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발레리의 명에 따라, 켄드릭은 에이바에게 다가갔다.
에이바는 그의 춤 신청을 거부하지 않았다. 황태자에 필적할 만큼 근사한 남성이 먼저 다가오니 기분이 사르르 녹았다.
적대 가문의 아들인지는 꿈에도 몰랐다. 말하자면 가면무도회의 순기능이었다.
켄드릭이 에이바와 춤추는 동안, 발레리는 눈에 띄지 않는 한쪽 모퉁이에서 혼자 샴페인을 홀짝였다.
저 멀리 앉아 있는 테렌스를 지켜보면서.
‘가면도 새하얀 게 꼭 본인 같은 걸 썼네.’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축하와 찬사를 받는 테렌스. 그는 언젠가 제국의 태양이 될 적통 황태자였다. 자리를 위협할 형제도 하나 없었으니, 자의든 타의든 권력의 정점에 설 수밖에.
등받이 높은 의자에 기대앉은 테렌스는 어딘가 권태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저렇게들 떠받들어 주는데, 왜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이는 거지. 발레리는 그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다.
어느새 탄신일 축하 선물은 눈덩이같이 불어나 테렌스의 자리를 성벽처럼 에워쌌다. 결국 그는 하인들을 불러 상자를 밖으로 나르도록 지시했다.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는 삶. 아니, 무언가를 원하기도 전에 다들 알아서 갖다 바쳐주는 삶. 그런 삶이 너무 익숙해진 걸까. 그의 가면 속으로도 다 들여다보였다. 세상 재미없다는 표정이.
“저런 사람한테… 난 대체 뭘 준 거야. 쓰레기통에나 안 버리면 다행이겠네.”
발레리는 얼마 전 그의 침실 앞에 몰래 두고 온 생일선물을 떠올렸다.
생각할수록 볼품없는 물건이었다. 얼마짜리였더라. 30갈렌은 됐을까. 사실 프리다에게 준 그림이 예산을 한참 초과해서 비싼 걸 사려야 살 수 없었다.
“그래도 언젠간 가지고 싶다고 했었으니까. 버리진 않겠지.”
발레리가 스스로를 위로하며 잔을 쭉 비우는 순간.
누군가가 낯선 언어로 말을 걸어왔다.
어두운 피부와 검정 곱슬머리. 한여름에나 입을 법한 하늘거리는 흰 옷. 딱 봐도 외국인이었다.
“하하, 제가 외국어를 못 해서요.”
“…아, 실례했습니다. 동향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이스티아 4왕자 하르만입니다. 켄트웰 주재 이스티아 대사입니다.”
이웃나라 왕자이자 이곳 황성에 주재하는 외교관이란 소리였다. 외국인인데다 높은 사람이라고 하니 저절로 어깨가 굳었다.
“발레…, 발렌틴입니다. 왕자님을 뵙습니다.”
발레리는 아무 이름이나 지어 둘러대며 무릎 굽혀 인사했다.
흑발과 흑안, 햇빛에 그은 피부 탓에 발레리는 가끔 외국인이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색소가 짙은 그녀는 은근히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발렌틴을 아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이스티아풍 의상을 누구보다 잘 소화합니다.”
외국인이라 그런지 지나치게 격식 있는 어투였다. 다행히 그는 발레리에게 신상 정보를 더 캐묻지 않았다.
“하하, 감사합니다.”
“계속 저쪽을 보셨습니다. 황태자 전하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발레리의 시선 끝에 누가 닿아 있는지, 그는 일찍이 알아채고 있었다.
“아하하, 그래 보였어요?”
“안타깝습니다. 요리대회 심사 때 전하에게 결혼 계획을 물었습니다. 전하는 애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인간이 지금 뭐라는 거야.
황태자한테 애인이 있다고? 그것도 결혼까지 생각하는?
마른침을 넘기는 발레리의 목에 불쑥 핏대가 올랐다. 갑자기 속에서 더운 피가 확 끓어올랐다. 뜻 모를 배신감도 치밀었다.
뭐야. 한 달 동안 만나지 말자고 한 이유가 그거야? 다른 사람으로 갈아탈 시간을 벌려고? 그래서 석실에서 마주쳤을 때 그렇게 모른 척한 건가?
당장 달려가서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럴 자격이 하등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 진정하자. 나랑 사귄 것도 아닌데, 금방 갈아탈 수도 있지. 근데 누굴 만나는 걸까. 아까 분위기상 볼드윈 공녀는 아닌 것 같고.’
오만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엉켜 들었지만 발레리는 싹둑 잘라냈다. 여기서 뭘 더 알아내 봤자 기분만 더 나빠질 것 같아서.
“저는 애인이 없습니다. 발렌틴, 저와 춤을 추겠습니까.”
“…뭐, 그러시죠.”
대사의 애인이 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춤추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다만 눈을 마주칠 때마다 방싯방싯 웃어대는 게 괜히 얄미웠다. 아무 잘못 없는 인간인 걸 아는데도 그랬다.
‘웃자, 웃어. 황태자가 누굴 만나든 개뿔이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발레리는 대사와 꽤 여러 곡을 추었다.
그가 뭐라 뭐라 말을 하는데 주변이 시끄러워서 잘 들리지 않았다. 대답 대신 눈웃음으로 때웠다.
그러던 중 커다란 종소리가 울렸다.
머리가 하얗게 센 관리가 연단에 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프리다 황녀 전하께서 대리인을 통해 모두 발언을 하실 예정입니다. 대리인은 무대에 올라와 주시고, 언론인 분들은 앞줄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어, 벌써 서신 읽을 차례가 된 건가.
발레리는 대사에게 “즐거웠어요”라고 인사한 뒤 연단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허리춤에 묶어둔 작은 가방에서 서신 봉투를 꺼내 관리 앞에 내밀었다.
“제가 대리인인데요. 지금 읽으면 되나요?”
“아… 황녀님 인장만 확인해 보겠습니다.”
관리는 봉투에 찍힌 프리다의 인장을 확인한 뒤 발레리를 유심히 쳐다봤다. 우리나라에 이런 귀족 영애가 있었나, 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신상을 묻지 말라는 당부를 들은 터라 굳이 질문하지 않았다. 관리는 발레리에게 얼른 시작하라고 손짓했다.
끼리끼리 춤추던 사람들이 연단 주위로 벌떼같이 모여들었다. 맨 앞줄에는 수첩을 든 기자들이 눈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발레리의 귀에 쏙쏙 들어왔다.
“와, 저 아가씨 키 진짜 크다.”
“볼드윈 공작가 영애보다 큰 것 같은데? 황녀님이랑은 무슨 사이지.”
“우리나라에 저렇게 키 큰 귀족 영애가 있었나? 피부는 또 되게 까맣네.”
여기저기서 꽂히는 시선에 얼굴이 따가웠다. 가면 속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뭐라고 써 있든 빨리 읽고 무대를 내려가고 싶었다.
‘하아, 침착, 침착.’
발레리는 무릎을 굽혀 군중을 향해 인사했다. 그녀는 자기소개를 생략하고, 목을 가다듬은 뒤 서신을 펼쳐 들었다.
[친애하는 모두에게.
무슨 말부터 꺼낼까 많이 고민했는데, 먼저 고맙다는 인사부터 하고 싶어요.
내가 태어나기까지, 온 백성들이 한 세기 반을 꼬박 기다렸다고 들었어요. 나의 탄생이 누군가의 소원이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곤 해요.
공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는 갓난아이 때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했지요. 정말 행복했고, 제 인생에 더 없는 축복이었어요.
내가 조용히 지낸 지난 5년 동안에도, 날 잊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매년 여신 축일마다 감사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향해 손 흔들어줄 때마다 아직 날 잊지 않았구나, 하면서 안도했거든요.
이렇게 모두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는데, 정작 나는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거 있죠.
내 옷가지랑 신발, 액세서리, 모자, 장갑을 판매하니 60만 갈렌의 수익이 나왔어요. 전부 황실 재단을 통해 어려운 분들께 기부할 예정이에요.
지방 곳곳에 내 이름으로 된 별장과 작은 영지가 있어요. 모두 아동 위탁시설과 노인 보호시설, 여성 교육시설 등으로 개축될 거예요.
이제 본론을 말할게요.
나, 내년 봄에 여행을 떠나게 되었어요. 이 나라를 떠나 아주아주 멀리요.
금방 돌아올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어요.
많은 분들이 내 결혼 문제를 걱정해 주셨죠. 이젠 그러실 필요 없어요. 만일 내가 이 땅에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곳에서 짝을 만나 잘 살고 있다는 뜻일 거예요.
여행을 앞두고 사실 겁이 많이 났어요. 나를 사랑해 주는 이 나라를 떠나, 미지의 장소로 간다는 게.
그러다 한 사람을 만났어요. 나를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응원해 준. 그 사람 덕분에 많이 강해졌고, 큰 용기를 얻었어요.
더 오래 있다 가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머나먼 곳에서도, 날 사랑해 주는 모두의 눈길이 너무 그리울 거예요.
곧 있을 여신 축일이에요. 광장으로 나오면 날 볼 수 있을 거예요. 이번에는 여러분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작별 인사를 하려 해요.
무도회엔 기자들도 많이 왔겠죠?
이 편지 내용 널리 보도해 주시겠어요?
모두의 마음에 시에나 여신의 축복이 임하길.
칼레바니아 제1황녀, 프리다 테레즈 켄트웰]
서신 낭독을 끝마친 발레리는 뻣뻣하게 굳은 채 허공만 바라보았다.
읽을수록 가슴이 먹먹했다.
마지막 부분에선 목이 메어서 하마터면 끝까지 읽지 못할 뻔했다.
짐작조차 못하던 내용이었다.
모두에게 이별을 고하는 작별 편지라니.
황녀가 내년에 나라를 뜬다는 충격 선언에, 거대한 무도회장 안에는 삭막한 정적이 흘렀다. 그 와중에 기자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저기, 대리인 분. 어느 가문의 영애인지 물어도 됩니까?”
“황녀 전하께서 말하는 ‘한 사람’이 누굽니까? 연인입니까?”
“황녀 전하께서 여행을 어디로 간다는 겁니까?”
“황녀님처럼 연약한 여자가 위험하게 무슨 여행을 갑니까?”
발레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기자들 질문까지 받아야 하는 거였나? 젖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이분도 자세한 사항은 모르니 이만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기자들에게 외치는 켄드릭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그는 발발 떨리는 발레리의 어깨를 감싸 안고 연단을 내려왔다.
그는 샴페인을 한 잔 가져다주었다.
“여기, 목 좀 축여.”
“술은 됐어. 잠깐 나 좀 혼자 있게 해줘.”
“…그래.”
발레리는 제게 쏠리는 관심을 무시한 채 깊은 상념에 잠겼다.
‘황녀님은 용사가 되기 위해 여행을 떠나려 하시는 것 같은데….’
이게 발레리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엔 물음표가 끊임없이 증식했다.
대체 왜? 이 좋은 황궁과, 가족들을 두고 굳이? 5년 동안 갇혀 있던 게 억울해서? 세상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꿈을 찾아 떠나고 싶어서?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
프리다에게 질문하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그 와중에 드는 다른 생각도 있었다.
‘여행이라면, 나도 황녀님의 호위로 따라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극히 현실성이 낮은, 상상일 뿐이었다.
다시 오케스트라가 음악 연주를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여 뒷얘기를 하던 군중들은 다시금 제 짝을 찾아 간격에 맞게 섰다. 그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서도 춤추고 싶은 마음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발레리는 천천히 걸어 무도회장 중심부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다 가로막혔다. 순백색 가면을 쓴 낯익은 남자에게.
“처음 뵙겠소, 아가씨. 내 여동생의 의사를 대변해 주어서 참 고마운데, 그에 보답할 기회를 주시겠소?”
테렌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