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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91)화 (91/173)

91화

발레리는 허망한 기분을 누르며 석실로 출근했다.

프리다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아침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발레리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발레리,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아요?”

“아뇨, 아니에요.”

곧 켄드릭이 서빙을 하러 들어올 텐데,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평소처럼 대하기엔 너무 걸리는 게 많았다.

쿵쿵.

철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발레리는 어깨를 작게 떨었다.

프리다는 종을 울려 켄드릭을 맞이했다.

다행히 그는 평소와 똑같은 태도로 임했다.

식사 내내 발레리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내는 것만 제외하고는.

발레리는 열심히 눈 맞춤을 피하려 했지만 켄드릭의 시선은 꽤나 집요했다.

결국 그녀는 켄드릭을 아래위로 노려보며 입 모양으로 이렇게 말했다.

‘뭘 봐.’

켄드릭도 입 모양으로 답했다.

‘너.’

미친놈. 발레리는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프리다와 셋이 일상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켄드릭은 발레리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점심 식사 때도, 저녁식사 때도, 그의 시선은 계속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퇴근 후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는 길.

켄드릭은 접시가 가득 얹힌 쟁반을 들고 발레리의 뒤를 천천히 뒤따랐다.

할 말은 없는지 조용했다.

발레리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무시하며 꿋꿋이 계단을 올랐다.

‘아 나, 뒤통수 뚫어지겠네.’

발레리는 얼른 발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켄드릭의 시야에서 벗어나 방에 들어가고 싶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켄드릭 또한 속도를 높여 그녀를 뒤쫓았다.

“어딜 도망가.”

“…도망 아니거든?”

“나랑 춤 연습해야지. 이제 무도회도 2주 밖에 안 남았잖아.”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곧 있으면 건국제 무도회였다. 켄드릭은 그녀의 에스코트와 첫 춤 상대를 맡기로 했었고.

아, 하필이면 왜 이 타이밍에 관계가 이상해져 버린 걸까.

정말 껄끄럽지만 동작을 맞춰볼 필요는 있었다.

그동안 춤 연습은 프리다랑만 했다. 켄드릭과 합을 맞춰본 건 딱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켄드릭이 울음을 터뜨리면서 흐지부지 끝나 버렸고.

발레리는 뒤를 홱 돌아보며 이렇게 못 박았다.

“춤 연습만 할 거야.”

“…누가 뭐래? 나도 춤 연습만 할 건데.”

켄드릭은 어깨를 한 번 들썩했다. 별 사심이 없다는 듯이.

다소 마음이 놓인 발레리는 켄드릭과 채플 후원 잔디밭 한가운데 마주 보고 섰다.

이제 9월 중순이었다. 살갗을 스치는 밤바람이 제법 서늘해졌지만 찌르륵거리는 풀벌레 소리는 여전했다.

켄드릭은 한 번 침을 꿀꺽 삼킨 뒤 발레리의 왼쪽 허리를 잡았다.

정체 모를 긴장감과 왠지 모를 불편함에 발레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별거 아닌 스킨십인데, 왜 끈적하게 느껴지는 거지.

“발레리, 왜 떨어?”

“안 떨었거든.”

발레리는 눈썹을 물결 모양으로 찡그렸다.

켄드릭은 생긋 웃으며 나머지 손으로 그녀의 손을 살포시 쥐었다.

오늘은 달이 구름 밖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은은한 달빛 아래 두 사람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코티용을 추었다.

프리다와 연습을 거듭한 결과 발레리는 춤 동작을 모두 체득한 상태였다. 이제 춤이라면 눈을 감고도 출 수 있었다.

다만 켄드릭은 황녀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컸다. 발레리는 훌쩍 높아진 파트너의 높이에 적응하기 위해 허리를 꼿꼿이 폈다.

“너 키 큰 건 알았지만… 원래 이렇게 컸나?”

“마지막으로 쟀을 땐 191이었어.”

“많이도 컸네.”

열일곱 살 때까지만 해도 켄드릭은 발레리보다 조금 작았다. 이후 2년 만에 12센티미터가 넘게 자라 지금의 키가 됐다.

“…발레리, 내가 더 커.”

“누가 몰라? 네가 나보다 큰 거.”

“아니, 내가 황태자보다 크다고. 그 사람은 끽해야 187 정도일걸.”

발레리는 스텝을 밟다가 우뚝 멈춰 섰다.

지금 켄드릭은 일부러 황태자 얘길 꺼내고 있었다.

“황태자 얘기가 왜 또 나와?”

“목적이 같으니까. 나도 매력 발산 좀 해 보려고.”

발레리는 그와 맞잡은 손을 뿌리치고 한 발짝 물러섰다.

춤 연습만 한다던 말은 순 거짓이었다.

그녀는 켄드릭을 따갑게 쏘아보며 목소리를 착 깔았다.

“왜 또 염병이야. 춤 연습만 한다며.”

“말했잖아, 나 너 이제 여자로 본다고.”

“…그러지 마라. 그리고 나 황태자랑 아무 사이 아니야.”

“잘 됐네. 앞으로도 아무 사이 하지 마.”

발레리는 기가 막혀서 코웃음을 쳤다. 네가 뭐라고 참견이야.

“하, 켄드릭… 나 너랑도 아무 사이 아니거든?”

“아니, 나 너랑 키스한 사이야.”

“아으! 쫌!”

─퍽! 퍽! 퍽!

발레리는 켄드릭의 가슴팍을 향해 마구 주먹을 날렸다. 꽤 힘이 들어간 펀치였지만 켄드릭의 다부진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때리고 그래. 어엿한 성인이라면 자기가 한 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안 그래?”

켄드릭이 느물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주먹세례가 간지럽다는 듯 가슴을 탁탁 털어내며.

“책임? 너 지금 나한테 책임지라는 거야? 고작 키스 한 번 가지고?”

“고작이라니. 나한텐 첫 키스… 아니, 이제 두 번째구나.”

그는 인공호흡 사건을 여전히 키스로 간주하고 있었다.

발레리는 지글지글 끓는 이마를 짚고 더운 숨을 내쉬었다.

뱃속의 내장이 칡덩굴처럼 얼기설기 꼬이는 기분이었다.

황궁에 들어와 두 남자와 접촉사고가 났다.

그리고 두 남자 모두 책임의 소재를 거론했다.

한 남자는 본인이 책임지겠다며 부담을 주었고, 다른 한 남자는 역으로 책임을 물으며 부담을 주고 있다.

“어이가 없네. 누가 보면 너랑 잠이라도 잔 줄 알겠어.”

“그럴 뻔했잖아, 솔직히.”

켄드릭은 여상한 어투로 발레리의 허를 찔렀다.

“…어?”

사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그의 뒤통수를 잡지 않았다면, 손끝에 닿은 포니테일에 놀라 기름등을 켜지 않았다면.

어둠 속에서 키스는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발레리는 그대로 그와 몸을 겹칠 생각이었다. 그의 정체를 알기 직전까지.

당연히 꿈인 줄 알았으니까.

꿈속에서라면 테렌스와 뭔들 못 하겠냐고 생각했으니까.

‘불 안 켰으면 얘랑 한 침대에서 일어날 뻔한 건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테렌스인 줄 착각하면서 켄드릭과 하룻밤을 보낸다니.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그야말로 두 남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못된 짓이 아닐까.

발레리는 위험한 상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고개를 내흔들었다.

속내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발레리의 표정을, 켄드릭은 바로 읽어냈다.

“부정할 생각하지 마. 너 얼굴에 써 있어. 진짜 사고 칠 뻔했다고.”

“…우리 안 잤어. 이게 결론이야.”

“그리고 우리 사이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지.”

켄드릭은 코끝이 닿을 만큼 발레리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는 목소리를 낮춰 이렇게 속살거렸다.

“발레리, 나 키만 큰 거 아니야.”

─따악.

발레리는 켄드릭의 이마 정중앙에 딱밤을 놨다.

“으윽.”

켄드릭은 이마를 양손으로 감싸며 고통에 신음했다.

“이 새끼가 못하는 소리가 없네. 한 번만 더 헛소리하면 죽인다 진짜.”

발레리는 높낮이 없이 단조로운 톤으로 경고했다.

시큰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면서도, 켄드릭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크큭, 발레리. 난 손 크기 말한 건데… 어떤 부위를 떠올린 거야?”

이 와중에도 켄드릭은 능청을 떨며 발레리를 자극했다. 꽈리고추처럼 매운 그녀의 손맛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철썩.

발레리는 손바닥을 회초리처럼 휘둘러 켄드릭의 왼쪽 팔뚝을 강타했다.

맞은 부위가 화하게 달아오르는데도 켄드릭은 송곳니까지 드러내며 큭큭거렸다.

대체 뭐가 재밌다고 이러는 건지. 발레리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정색했다.

“닥쳐. 딱 세 번만 추고 들어갈 거야.”

발레리의 단호한 선언 하에, 둘은 다시 손을 맞잡고 춤 연습에 돌입했다.

춤추는 내내 켄드릭은 입술을 감쳐물고 웃음을 참았다.

발레리는 짜증을 삭이며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녀는 급템포로 춤 세 번을 모두 채운 뒤 매몰차게 뒤돌아섰다.

켄드릭은 발레리의 어깨를 살짝 붙잡아 세웠다.

“…놀려서 미안해, 발레리. 이제부터 천천히 갈게.”

그의 손이 닿아 있는 어깨가 뻐근히 저려왔다. 발레리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그만해. 너 이러는 거 하나도 재미없어.”

***

발레리는 웬만하면 켄드릭과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켄드릭과의 춤 연습도 일부러 석실 연무장에서, 프리다가 보는 앞에서 했다.

좋은 핑계도 있었다.

“황녀님, 저희 춤추는 자세 좀 봐 주시겠어요?”

“어머, 좋아요!”

프리다는 발레리의 요청을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다행히 켄드릭은 프리다의 면전에서 발레리에게 수작을 거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다. 허리와 손에 와 닿는 손길에서 긴장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한때 만나던 사람 앞에선 못 그러겠지? 앞으로 내가 너랑 단둘이 춤 연습 하나 봐라.’

은근한 시선은 계속해서 따라붙었으나 못 본 체하면 그만이었다.

켄드릭도 이제 눈치를 차렸는지 발레리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키스 타령도 멈췄고, 퇴근할 때 뒤에 따라붙어 신경을 긁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었다. 가끔 노크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면, 아무도 없고 바닥에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초콜릿이나 사탕 등 요깃거리가 담겨 있었다. 작은 쪽지와 함께.

「이건 친구로서 주는 거야. 기분 안 좋으면 술 말고 이거 먹어. -켄드릭」

이렇게 모종의 사건 덕에 술을 끊고 그럭저럭 지내다 보니, 9월 하순은 금방 찾아왔다.

어느덧 무도회가 일주일 앞으로 훌쩍 다가와 있었다.

프리다는 이 시점부터 발레리에게 속성으로 예법을 가르쳤다.

따로 예법 선생을 붙여 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직접 신경써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황실에서 나고 자랐으니 예법이라면 공기처럼 익숙하기도 했고.

“발레리, 일단 걸음걸이부터 조금 바꿔 볼까요?”

프리다는 책장에서 꽤 두툼한 책 세 권을 가져와 발레리의 머리에 얹었다.

“…안 떨어뜨리고 저 끝까지 걸으면 되죠?”

발레리는 가볍게 연무장 끝과 끝을 왕복했다. 타고난 균형감각 덕에 머리 꼭대기의 책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걸음걸이가 안정적이기는 한데, 기품이랄 게 전혀 없었다.

“음, 발레리. 좀만 더 조심스럽게 걸으면 어떨까요? 나비가 꽃잎에 앉듯이요.”

“…해 볼게요.”

“보폭도 좀 줄이고요. 이렇게.”

두 살배기 걸음마 가르치듯, 프리다는 발레리에게 ‘숙녀의 걸음걸이’를 전수했다. 

“하으… 꼭 이렇게 걸어야 해요? 이동 속도가 느려지니까 답답해요.”

“발레리, 무도회장에서 행군할 거 아니잖아요. 드레스 입고 군인처럼 걸으면… 많이 눈에 띌 거예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무도회에서 소위 보통의 숙녀처럼 행동한다는 건.

사교계 레이디로 거듭나느니, 차라리 죽기 살기로 검술을 수련해서 소드 마스터가 되는 게 쉽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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