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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00)화 (100/173)

100화

“황녀님, 갈라반트 대륙에 가시는 걸까요? 거긴 드래곤이 사는 계곡이 있다던데요.”

발레리가 천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요즘 그녀는 검술 수련 중에도 줄곧 프리다의 행선지를 물었다.

“…재밌겠다.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

프리다는 여행과 관련해 발레리에게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았다.

여전히 프리다는 제 여행에 전혀 감흥이 없어 보였다. 다른 주제로 수다를 떨다가도 여행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었다.

“황녀님, 혹시… 여행 때문에 걱정이 많으세요?”

“뭐, 없지는 않죠.”

“혼자 가시는 거 아니잖아요.”

“응, 일행이 있긴 할 거예요.”

당연한 일이었다. 황녀를 끔찍이 아끼는 황제가, 먼 길 떠나는 딸을 혼자 보낼 리 없었다. 아마 기사단을 따로 꾸려서라도 동행시킬 것이다.

무도회에서 서신을 읽은 이후, 발레리는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황녀의 여정을 따라가고 싶다고.

‘하지만 그 시점엔 내 임무가 끝났을 테니까. 내 정체도 알게 된 이후겠지. 그럼 더 이상 황녀님은 날 곁에 두려 하지 않으실 거야.’

발레리는 정말 굳건하고도 막연한 믿음을 품고 있었다.

프리다와 함께 의뢰인 앞에 갔다가, 그녀를 무사히 황궁에 다시 데려다줄 수 있을 거라고.

결코 자신의 임무는 고작 납치로 귀결되지 않을 거라고. 황궁에 무사히 복귀한 황녀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의뢰인의 서신에는 분명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글쎄. 황궁으로 돌아갈지 말지는 황녀의 선택이겠으나, 황녀는 아마 그리하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본인이 잘 알고 있을 테니.」

황궁으로 돌아갈지 말지는 어쨌든 황녀의 선택이라고 했다.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발레리는 황녀를 데리고 황궁으로 돌아오리라 다짐했다.

쿵쿵.

석실 철문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프리다가 종을 울리자 켄드릭이 커다란 상자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켄드릭, 그게 뭐예요?”

“주문하신 드레스입니다. 내일모레 여신 축일에 입으실 옷이라고 전달받았습니다.”

“고마워요.”

프리다는 활짝 웃으며 상자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아주 깊이 심호흡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준비가 돼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 외출이라고 해도, 더 이상의 여한은 없었다.

프리다는 켄드릭이 건넨 상자를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순백색 드레스가 들어 있었다. 주문했던 것과 꼭 같은 디자인이었다.

“…황녀님, 혹시 모레 결혼이라도 하세요?”

발레리가 상자의 내용물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분명 여신 축일에 입을 드레스라고 했다. 황궁 광장에 구름처럼 모여들 백성 앞에서, 프리다는 이 옷을 입고 손을 흔들어줄 것이다.

그런데 이 드레스는 영락없는 혼례복이었다.

“결혼… 모레는 아니지만, 하긴 할 거니까요.”

“…네?”

“모레는 여행 가기 전에,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날이에요. 여느 때보다 특별하게 보이고 싶었어요.”

“음, 그러니까… 이건 좀, 지나치게 특별한 거 아닐까요.”

“하하, 다들 노처녀인 내가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한 번쯤은 보고 싶었을 거예요.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공인으로서 내 의무 중에 하나니까요.”

발레리는 아아, 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도회 때 읽은 황녀의 서신에도 그리 나와 있기는 했다.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나 잘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달라고.

아마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모국인 칼레바니아에서 식을 올리진 않겠다는 얘기 같았다.

그렇게 되면 칼레바니아 백성들은 황녀의 결혼식을 영영 볼 수 없을 것이다.

발레리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기회에 그들에게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황녀의 계획을.

곧이어 보조 집사인 게일이 석실로 또 다른 상자를 날라주었다. 켄드릭이 들고 온 것보단 작은 크기였다.

그 안에는 실크로 감싼 흰색 구두와 함께, 자잘한 다이아몬드가 조밀하게 박힌 티아라가 담겨 있었다.

“발레리, 혹시 입는 것 좀 도와줄래요?”

“네, 그럴게요.”

발레리는 프리다를 따라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프리다는 슈미즈 위에 코르셋을 입었다. 발레리는 그 뒤에 달린 끈을 군화 끈처럼 힘껏 조이다가 멈췄다. 프리다가 ‘제발 숨 쉴 공간은 달라’고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프리다는 거대한 치마 보형물을 착용했다. 커다란 바구니를 뒤집어놓은 것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이름이 크리놀린이라고 했던가. 그 모양은 채플 앞 시계탑 꼭대기에 매달린 종을 연상시켰다.

발레리는 프리다의 지시에 따라 그 위에 페티코트를 걸쳤다.

무슨 옷이 이렇게 입는 단계가 많아. 발레리는 벌써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황녀님, 저한테 왜 이스티아 드레스 입히셨는지 이해가 가요. 저 아마 이런 거대한 치마 입고 무도회 가라고 했으면 싫다고 드러누웠을 거예요.”

“되게 번거롭긴 하죠. 그래도 다 입으면 풍성한 맛이 있어서 예쁘긴 해요.”

얼마간의 씨름 끝에 두 사람은 드레스 착용에 성공했다.

드레스는 정말 세세한 부분까지도 재단사의 정성이 담겨 있었다. 은사로 된 장미 덩굴 모양 레이스 자수와 손가락 한 마디 간격으로 박힌 진주알, 프리다의 체형에 꼭 맞게 설계된 허리선까지.

그 밑으로 풍성하게 퍼지는 치마에는 주름진 공간마다 물이 흐르는 듯한 문양의 레이스가 수 놓였다. 과하지 않은 화려함이 고급스러움을 한층 더했다.

발레리는 프리다의 머리에 티아라를 씌웠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꿇어앉아 신발까지 신겼다.

이제 발레리의 눈앞에 보이는 건 천상에서 온 신부의 모습이었다.

눈부신 황녀를 바라보며 발레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화장기 하나 없는 민얼굴도 드레스에 전혀 눌리지 않았다. 그저 봄처럼 화사하고, 또 한없이 선해 보였다. 성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로. 

“…와, 황녀님. 정말 시에나 여신의 환생 같아요.”

“난 그 칭찬이 제일 듣기 좋더라. 고마워요, 발레리.”

***

시에나 여신의 축일.

프리다는 아침 일찍 일어나 단장을 마쳤다. 발레리의 도움으로 드레스까지 완벽히 착용했다.

벽시계가 열 시를 가리켰다. 이제 곧 나갈 시간이었다. 프리다는 자신을 데리러 온 테렌스의 에스코트에 따라 천천히 나선형 계단을 올랐다.

발레리는 프리다의 뒤에서 드레스 자락을 들고 있었다. 순백색 치마가 계단에 쓸리지 않도록.

이들의 앞뒤로는 석실 문 앞을 지키던 서른 명의 문지기들이 두 조로 나뉘어 붙었다.

“작년에 이 계단 오를 때는 숨차서 몇 번을 쉬었는데…. 지금은 정말 거뜬하네요. 체력이 붙은 게 실감 나요. 고마워요, 발레리.”

“아하하, 황녀님께서 운동을 열심히 하신 덕이죠.”

프리다의 공치사에 발레리는 멋쩍게 웃었다.

그걸 듣는 테렌스의 입꼬리도 조용히 올라갔다.

채플 밖은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한 아침이었다.

프리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후원에 발을 디뎠다.

그녀는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일 년 만에 맡아 보는 바깥공기를 최대한으로 머금고 싶었다.

‘이런 풀 내음… 정말 오랜만이네.’

발레리 덕에 석실에 들이기 시작한 꽃 화분도 충분히 향긋했지만, 이렇게 물씬 풍기는 자연의 향기를 접하는 건 감회가 다른 일이었다.

발레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채플 주변에 인적은 하나도 없었다. 프리다 일행과 문지기들 이외에는.

황녀가 밖으로 나오는 동안 황제가 경내 통행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주변에 있는 다른 건물을 보니 창문이 전부 막혀 있었다.

철통 보안이 만들어 낸 고요한 아침의 풍경이었다.

살랑거리는 아침 바람이 발레리의 귓가를 간질였다.

9월의 마지막 날. 새털구름 한 조각 없는 가을 하늘이 장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콕 찍으면 파란색 물감이 묻어날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동쪽에서는 태양이 햇살을 눈부시게 퍼부었다.

시에나 여신이 황궁에 직접 강림한다는 날답게,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상서로운 기운이 내려오고 있었다.

하늘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발레리는 문득 이상한 걸 발견했다.

“뭐지… 왜 아침에도 별이 떠 있을까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분명 아침 해가 쨍쨍한데 하늘에 별 같은 게 콕콕 박혀 있었다. 얼마나 밝은 별이길래 해가 떠 있는데도 저렇게 빛날까.

“아, 별 가루 뿌린 것 같죠? 시에나 여신의 가호예요. 황궁 안에서만 보이는 거예요.”

프리다는 뒤돌아 발레리를 쳐다보며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너는 처음 보는 거겠구나. 작년에는 이곳에 없었으니.”

테렌스가 다정한 목소리로 발레리에게 말을 건넸다.

“아, 네….”

그와 잠시 눈을 맞추던 발레리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왜 저런 다정한 투로 말하는 거야. 여기 듣는 귀가 몇 갠데.

이러다 티 나는 거 아닐까. 그녀의 두 뺨이 살짝 붉어졌다.

연애가 처음인 발레리는 평소보다 자의식이 부풀어 있었다. 둘 사이의 기류가 왠지 공기 중으로 새어나갈 것 같아 불안했다.

물론 프리다는 둘 사이의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테렌스가 기본적으로 다정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레리, 계단 올라오는 거 도와줘서 고마워요. 좀 쉬고 있다가, 이따가 광장에 나와요.”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발레리는 그들과 함께 떠나는 켄드릭에게도 눈인사를 건넸다. 오늘 하루 고생 많을 텐데 잘 다녀오라고. 켄드릭은 살짝 왼손을 들어 화답했다.

프리다와 테렌스는 발레리를 뒤로한 채 중앙궁 방향으로 향했다. 그들을 둘러싼 문지기들은 각자의 검과 지팡이를 들고 경계태세를 취했다.

중앙궁에 거의 다다랐을 때, 황제가 대기시켜 둔 정예 기사들이 대열에 합류했다.

열을 맞춰 걷던 기사들의 동작이 다소 흐트러졌다. 그들 중 일부가 프리다의 드레스 차림을 보고 넋을 잃었기 때문이다.

테렌스는 그들을 서늘하게 응시하며 냉정하게 경고했다.

“…제군들, 그만 쳐다보고 본분을 다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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