 책은 별로 재미없을 건데.”
“흠, 무슨 책이길래 그래요.”
발레리는 책상으로 다가가 책 표지를 들췄다.
지하세계 관련 서적이었다.
‘집무실 서재에도 있던 책이네. 이렇게 보면 켄드릭이랑 관심사가 똑같단 말이야.’
“나 이 주제 괜찮은데. 한번 읽어줘 봐요.”
“…그래.”
발레리는 테이블 의자를 끌어다가 그의 책상 옆에 앉았다.
그녀는 귀를 열고 테렌스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성서는 지하세계 집행관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죽은 중죄인들의 처벌을 도맡고 있다는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상세한 설명이 나와 있었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햇빛을 못 본다니 신기하네요.”
“그래서 낮에는 나오지 않아. 밤에 나올 때도 달빛이 밝은 보름날보단 그믐날을 선호하고. 달빛도 해를 반사해서 나오는 빛이니 싫어하는 듯하다.”
테렌스는 책을 덮으면서 말했다.
마치 그들을 직접 만나보기라도 한 것 같은 말투였다.
“공격하고 마법이 전혀 안 통한다는 건 좀 무서워요. 싸울 수조차 없다는 거잖아요.”
“반대로 그들의 공격과 마법도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은 자들에게만 관여할 수 있게 되어 있어서.”
발레리는 잠시 와이어 숲에서 발생한 실종 사건을 떠올렸다.
“흐음, 숲의 마물이 이 사람들이라면, 실종된 사람들이 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공격하진 못했을 테니까.”
“그럴 거라고 추정하고 있어.”
“…언젠간 실종자들을 구할 수 있을까요? 와이어 숲에 갈 수 있는 길은 이제 없잖아요.”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때가 되면.”
내가 맡은 일은 아니지만.
테렌스는 옅게 웃었다. 어둡고, 조금은 안타까워 보이는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