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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97)화 (97/173)

97화

“그러니까 빨리 약속해요. 그래야 원하는 말 해줄 거니까.”

“…왜 이러는 거야.”

“내 고백 안 듣고 싶어요?”

테렌스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미래가 막연하니 내다보지 말자는 것까진 이해가 갔다. 문제는 마지막 조건이었다. 헤어질 때 붙잡을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거니까.

“하아….”

테렌스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하지만 아예 못 받아들일 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녀와 시작할 수만 있다면.

‘…그래, 네 입에서 헤어지잔 말 절대 안 나오게 해 주겠다.’

“알겠다. 약속하지.”

테렌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리는 그의 양쪽 뺨을 고이 쓰다듬었다.

‘자, 이제부터 지워질 기억이에요.’

“나도 좋아해, 테렌스.”

테렌스의 이마에 그녀의 입술이 지그시 붙었다가 떨어졌다.

그는 얼얼한 표정으로 두 눈을 슴벅거렸다. 귀도 멍멍했다. 머릿속에 커다란 축포가 터진 기분이었다.

고백보다도 그녀가 이름으로 불러주었다는 사실이 심장을 움켜쥐고 마구 흔들었다.

발레리는 얼이 빠져있는 테렌스의 손을 잡고 눈꼬리를 접었다.

“…가요.”

“어딜?”

“몸과 마음 다 준다면서요.”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코니 난간을 뛰어넘었다.

테렌스는 발레리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황태자궁 방향으로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잉? 채플은 이쪽 아닌데요?”

“내 침실로 가는 거야.”

“거기 보는 눈 많잖아요!”

“…내가 거기 주인인데, 비밀 통로 하나 모를까 봐?”

테렌스가 느른하게 웃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백금발이 달빛 아래 묘하게 빛났다.

***

“일단 벗을게요.”

발레리가 침실 문턱을 넘자마자 꺼낸 말이었다.

“…벌써?”

“가발 말한 건데 뭘 그리 놀라세요. 마귀가 끼었나.”

처음 써보는 긴 머리 가발은 거추장스럽고 무거웠다. 벗으니 살 것 같았다. 뻣뻣했던 목 근육이 이제야 풀리는 듯했다.

둘은 조금 전 황태자궁 마구간 통로를 이용해 건물에 진입했다. 테렌스는 건물 주인답게 몰래 드나드는 법을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테렌스는 찻주전자가 놓인 테이블로 향했다. 그는 품에서 꺼낸 흰 손수건에 미지근한 녹차를 흠뻑 부었다.

그렇게 적신 손수건으로 발레리의 화장을 살살 닦아주었다. 옅은 분가루가 묻어났다. 입술에선 별로 묻어나는 게 없었다. 발코니에서 나눈 키스가 꽤 진했던 탓이다.

“화장은 왜 지워요?”

“맛이 없을 것 같아서.”

“얼굴 다 빨아먹을 생각이에요?”

“…민얼굴이 좋아서 그래.”

“보는 눈이 있으시네.”

발레리는 테렌스의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두 입술이 끈적하게 맞닿았다. 그녀는 테렌스의 허리를 끌어안고 침대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캐노피 커튼이 젖혀지자마자 발레리의 등이 폭신한 침대에 닿았다.

그 위에 엎드린 테렌스는 두 팔꿈치 사이에 그녀를 가뒀다.

다시 입술이 포개졌다. 그는 발레리의 잇새를 거칠게 가르고 들어왔다. 막상 진입하고 나서는 부드럽게 움직였다. 발레리는 테렌스의 넓은 등판을 쓸며 재촉했다. 그제서야 템포가 조금씩 올라갔다.

숨 가쁜 입맞춤이 오랫동안 지속됐다. 발레리는 잠시 입술을 떼고 그를 바라봤다. 하늘색 눈이 살짝 탁하게 풀려 있었다.

“저기, 전하.”

“…테렌스.”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요구였다.

“테렌스, 저 이 다음부턴 잘 몰라요. 괜찮겠죠?”

그녀는 이쪽으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다음 단계는 정말 어렴풋이만 알고 있었다.

“…네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할게.”

“끝까지 안 할 거면 오지도 않았는데요.”

그녀의 도발에 테렌스는 픽 웃으며 침대 밑으로 왼손을 뻗었다. 푸른색 약병이 하나 나왔다.

테렌스는 그 뚜껑을 열고 한 모금을 삼켰다. 그리고 한 모금을 더 머금은 뒤 발레리의 잇새로 흘려보냈다.

“으, 써… 이거 뭐예요.”

“속도위반 방지 장치.”

그가 혹시 몰라 한 달 전쯤 구비해 둔 약품이었다.

“…그래서 이 방에 오자고 했구나.”

“그런 것도 있고. 침대는 넓은 게 좋지 않겠나?”

“뭐, 운동장은 클수록 좋죠.”

발레리는 테렌스에게 쪽, 쪽, 입 맞추며 이미 흘러내린 제 어깨끈을 쓱 내렸다. 한 겹짜리 실크 드레스가 단번에 발끝으로 빠져나갔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봐요. 좋으면 좋다고 할게요.”

테렌스는 신호 없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발레리의 목덜미를 적시는 동안, 그의 제복도 하나둘씩 침대 밖으로 던져졌다.

침대 위의 발레리는 부끄러워하는 법을 몰랐다. 운동으로 철저히 다져진 몸이 아름답다고 자부했다. 그녀가 숨기고 싶은 부분은 아무 데도 없었다.

덕분에 테렌스는 발레리를 거침없이 배울 수 있었다. 혀끝이 어디에 닿든, 손끝이 어디를 문지르든,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충실히 반응했다.

“…내가 무슨 아이스크림이에요?”

“그보다 훨씬 달아.”

얼마 지나지 않아 발레리는 완전히 녹아 흐물흐물해졌다. 그녀는 가쁜 숨을 벌떡대며 그를 채근했다. 하지만 그가 모든 걸 드러낸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허어…?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럼 다음에 하지.”

“…시도는 해 봐야죠.”

테렌스는 살짝 겁먹은 그녀를 유리 다루듯 조심스레 안았다. 발레리는 입술을 깨물며 이물감을 참았다. 빠듯하게 들어찬 감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쾌감으로 전이됐다.

이건 미친 짓이었다. 너무 야했다. 발레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성을 놔버린 테렌스의 눈빛과 몸짓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그와 박자를 맞춰갈수록 새롭고 짜릿한 감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묵직한 뻐근함은 덤이었다.

격정적인 순간이 한참을 이어졌다. 문득 발레리는 몸 안에서 샴페인 기포가 터지는 듯한 느낌에 진저리를 쳤다. 처음으로 맞이한 정점이었다. 테렌스는 그녀를 빈틈없이 밀착해 안았다.

두 사람은 환희에 찬 탄성을 삼키며 농밀한 입맞춤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모로 누워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다들 이래서 하는 거구나….”

“좋았다는 걸로 해석해도 되나?”

“안 좋아 보였어요? 눈 까뒤집을 뻔했는데….”

테렌스는 왼손으로 침대보를 쓸며 싱긋 웃었다. 그녀의 흔적이 가득했다.

“발레리, 이제 나는 네 남자다.”

“…벌써 나한테 본인 소유권 넘기는 거예요?”

“벌써라고 하면 섭섭한데.”

테렌스가 입술을 또다시 덮쳐왔다. 발레리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뒤로 뺐다.

“감이 좀 오는데요. 이제 제가 하고 싶은 거 해도 돼요?”

“…얼마든지.”

“손도 불편한데 가만히 있어 봐요.”

발레리가 제안한 방식으로 둘은 또 한 차례 합을 맞췄다.

마침내 두 번째 폭죽이 터졌을 때, 테렌스는 감탄사를 금할 수 없었다.

“발레리, 넌 천재인 것 같다.”

“…전하야말로 처음이라곤 안 믿기는데요.”

“나는 공부를 해서 그런 거지만 넌….”

“저 운동 잘하잖아요. 해보니까 그거랑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아서.”

밤이 깊어지는 내내, 두 사람은 서로의 감각을 수차례 지배했다.

새벽이 조금씩 밝았다. 발레리는 먼저 잠든 테렌스의 얼굴을 살살 쓰다듬었다.

‘미안해요. 오늘 기억은 잘 간직할게요.’

***

창밖이 뿌옇게 밝아왔다.

테렌스는 셔츠에 오른팔을 조심스레 끼워 넣었다.

옷을 갈아입는 건 아침저녁으로 그를 괴롭히는 일과였다. 불가피하게 오른손을 써야 하니까.

그래도 오늘만큼은 날카로운 통증마저 가볍게 지나칠 수 있었다.

처음이었다. 혼자가 아닌 아침은.

테렌스는 침대 쪽을 바라봤다.

발레리가 이불을 몸에 휘감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새근거리는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아직 그녀는 한밤중이었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그녀를 보며, 테렌스는 입꼬리에 보조개를 가득 머금었다.

‘피곤하겠지…. 나보다 훨씬 많이 움직였으니.’

테렌스는 조용히 자책했다. 오른손이 불편하다는 건 생각보다 한계가 컸다. 그걸 잘 아는 발레리는 지난밤 최대한 그의 편의를 배려했다. 결과적으로 체력을 훨씬 많이 소모했다.

미안한 마음에 웃음기가 살짝 가셨다. 그녀가 주는 쾌락을 받아먹기만 했던 것 같아서.

하지만 그녀를 언제까지고 여기서 재울 순 없었다.

늦기 전에 깨워야 한다. 문을 나서면 가장 먼저 출근한 하인이 침대보를 갈러 들어온다. 그전에 안전히 내보내야 할 터다.

테렌스는 침대맡에 앉았다. 그는 발레리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그녀의 반질반질한 뺨에 입술을 대고 꾸욱 눌렀다. 볼살이 움푹 들어갈 때까지.

발레리의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조금씩 틈새를 보였다.

“으음… 몇 시예요?”

“여섯 시 사십 분.”

“…뭐야, 왜 벌써 옷 입었어요?”

발레리가 게슴츠레한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테렌스는 왼손을 뻗어 그녀의 눈곱을 떼었다.

정리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도 그저 예쁘기만 했다. 매일 아침 이 얼굴을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테렌스는 아쉬운 듯 미소하며 그녀의 뺨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곧 나가야 해. 건국제 기간이라 밤까지 계속 외부 일정이 있어서.”

“몇 분 있다가 나갈 건데요?”

“이십 분.”

“그 정도면 충분하죠. 상의는 안 벗길 테니까 이리 누워요.”

발레리는 어젯밤의 연장전을 제안했다. 그녀는 아침 댓바람부터 땀을 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테렌스는 또다시 뜨겁고 질척한 열락의 늪에 갇혔다.

막바지에는 서로의 이름이 탄성처럼 오갔다.

연장전이 끝나고, 발레리는 약속대로 테렌스의 옷을 원상복구했다.

아 맞다, 나도 나가야 하는데. 이제야 그녀는 자신이 탈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저 옷 좀 빌려주실래요? 드레스 입고 나갈 순 없을 것 같아서.”

테렌스는 바로 옷가지를 가져다주었다. 발레리는 그가 건넨 셔츠를 걸치고 단추를 잠그며 창가로 걸어가 바깥을 내다봤다. 그녀는 씩 웃었다. 생각보다 안 높은데?

“그럼 이만 갈게요.”

“…왜 창가에서 작별 인사를 하지?”

“이 정도 높이면 뛰어내려도 안 다쳐요.”

“잠깐, 잠깐만.”

발레리가 창문을 확 열어젖히자, 테렌스는 다급하게 그녀를 멈춰 세웠다. 그는 품에서 새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손수건은 왜요?”

“…목에 두르고 가.”

발레리는 그에게서 손수건을 받아들고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세상에….”

목덜미 전체가 시뻘건 울혈로 가득했다. 몸통에 있는 흔적은 옷에 거뜬히 가려졌지만, 목에 있는 건 꽤 높이까지 올라와 있었다. 셔츠 깃에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테렌스의 얼굴이 죄책감에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간밤에 그녀의 목을 지나치게 탐미한 결과였다.

“미안하다. 어두울 땐 몰랐는데 밝은 데서 보니 좀 심하구나.”

“어휴, 한동안 매고 다녀야겠네. 그럼 오늘도 일 잘 보세요.”

발레리는 손수건을 목에 대충 묶은 뒤 창밖으로 사뿐히 뛰어내렸다. 그녀는 두리번두리번 인적을 살피며 황태자궁을 날래게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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