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군복을 벗고. 드레스를 입고. 샌들을 신고. 이제 액세서리로 마무리할 차례였다.
책상 위 보석함에는 어제 프리다가 건넨 흑진주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발레리는 목걸이를 채우려고 목 뒤로 손을 가져갔다.
투둑. 투두둑.
줄이 끊어졌다. 바닥에 진주 수십 알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이고, 참.”
발레리는 치마를 최대한 올려 잡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는 진주알을 보이는 대로 주워 허둥지둥 보석함에 담았다.
이제 켄드릭이 오기까지는 십 분이 남았다.
발레리는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점검했다.
“아무것도 안 하려니까 목이 좀 허전하긴 하네….”
문득 대안이 하나 생각났다.
“아, 나 목걸이 있지.”
그녀는 몇 달 전 목걸이 하나를 선물 받은 적이 있었다. 황제와 황후를 처음 알현하기 전, 테렌스로부터.
한동안 잊고 있던 그 상자는 책상 서랍 맨 아래 깊숙한 곳에 있었다.
발레리는 그것을 꺼내 열었다. 흑진주만큼이나 본인의 눈동자를 닮은 검은색 오닉스가 은은한 광채를 머금고 있었다.
목걸이는 그녀의 쇄골 위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나랑 잘 어울리긴 하네.”
발레리는 어깨에 숄을 두르고, 마지막으로 가면을 썼다.
아무 장식 없는 크림색 민무늬 가면이 그녀의 얼굴 절반을 덮었다.
***
채플 후원에는 웬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켄드릭은 안절부절못하며 그 앞을 서성였다. 바싹바싹 타는 입술을 혀로 축이기도 했다. 그는 베이지색 연미복 차림이었다. 크림색 드레스를 입는 발레리와 톤을 맞추려고 선택한 색상이었다.
밝은 옷을 입으니 안 그래도 산만한 어깨가 한 뼘은 더 넓어 보였다.
“고작 중앙궁 가는데 웬 마차야? 좀 과한 거 아니야?”
발레리의 목소리가 들리자, 켄드릭은 그쪽으로 고개를 확 틀었다.
켄드릭은 준비한 인사말조차 잊고 그녀를 바라봤다. 모든 준비를 마친 발레리는 아름다웠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
“뭐야, 왜 말이 없어? 손 줘봐.”
‘마차를 탈 땐 남자의 손을 빌려야 해요.’
발레리는 프리다의 당부를 떠올리며 켄드릭의 손을 지지해 마차에 올랐다.
“근데 마부는 어딨고 너 혼자야?”
“…내가 직접 몰고 왔어. 외부인 부르기가 좀 그래서.”
그렇다면 이제 출발을 해야 할 텐데, 켄드릭은 마차 문 앞에 기대어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멍하니 발레리의 가면 쓴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면 써도 다 보여.”
“뭐가?”
“너 예쁜 거.”
“…닥치고 출발이나 해.”
발레리는 질렸다는 얼굴로 손을 훠이훠이 흔들었다.
한껏 긴장했는데 느끼한 말까지 들으니, 버터 한 덩이를 집어삼킨 것마냥 속이 느글거렸다.
켄드릭은 씩 웃으며 마부석에 앉았다.
그는 재킷에서 밤색 가면을 꺼내 쓴 뒤 말고삐를 잡았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창문 밖으로 중앙궁의 웅장한 모습이 보였다.
발레리는 그 뒤편으로 지는 황혼을 바라보며 숨을 천천히 골랐다.
심장박동이 점점 불규칙하게 튀어 올랐다.
자꾸 특정인이 떠오르는 탓이었다.
어떤 가면을 쓰고 나타날까.
오른손이 아직 아플 텐데, 춤은 출 수 있으려나.
“하, 누가 누굴 걱정해. 내 코가 석 잔데.”
***
발레리는 켄드릭의 팔을 붙잡고 중앙궁에 입성했다.
건국제 무도회는 중앙궁 뒤편 별관의 그랜드볼룸에서 열렸다. 황제 부부의 대관식과 결혼 서약식이 치러진 웅대한 공간이었다.
무도회장 앞 로비에선 관리들이 초청장 확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백여 명이 그 앞에 장사진을 쳤다. 지금 속도라면 입장까지 30분은 걸릴 것 같았다.
“…사람 구경이나 해야지.”
입장객들의 행색을 관찰하고 있자니, 절로 그들이 쓴 가면에 눈이 갔다.
보석이 알알이 박힌 가면은 부지기수였고, 생화가 다닥다닥 붙은 가면도 있었다. 어디서 뽑았는지 모를 형형색색의 깃털을 꽂은 가면도 눈에 띄었다.
발레리는 여인들의 차림새도 유심히 살폈다.
이스티아풍 드레스가 정말 유행이긴 한 모양이었다. 젊은 여성들은 대개 그녀처럼 골반 라인이 드러나는 실크 드레스 차림이었다. 겹겹이 풍성하게 부풀린 전통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은 나이대가 좀 있어 보였다.
문득 정신이 사나워진 발레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안도했다.
‘휴우, 생각보다 안 튀어서 다행이다.’
오히려 주목받는 건 발레리보다 켄드릭 쪽이었다. 지나가는 여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켄드릭에게 삼 초 이상 눈길을 빼앗겼다.
체격이 장대한 그가 베이지색 연미복을 빼입으니 위풍당당 그 자체였다. 덩달아 시선을 받던 발레리는 팔짱을 스르륵 풀었다.
“이야, 여자들이 너만 쳐다보네. 네 키가 워낙 커서 내 키가 묻히는 효과가 있는 것도 같고.”
“…있잖아, 발레리.”
“어?”
“내 약혼녀라고 소개해도 돼?”
이게 아까부터 왜 자꾸 개소리지.
발레리는 목 끝까지 올라온 욕을 삼키며 손가락 관절을 우두둑 꺾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차림으로 상스러운 말을 할 순 없었다.
“약혼녀는 무슨 얼어 죽을. 장난도 정도껏 쳐라.”
“어차피 네 신상 아무도 몰라. 서로 쓸데없는 이성 안 꼬이려면 이게 나을걸.”
“하아, 나한테 남자 꼬일 일 없거든? 그리고 쓸데없는 소문을 왜 만들어? 너한테 약혼녀가 어딨다고.”
“…언젠가는 생길 거니까.”
켄드릭은 목이 타는 듯 살짝 괴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의 깊은 녹안 한가운데 발레리의 촉촉한 입술이 아른거렸다.
“어, 이제 우리 차례다.”
언쟁을 벌이다 보니 점점 줄이 짧아져 드디어 둘의 차례가 돌아왔다.
발레리와 켄드릭은 프리다의 인장이 찍힌 초청장을 나란히 내밀었다.
데스크에 앉은 관리는 작은 확대경을 들고 초청장의 진위 여부를 판단했다.
가짜일 리 만무했다. 확인 작업을 마친 관리는 고개를 들고 두 사람을 빤히 올려다봤다.
두문불출하는 황녀의 초청을 받고 온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한 눈치였다. 실제로 프리다의 직인이 찍힌 초청장은 이 두 장이 전부였다.
“음… 특별히 황녀님께서 초대하신 분들이군요.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
그랜드볼룸은 천장이 휘영청하게 높았다.
까마득히 솟은 4층 높이의 천장은 황궁 마법사들이 띄워놓은 광구들로 가득했다. 그 빛이 수백 개의 샹들리에 크리스털을 투과해 오색찬란하게 갈라졌다.
벽과 기둥은 가을에 피는 제철 꽃들이 장식했다. 샛노란 거베라와 선홍색 피튜니아, 짙푸른 델피늄. 저마다 자기주장 강한 꽃들이었지만 영역을 나누어 배치하니 나름대로 조화로웠다.
맨 안쪽 공간에는 칼레바니아 황실 오케스트라가 다소 빠른 미뉴에트를 연주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각 출입문 근처에는 핑거푸드와 샴페인 잔이 놓인 스탠드형 테이블 여러 개가 배치됐다. 연미복을 단정히 갖춰 입은 하인들은 술을 따르느라 분주했다.
가면무도회라 그런 걸까. 입장객들의 행동은 사교라기보다 탐색전에 가까워 보였다. 살랑살랑 부채를 부치며 주위를 관찰하는 여성들. 조심스레 접근해 그들의 손등에 입 맞추는 남성들.
이 모두 발레리의 눈에는 생경하기만 했다.
‘이런 분위기구나. 혼자 오면 되게 뻘쭘했겠네. 황녀님이 왜 켄드릭을 붙여줬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어디선가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무도회장 중앙의 가장 큰 문으로 황제와 황후가 입장했다. 푸른색 가면을 쓴 부부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반갑게 인사했다.
무도회 주최자인 황후가 대표로 인사말을 했다.
“올해는 색다르게 가면무도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황제 폐하와 나는 첫 춤만 추고 빠져 줄 테니, 편하게 즐기다 가길 바라요.”
황제 부부는 연단에서 내려와 서로를 마주했다.
발레리와 켄드릭도 멀지 않은 곳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들 짝을 지은 가운데 첫 곡이 시작됐다.
하지만 아직 춤을 시작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선홍색 실크 드레스 차림의 키 큰 여인이 혼자 멀거니 서 있었다. 고동색 머리카락, 육감적인 몸매. 에이바 볼드윈 공녀가 분명했다.
공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지난 5년간 그녀의 첫 춤 상대였던 사람, 황태자 테렌스. 그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공녀가 주위의 눈총을 받기 시작하자, 결국 보다 못한 그녀의 아비, 볼드윈 공작이 딸의 파트너가 되어 주었다.
발레리는 공작 부녀에게 시선을 빼앗긴 채 건성으로 스텝을 밟고 있었다.
그러다 손등에 와 닿는 낯선 감촉에 화들짝 놀랐다.
켄드릭의 입술이었다.
“에잇, 뭐야 갑자기!”
“발레리, 나 오늘만 기다렸어.”
“뭘?”
“너한테 제대로 고백하려고.”
“…발등뼈 으깨지고 싶어?”
“하아, 제발 좀 진지하게 들어주면 안 돼?”
“어. 끝난 얘기 자꾸 꺼내지 마.”
발레리는 여전히 매몰찼다.
켄드릭은 가볍게 후, 한숨을 쉬고 그녀의 손을 고쳐 잡았다. 아직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 시각 테렌스는 눈에 띄지 않는 문을 통해 무도회장에 진입했다. 아무 장식도 없는 순백색 가면을 착용한 채.
테렌스는 오케스트라와 가까이 마련된 상석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곁에는 초록색 연미복을 입은 레이븐이 섰다.
춤에 관심이 없는 일부 귀족 남성들과 고위 관리들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테렌스에게 줄지어 다가섰다.
“늦었지만 탄신일 축하드립니다, 전하.”
“너무 조용히 등장하셔서 하마터면 인사도 없이 결례할 뻔했습니다.”
“춤을 안 추신다고 들었는데, 정말로 안 추시는 겁니까? 여인들이 너무 아쉬워하겠는데요.”
테렌스는 그들의 축하를 적당히 받아주었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탄신 연회를 수년째 건너뛰다 보니, 귀족들은 건국제 무도회를 황태자의 약식 생일파티처럼 여기고 선물을 가져오곤 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귀족들의 선물 공세가 시작됐다. 그의 양옆에는 어느새 선물 상자들이 탑처럼 쌓였다.
그러던 와중에 음악이 끝났다.
첫 곡이 끝나기 무섭게, 뜨거운 화로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새빨간 차림의 여인이 테렌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전하. 어떻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배신감에 사로잡혀 덜덜 떨리는 목소리는 에이바의 것이었다.
첫 춤을 안 췄다고 이러는 건가. 테렌스는 냉기를 뿜으며 이렇게 답했다.
“공녀, 왜 갑자기 화를 내지? 나는 분명 안 추겠다고 예고했었는데.”
“그동안 관행이었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창피를 주시면….”
“해서, 지금 내게 사과를 요구하는 건가?”
“하아, 됐어요. 기대했던 내가 바보지.”
에이바는 분이 가득한 얼굴로 돌아서서 원래 있던 자리로 향했다. 저 거대한 빙산 같은 남자와 언쟁해서 이길 자신은 없었다.
곧 두 번째 곡이 시작된다. 에이바는 주먹을 틀어쥐고 씩씩댔다. 분노한 그녀에게 선뜻 춤을 신청하는 남성은 없었다. 다들 눈치만 볼 뿐.
그 광경을 보다 못한 발레리는 켄드릭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켄드릭. 저 공녀한테 빨리 춤 신청하고 와.”
“…발레리, 나 프레이저 가문인 거 잊었어?”
켄드릭이 가문 이름을 들먹이며 말했다.
프레이저 후작가는 볼드윈 공작가와 오랜 앙숙 관계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몬태규와 캐플릿처럼.
“어차피 너인 줄 모를 거 아냐. 빨리 신청하고 와.”
“…왜 그래야 하는데?”
“스읍, 어서!”
“아,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