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발레리는 차디찬 새벽이슬을 맞으며 채플 후문으로 들어왔다.
처음부터 너무 무리한 걸까. 전신이 노곤하고 허리가 뻐근했다. 그녀는 요추 부근을 주먹으로 툭툭 두들기며 힘없이 복도를 걸었다.
마침내 다다른 방문 앞에는 웬 거대한 남자가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켄드릭?”
“발레리, 나한테 할 말 없어?”
켄드릭의 눈은 퀭했다. 밤새 한잠도 못 잔 얼굴이었다.
“아…!”
발레리의 속으로 질겁했다.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떡하지, 날 계속 찾아 헤맸으려나. 때늦은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켄드릭은 핏발 선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녀의 행색을 훑었다. 어제의 그 드레스 차림이 아니었다. 꽤 고급스러운 남자 셔츠를 걸쳤다. 한 단 접혀있는 바지도 본인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지난밤 그녀는 이 옷의 주인과 함께였을 것이다. 복도를 걸어오는 내내 어기적거리는 자세도 이상했다. 결정적인 건 목에 두른 손수건이었다. 모든 정황이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른 남자와의 관계.
켄드릭은 쓰디쓴 배반감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지난밤 발레리와 함께 사라진 사람이 황태자라는 것을.
어젯밤 발레리가 무도회장을 나간 직후.
켄드릭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뒤따랐다. 에이바 볼드윈 공녀가 만찬을 함께하자 했으나 거부했다. 발레리의 파리한 안색이 자꾸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그는 로비로 뛰어나가 사람들에게 발레리의 행방을 물었다.
─실례합니다만, 크림색 드레스 입은 키 큰 흑발 여자 혹시 보셨습니까? 황녀 전하의 대리인으로 나왔던.
─아, 저어기 저 문으로 들어가던데요.
한 남자가 저 멀리 로비의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누가 보면 창고나 화장실인 줄 알 것 같은, 전혀 눈에 띄지 않는 문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앞을 레이븐이 지키고 있었다. 켄드릭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마법사님.
─음, 낯이 좀 익은데… 누구신지?
가면을 쓴 터라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켄드릭 프레이저입니다. 혹시 발레리가 이 문으로 들어갔습니까?
─아아….
레이븐은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즉답을 피했다. 켄드릭은 그의 존재만으로 확신했다. 저 너머에는 황태자도 있을 테다.
─마법사님, 제가 들어가면 안 되겠습니까?
─하하, 곤란하네요. 아마 오늘은 그냥 다른 분들이랑 어울리시는 게 나을 거예요.
그의 조언을 무시하고 켄드릭은 허겁지겁 18번 발코니로 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빼도 옆 발코니가 보이지 않았다. 발레리가 있는 17번 발코니는 양쪽으로 나무가 우거진 사각지대였다.
켄드릭은 결국 중앙궁 별관 밖으로 빠져나왔다.
17번 발코니를 볼 수 있는 건 난초 정원 뒤편의 후미진 공간이었다.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에서 만난 건가. 마음이 심란해졌다.
드디어 17번 발코니가 시야에 잡혔다. 켄드릭은 일순 소금 기둥처럼 굳어 버렸다.
흰 가면을 쓴 남자가 발레리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황태자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태자의 목에 발레리의 두 팔이 감겼다. 둘의 키스는 빠른 속도로 무르익었다.
켄드릭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굳게 다문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는 그대로 뒤돌아 기사단 숙소로 향했다. 방으로 돌아간 그는 책상에 놓인 럼주를 병째 들이켰다. 얼마 전 발레리에게서 빼앗아온 술이었다.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켄드릭은 악몽 같은 기억을 떨쳐내며 눈을 번쩍 떴다.
지금 발레리는 쭈뼛거리며 입술을 깨물고 있다. 자세히 보니 입술도 퉁퉁 부었다. 밤새 저 입술을 누가 물고 빨았는지 상상하니 관자놀이가 터질 것 같이 아팠다.
“말없이 사라져서 미안해. 내가 속도 안 좋고 그래서….”
“속이 안 좋아서, 그 사람이랑 있었어?”
“하,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일단 들어와.”
발레리는 주위를 둘러보며 방문을 땄다. 그녀는 켄드릭의 손목을 잡아끌고 방 안으로 들였다. 누구 얘기가 나올지 빤히 보이는데 복도에서 떠들 순 없었다.
“미안해. 나 없어진 줄 알고 많이 놀랐지.”
“…왜 거짓말했어.”
“무슨 거짓말?”
“너 술 취해서 나한테 키스한 거. 황태자인 줄 알고 그랬던 거잖아.”
“…….”
“이젠 부정도 않네.”
켄드릭은 그녀를 비아냥스레 내려다봤다. 발레리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발레리, 이제 보니 야망가는 내가 아니라 너였어.”
“무슨 소리야, 또.”
“내가 고향 내려 가잘 땐 싫다더니. 황태자비 자리가 탐났어?”
“뭔 개소리야.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그럼 황태자랑 왜 잤는데?”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발레리는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했다.
‘아오… 잔 걸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서.’
명백히 벌어진 일을 없었다고 잡아떼긴 힘들었다. 그렇다고 황태자와의 교제 사실을 알릴 순 없었다.
차라리 좀 문란한 여자가 되고 말지.
“그냥, 그냥 실수로 하룻밤 보낸 거야. 별 사이 아니야.”
“실수? 하, 넌 실수가 그렇게 쉬워? 너는, 너는 별 사이 아닌 사람이랑 그런 게 돼? 하… 내 속은 속도 아니야?”
“…야. 어제 증발한 건 미안한데, 이 일은 네가 화낼 게 아니잖아. 내가 누구랑 자든 내가 알아서….”
“너, 진짜 나쁘다.”
켄드릭은 발레리의 말허리를 끊어냈다.
깊은 책망이 서린 그의 녹안에 투명한 물기가 들어찼다.
발레리는 그와 눈을 맞추지 않으려 완강히 버텼다. 남자의 눈물을 이틀 연속으로 보고 싶진 않았다.
켄드릭은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가 최근 쏟아내기 시작한 말은 여전히 듣기 버거웠다. 이미 과거의 짝사랑으로 남은 그에겐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문을 등지고 선 발레리는 깊이 한숨지었다. 켄드릭과의 관계는 이제 엇갈릴 대로 엇갈렸다. 친구 관계를 이전처럼 지속할 수나 있을까.
“…넌 대체 왜 이제 와서 그래. 사람 마음 착잡해지게.”
***
“발레리, 정말 고생 많았어요.”
프리다는 막 출근한 발레리를 깊이 끌어안았다. 무도회에서 대리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목에 손수건은 뭐예요?”
“아, 날이 좀 쌀쌀해서요. 하하.”
발레리는 날씨 핑계를 대며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다행히 프리다는 손수건에 큰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빠랑 춤췄다면서요? 인상착의만 전해 들었는데 딱 발레리더라고요.”
“흐어…? 어떻게 아셨어요?”
발레리의 얼굴이 초지장처럼 질렸다.
“루퍼트한테 들었어요. 어제 비번이었던 문지기 몇 명이 다녀왔다고 하더라고요. 가십성 기사는 안 날 테니 걱정 마요. 각 언론사에 대리인 신상보호 지침 걸어놨거든요.”
“…아, 감사합니다.”
“얼마간 뒷얘기는 있겠지만, 어차피 발레리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니 금방 잊힐 거예요.”
“네….”
프리다는 그녀를 토닥이며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발레리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었다. 구면인 걸 알고 다가온 볼드윈 공작이 떠오른 탓이다.
‘엄밀히 말하면 아무도 모르는 건 아니지. 그놈이 닥치고 있어야 할 텐데….’
발레리는 약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프리다에게 이렇게 물었다.
“…황녀님, 근데 궁금한 게 있어요. 그 ‘한 사람’이 누구예요? 서신에 나왔던.”
—그러다 한 사람을 만났어요. 나를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응원해 준. 그 사람 덕분에 많이 강해졌고, 큰 용기를 얻었어요.
“발레리,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네.”
“…당연히 발레리인데. 날 믿어주고, 기다려 주고, 응원해 줬잖아요.”
“제가요?”
얼떨떨해하는 발레리를 향해, 프리다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발레리는 열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내가 이렇게 신임 받을 자격이나 있을까.
아직까지 정체도 숨기고 있는데.
“…구, 굳이 저를 대리인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뭐예요?”
“외부 사람을 통하면 중간에 내용이 유출될까 봐요. 사실 아버지 어머니께서 내용을 미리 알았으면, 발표 못 하게 하셨을 수도 있거든요.”
워낙 파격적인 내용이긴 했다. 제국에 유일한 황녀가 뜬금없이 나라를 뜬다는 말이니까. 현장에서 발표를 들은 무도회 참석자들도 놀라서 말을 잃을 정도였다.
발표 내용을 무도회가 끝난 뒤에야 전해 들은 황제 부부는 다행히 그냥 넘어가 주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폭로한 것도 아니었고, 프리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여지도 남겨 두었으니까.
“나 문지기들을 완전히 믿지는 않아요. 내가 서신을 주면 아버지한테 쪼르르 가서 내용을 일러바칠 사람들이라.”
“켄드릭은 안 그럴 텐데요.”
“…켄드릭은 가면 써도 누군지 티 나잖아요. 내 대리인 시켰다간 괜히 나랑 스캔들 날걸요.”
“아하….”
내가 제일 나은 선택지긴 했겠구나. 발레리는 이제야 프리다의 결정에 수긍했다.
***
발레리는 며칠 새 검술 수련 강도를 훌쩍 높였다.
프리다를 용사로 만들기 위해선 좀 더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행 중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올 수도 있었다.
프리다는 충분히 잘하고 있었다. 다만 그 ‘충분한’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게 발레리의 결론이었다.
‘순발력과 점프력을 더 높여 드려야 해. 나도 정신 차리고 열심히 수련하자. 황녀님을 지키려면 나도 강해져야 하니까.’
발레리가 거세게 몰아붙인 덕에 프리다는 오후 세 시부터 지쳐 나가떨어졌다.
방어 태세를 최대한으로 높인 발레리에게 급습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발레리, 요즘 너무 혹독한 거 아니에요? 틈이 하나도 안 보여요.”
발재간이 많이 늘었다고 자부하는 프리다였지만, 여전히 발레리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황녀님, 왜소한 체격을 극복하려면 자세를 좀 더 낮추셔야 해요. 런지 동작을 더 길게, 낮게 깔면서 해 보세요.”
“휴, 노력할게요.”
“네. 용사가 되시면 저보다 강한 적들을 꽤 마주치실 텐데, 더 분발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야겠어요… 내 목표가 실력에 비해 좀 크긴 하죠?”
프리다는 씁쓸히 미소 지으며 물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눈매가 테렌스와 너무 비슷해서 발레리는 잠시 멍해졌다.
“…아, 아뇨. 딱 좋은 목표예요. 자유로운 여행을 위해 강해지려고 하시는 거잖아요.”
“자유라… 과연 자유라는 게 있을지 모르겠네.”
프리다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발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행을 앞두고 있다는 프리다는 전혀 기대가 없어 보였다. 들뜨기는커녕 냉소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과연 여행을 가고 싶으신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가장 큰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대체 왜,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 석실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