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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99)화 (99/173)

99화

“황녀님께서 검술 수련하시는 이유는 이제 알았지만…. 여전히 궁금한 건 있어요.”

“뭔데요?”

“굳이 이렇게 숨어 계시는 이유요. 강해지려고 노력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잖아요.”

발레리가 검을 허리춤에 꽂으며 질문했다. 프리다의 은둔 사유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내가 강해지는 걸 몰랐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냥 유유자적하면서 해외여행 다니려는 황녀로 보이고 싶었어요.”

프리다는 웃는 얼굴 속에 진실을 꼭꼭 감추었다.

자신의 수련 사실을 몰랐으면 하는 사람들. 굳이 말하자면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흠, 강해지는 게 뭐 어때서요? 시비 거는 사람들 다 나오라고 하세요. 제가 가만 안 둘 거니까요.”

“하하, 그러지 않아도 돼요. 여기 생활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프리다는 눈꼬리를 휘면서 연무장 바닥에 놓아둔 수통을 집어 들었다.

마른 목을 축이던 프리다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내가 이렇게 수련하고 있다는 걸 알면 가만히 안 있겠지. 그자들은 내가 병약해서 요양하는 줄로만 알고 있으니까.’

문득 프리다는 5년 전, 스무 살 생일날 밤을 상기했다.

***

달빛 한 줄기 없이 칠흑처럼 어두운 그믐날 밤이었다.

황궁 전체에 엄청난 마기가 들이닥쳤다. 곳곳을 밝히던 모든 불빛이 가느다란 연기만 남기고 꺼졌다. 남쪽에서부터 시커먼 어둠이 토혈처럼 번져갔다.

암흑에 완전히 삼켜진 황궁에서, 육안으로 형체를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눈을 떠도 감느니만 못했다.

그 시각 프리다는 밤새 지독한 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종일 아파 제 탄신 연회에도 얼굴을 들이밀지 못했다. 식은땀으로 침대보를 적시며 바르작바르작 뒤척일 뿐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시계가 자정을 가리켰다.

그녀가 자고 있던 라벤더궁 침실 창문으로 검은 인영이 들이닥쳤다. 로브를 눌러쓴 사내, 아니 사내처럼 보이는 어떤 존재였다.

그는 프리다의 침대 곁에 꿇어앉아 예를 표했다.

─프리다 님, 젤론입니다. 계약 이행을 위해 데리러 왔습니다. 엘로이스의 보검은 어디에 있습니까?

귀에 꽂히는 기괴한 목소리에 프리다는 힘겹게 눈을 떴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어둠뿐이었다.

─…누구세요? 보검…이라뇨?

프리다는 끊어질 듯 희미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정체를 물었다.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황제였다.

혼자가 아니었다. 이미 누군가가 찾아올 줄 알았다는 듯, 사제 하나와 황궁 마법사 다섯을 대동한 채였다. 마법사들은 모두 지팡이 끝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황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물거렸다. 바싹 마른 입술이 공포에 파랗게 질려갔다.

젤론이라는 남자는 여전히 어둠 속에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지팡이의 불빛도 그의 얼굴을 밝혀내지 못했다. 이목구비라는 게 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지… 진짜로 직접 찾아오다니….

황제는 오금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마법사들은 남자가 내뿜는 마기에 일찍이 압도당했다. 손에 들린 지팡이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 끄트머리의 불빛이 위태롭게 깜빡거렸다.

젤론은 바닥을 딛고 천천히 일어섰다. 황제보다 키가 두 뼘은 더 컸다. 그의 전신을 감싼 로브는 땅에 닿을 만큼 길었다.

—첫 황녀가 성년이 되면 숲 심장부로 보내라 했을 텐데. 자정이 되도록 보내질 않으니 모시러 왔을 뿐이다. 그나저나, 결혼 예물은 어디에 두었지? 이분은 모르는 것 같군.

황제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는 진땀으로 젖은 손을 번쩍 들었다.

무언의 축객령이었다. 사제와 마법사들은 곧바로 밖으로 물러갔다.

‘이 이야기는 더 새어나가선 안 돼.’

황제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등으로 방문을 눌러 닫았다.

마법사들의 지팡이가 사라진 침실은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눈앞이 캄캄해진 황제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벌렸다. 자신이 어디를 바라보는지도 모르는 채.

—자, 자네가 마왕 오벨론이오?

─마왕? 너희 인간들은 아직도 그런 이상한 호칭을 쓰는군. 나는 3등 집행관 젤론이다.

─내, 내 딸은 몸이 아파서, 그쪽에 보낼 수 없다고 서신을 보냈을 텐데….

─우리가 인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거라고 생각했나? 죽은 놈들도 심판대에서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데, 산 놈들은 오죽할까.

황제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확인해 보시오. 애가 얼마나 야위고 맥이 없는지. 제 몸 하나 못 가누는 아이를 어찌 혼인을 시킨단 말이오.

젤론은 그제야 프리다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어둠 속에서도 그에겐 보였다.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고, 핏기 없이 파르무레한 얼굴에선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흠,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는군.

황제는 안도감에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죄책감이 어깨를 짓눌러 왔다. 프리다가 생일날 아침부터 몸져누운 건 아비인 황제가 꾸민 일이었다.

어젯밤 딸이 마시는 생강차에 약을 탔다. 목숨에 지장이 없을 정도까지만 열이 오르도록.

‘미안하다, 딸아. 눈속임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

─그, 그러니까, 말미를 주시오.

─말미? 이미 지상의 시간은 꽤 흘렀을 텐데. 네 백성들을 더 묶어놔도 된다는 것인가?

─내 딸은 요양이 필요하오. 이 몸 상태로는 절대, 절대 결혼을 시킬 수 없소. 회복, 회복하려면 족히….

프리다가 들은 내용은 거기까지였다.

열이 또다시 끓어올라 정신을 완전히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며칠이나 흘렀을까. 사경을 헤매던 프리다는 이마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에 눈을 떴다.

창문 하나 없는 낯선 침실에서, 그녀는 아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이마에 떨어지는 건 황제의 눈물이었다.

주변은 어수선했다. 이름 모를 기사들이 막 가구를 들여오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반쯤 풀린 프리다의 사파이어 빛 눈동자가 소리 없이 굴렀다.

이곳은 지하 석실이었다.

아주 오래전, 프리다의 고조부인 던컨 황제가 채플 지하에 마련해둔 성소였다. 감히 어둠의 존재들이 들여다볼 수 없도록 만든 공간이라고 했다.

황제는 딸의 창백한 뺨을 쓸어내렸다.

—미안하다, 프리다.

—네…? 아버지, 그게 무슨….

—네겐… 정혼자가 있다.

—정혼자? 그게 누군데요…?

마왕.

프리다, 넌 마왕비가 되어야 한다.

120년 전부터 내려오는 빌어먹을 계약이란다. 하필이면 네가, 네가, 그때 이후 처음으로 태어난 황녀란다.

황제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바짝 들려왔다.

프리다는 깨질 듯한 두통에 휩싸였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아비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다.

당시 황제였던 던컨은 지하세계 최고 집행관인 마왕 오벨론과 거래를 했다.

칼레바니아는 북부로 기습 침공해 온 크세니아로 인해 수세에 몰려 있었다.

크세니아의 마법사들은 화력이 막강했다. 칼레바니아는 우세한 병력만으로 그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마력석이 절실했다. 마력엔 마력으로 대응해야 했다.

비탄에 잠긴 던컨 황제에게, 오벨론은 서신을 보내 먼저 거래를 제의했다.

와이어 숲을 둘러싼 암흑의 땅을 내주겠다고. 이곳엔 네가 원하는 마력석이 한가득 묻혀 있다고.

대신에 향후 가장 먼저 태어나는 황녀를 반려로 달라고.

결혼 예물까지 요구했다. 시에나 여신의 가호가 깃든, 건국 시조 엘로이스의 보검이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고조부? 마왕? 보검? 대체 무슨 말일까.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온 프리다는 황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래도 4년의 말미를 받았어. 하지만 그자들을 어찌 믿겠니. 저번처럼 어둠이 덮치면, 언제 침입해 너를 데려갈지 모른다. 그렇게 허망하게 널 보낼 순 없단다. 남은 시간 동안 여기서 안전하게 지내야 해.

꼼짝없이 4년을 갇혀 살란 말이었다.

결국 프리다는 만인의 연인이던 과거를 뒤로한 채, 지하 깊은 공간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가족 외엔 그녀의 곁에 아무도 없었다.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지금 무슨 계절을 지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외출은 너무 짧았다. 

모든 감각이 무뎌졌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갔다.

약속된 시한은 점점 다가왔다.

그동안 황제 부부는 오벨론과의 계약을 파기할 방법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신전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며 매일같이 손수 제물을 올렸다.

일주일에도 수차례씩 대신관을 불러 시에나 여신의 신탁을 받아 달라고 눈물로 읍소했다.

그 정성에 감복했는지, 시에나 여신은 묵묵부답 끝에 신탁을 내렸다.

4년의 말미가 거의 다 지나고 약속의 날이 임박할 즈음이었다. 신탁을 가지고 온 사람은 이스티아 출신 여성 사제 셀레스틴이었다.

여신은 셀레스틴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엘로이스의 보검을 들어 오벨론의 목을 쳐낼 자가 이미 황실에 태어났다고.

셀레스틴은 눈을 번쩍 뜨더니 엄숙한 목소리로 예언했다.

─좀 더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그동안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마침내 4년이 차고 약속의 날이 도래했다.

또다시 황궁에 어둠이 덮쳤다.

라벤더궁에서 프리다를 찾지 못한 젤론은 이번엔 황제의 침실로 찾아왔다.

황제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딸의 몸이 여전히 아프다며. 조금만 더 시간을 줄 수 없겠느냐며.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 이번에도 어긴다면 칼레바니아는 건국 전처럼 암흑의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계약서에 쓰여 있듯 말이지.

셀레스틴의 예언대로 젤론은 시간을 주었다.

그렇게 받은 최종 기한은 내년 3월 31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시간은 반년.

프리다의 마지막 외출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시에나 여신의 축일.

여신이 황궁을 직접 보호하기에, 어둠의 존재가 황궁에 접근할 수 없는 날이었다.

비록 황궁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지만, 프리다가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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