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발레리는 프리다로부터 식사 예절 또한 교육받았다. 건국제 무도회인 만큼 연회장에 풀코스 석식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프리다는 켄드릭을 포함한 문지기 세 명을 불러 정찬을 순서대로 내오도록 지시했다.
맨 처음엔 오목한 크리스털 그릇에 물이 담겨 나왔다.
냉수 먹고 속부터 차리라는 건가. 발레리는 얼른 목을 축이려 했다. 프리다는 화들짝 놀라 그녀를 멈춰 세웠다.
“그만! 그거 먹는 물 아니에요. 빵 먹기 전에 손 씻는 용도예요.”
그다음엔 따끈한 수프와 빵이었다. 침을 꿀꺽 삼키는 발레리 앞에서, 프리다는 숟가락을 들고 직접 식사법을 시연했다.
“수프는 몸 쪽에서 바깥쪽으로 떠요. 양이 얼마 안 남았을 때는, 이렇게 그릇을 몸과 반대 방향으로 기울여서 뜨면 돼요.”
발레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국물 퍼먹는데 왜 숟가락 뜨는 방향까지 정해져 있는 거지.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은데.’
“…그냥 그릇째 들고 마시면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아니 아니, 발레리. 그 숟가락 아니에요.”
발레리는 수프를 뜨려던 숟가락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수프 먹는 숟가락이 따로 있어요?”
지금 눈앞에 놓인 숟가락과 포크, 나이프만 도합 15개였다. 발레리는 그중 적당한 크기의 숟가락을 집었을 뿐이었다.
“제일 바깥에 놓인 게 수프용 숟가락이에요.”
“아아….”
“그리고 아마 거긴 원형 테이블일 텐데, 왼쪽에 있는 빵하고 오른쪽에 있는 물이 본인 거예요.”
“왼쪽 빵, 오른쪽 물이 제 거라고요?”
“좌빵우물. 이렇게 기억하면 쉬워요.”
수프에 이어 대구 요리, 루꼴라를 얹은 토마토 브루스케타와 손바닥만 한 양고기 스테이크가 순서대로 나왔다. 그다음으로 나온 메인 요리는 바짝 구운 암컷 칠면조였다.
프리다가 계속해서 ‘숙녀의 식사법’을 선보였다. 발레리는 그 속도에 최대한 맞추려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왜… 맛있는 걸 앞에 두고 깨작거려야 해요?”
“…평소 속도로 먹으면 좀 전투적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흐음, 칠면조 다리는 손으로 잡고 뜯으면 될까요?”
“…아니, 손으로 잡고 뜯을 수 있는 건 빵밖에 없어요. 나머진 다 나이프로 잘라야 해요.”
뭔 놈의 허례허식이 이렇게 많을까. 먹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직 메인 요리는 입에 대지도 않았건만 발레리의 식욕은 점점 미지근히 식어갔다.
이 밖에도 프리다는 기본적인 인사법과 적당히 에둘러 말하는 화법, 남자에게 춤을 신청받았을 때 응하는 방법 등 사교계 에티켓을 열성껏 지도했다.
무도회와 사교계. 발레리에겐 들을수록 정신이 아득해지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 미지의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발레리는 프리다의 말을 다소곳이 경청했다.
발레리는 프리다의 당부 사항을 머리에 새기려 애썼다. 경험 없이 험준한 산맥을 넘어야 한다면 신발끈이라도 꽉 묶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최대한 노력했다. 프리다가 제시하는 틀 안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 위해. 하지만 가르침이 거듭될수록 점점 자신감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니라 아예 다른 사람을 연기해야 하는 것 같아.’
어깨가 무거웠다. 가서 춤만 추고 온다면 모르겠지만, 모두가 듣는 자리에서 프리다가 전하는 메시지를 읽고 와야 한다.
일종의 대변인 같은 역할이니, 황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다.
“명색이 대리인인데, 황녀님 얼굴에 먹칠하게 되면 어떡하죠…?”
프리다는 살짝 처진 발레리의 어깨를 양손으로 꽉 부여잡았다.
“지레 겁먹을 필요 없어요. 어차피 가면무도회고, 신원을 알릴 필요도 없으니까요. 서신 읽는 건 별일 아니니까, 켄드릭이랑 마음껏 춤추고, 맛있는 것도 먹고 와요.”
프리다의 격려에 발레리는 약간의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네, 그럴게요. 서신은 언제 주실 거예요?”
“출발하기 전에 초청장이랑 같이 챙겨 줄게요. 발레리,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내 의사가 왜곡되지 않고 잘 전달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최선을 다할게요.”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구나.
그 사람도 오겠지. 무슨 가면을 쓰고 오려나.
발레리는 여전히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황녀님, 근데요.”
“응?”
“무도회에 황태자 전하…도 오시겠죠?”
“당연히 가죠.”
“…아, 네.”
“혹시 오빠가 알아볼까 봐 그래요?”
“아뇨, 아니에요.”
어차피 알아봐도 모른 척 하겠지.
생일 파티 때도 그랬으니까, 무도회라고 다를 것 같진 않았다.
***
발레리의 드레스가 석실에 도착한 건 무도회 바로 전날이었다.
프리다의 지시에 따라, 켄드릭은 아침 댓바람부터 황실 전속 재단사에게서 드레스를 받아왔다.
“폼페이오 부인이 촉박하게 드려서 죄송하다고 합니다. 황녀님 드레스는 축일 이틀 전까진 완성할 수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응, 알겠어요.”
프리다는 제 몸통만 한 상자를 번쩍 받아들고 발레리에게 전달했다. 기대감에 찬 두 눈이 새벽별처럼 반짝였다.
“발레리, 얼른 입고 나와요.”
프리다는 드레스룸 용도로 쓰이는 가벽 안쪽을 가리켰다.
발레리는 그 안에 들어가 군복을 훌훌 벗어 던지고, 상자에서 드레스를 꺼내 몸통을 쑥 넣었다.
다행히 혼자서도 거뜬히 입을 수 있는 홑겹 드레스였다.
“역시 더운 나라 옷이야. 한 겹짜리 얇은 옷이라 입고 벗기가 편하네.”
발레리는 전신거울 앞에 서서 옷맵시를 천천히 정돈했다. 정말 편했다. 입은 듯 안 입은 듯, 몸에 부드러운 베일이 감긴 것 같았다.
상자에는 반투명한 크림색 숄이 들어 있었다. 어깨와 등, 팔에 붙은 근육을 가리는 용도 같았다.
발레리는 어깨에 숄을 두르고, 굵은 토파즈로 장식된 플랫 샌들까지 신고 드레스룸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쭈뼛거리며 프리다와 켄드릭이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다가갔다. 프리다에게서 배운 대로 보폭을 좁게 하려 애쓰면서.
“…어, 몸에 잘 맞고 편해요. 감사합니다, 황녀님.”
프리다는 발레리의 자태를 보자마자 입을 쩍 벌리며 물개처럼 박수를 쳤다.
켄드릭은 눈을 번쩍 치켜뜬 채 그대로 굳었다.
몸 선을 따라 매끄럽게 흐르는 실크 소재 드레스였다. 전체적으로는 크림색이었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은은한 청색을 띠었다.
브이자로 적당히 파인 네크라인은 곧게 뻗은 발레리의 목선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야트막한 골짜기도 살짝 내보였다. 과감하게 드러난 등 부분은 숄에 가려져 있었다.
허리 부분은 가장 잘록한 둘레를 따라 금실로 섬세하게 짜인 레이스가 둘러졌다.
아직 머리도 짧고 화장기도 없었지만, 발레리는 이미 우아하고 고혹적인 매력을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와, 발레리. 고대 이스티아 여신 같아요. 역시 키가 크니까 이런 자태가 나오는구나.”
“감사합니다, 하하.”
발레리는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요즘 황성에서 이스티아풍 드레스가 왜 유행인지 알 것 같네요…. 그럼 이제 두 사람, 춤 한번 맞춰 볼래요?”
프리다는 한껏 들뜬 얼굴로 발레리와 켄드릭을 연무장으로 인도했다.
두 사람은 황녀가 치는 손뼉 박자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켄드릭과의 춤 연습은 벌써 수십 번째.
하지만 오늘 그는 좀 이상했다. 방향도 잘 못 잡고, 고장 난 태엽 인형마냥 삐걱댔다.
발레리는 목소리를 낮춰 그에게 핀잔을 줬다.
“야, 왜 반대로 돌아? 똑바로 해라.”
“…미안해. 정신을 못 차리겠어.”
“왜.”
“너 지금… 너무 예뻐.”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발레리는 그와 맞잡은 손을 걸레 짜듯 꽉 비틀어 쥐었다. 손이 으스러질 듯한 고통에 켄드릭은 숨죽여 신음했다.
***
무도회 당일 오후, 프리다는 발레리를 석실 화장대 의자에 앉혔다.
발레리를 손수 꾸며줄 요량이었다.
우선 짧은 머리를 두피에 착 붙도록 정돈했다. 그 위에 긴 머리 가발을 씌웠다.
흑단같이 검고 결 좋은 머리칼이었다. 감쪽같이 발레리 본인의 머리처럼 잘 어울렸다.
프리다는 긴 흑발을 갈래갈래 땋아 다발을 만들었다. 그것을 틀어 올려 가장 아끼는 장신구를 꽂아 고정했다. 엄지손톱만 한 블랙 오팔이 세 알이나 박힌 핀이었다.
사실 헤어와 메이크업은 전문가에게 맡기려 했으나 발레리가 거부했다. 어차피 가면을 쓸 테니 화장은 짙게 할 필요가 없고, 머리는 대충 올려만 달라면서.
하지만 프리다의 사전에 대충이란 없었다. 십 대 시절에도 자신을 보필하던 시녀들을 정성스레 꾸며주며 즐거워했었다.
“발레리, 잠깐 눈 좀 감아 볼래요?”
프리다는 발레리의 오른뺨에 어두운 베이지색 크림을 꼼꼼히 발랐다. 흉터가 감쪽같이 가려졌다.
얼굴 전체에는 가볍게 분칠을 해 주었다.
그다음, 립스틱을 가장 신경써서 발랐다. 입술만큼은 가면에 감춰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날 테니.
9월 하순, 아직은 따뜻한 초가을.
계절 빛을 머금은 주홍빛 립스틱이 도톰한 입술에 빈틈없이 발렸다. 잘 익은 홍시처럼 반질반질 윤기가 흘렀다. 꾹 누르면 다디단 과육이 투둑 비져나올 것 같았다.
화장이 끝났다.
발레리는 거울 속의 낯선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한층 밝아진 얼굴에 입술 색까지 얹으니, 건강한 구릿빛 피부가 별 가루를 뿌린 것마냥 반짝였다.
제법 예뻤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생애 처음이었다. 첫 무대를 앞둔 신인 가수처럼 가슴이 쿵쿵 뛰었다.
프리다는 제 솜씨에 만족했는지 함박웃음을 지었다.
“헤헤, 내가 해준 거지만 정말 마음에 들어요. 이제 방에 올라가서 옷 갈아입고, 목걸이도 하고, 가면도 쓰면 되겠어요.”
“…네, 황녀님.”
“자아, 여기. 잘 부탁해요.”
프리다가 손바닥만 한 무언가를 건넸다. 금장으로 장식된 상아색 토트백이었다. 그 안에는 어제 밤새워 마무리 지은 서신과, 인장을 찍은 무도회 초청장이 담겨 있었다.
발레리는 황송스러운 자세로 가방을 받아들었다. 프리다는 잔뜩 굳은 그녀를 살포시 껴안고 토닥였다.
“떨지 말고, 내 몫만큼 즐기다가 와요.”
그렇게 하겠다고, 발레리는 엷은 미소로 화답한 뒤 석실을 나왔다.
달라진 외모에 문지기들의 이목이 쏠렸다.
발레리는 그들을 본 체도 않고 나선형 계단을 거쳐 방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