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켄드릭은 전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발레리의 술버릇을 잘 알고 있었다.
“취해서? 너 이런 주사 없었잖아.”
“…이번에 새로 생겼나 봐.”
“하아, 안 되겠다 정말.”
“뭐가.”
켄드릭은 발레리의 책상 위에 놓인 럼주 두 병을 양손에 집어 들었다.
“이거 술 압수야. 아무한테나 키스할 거면 마시지 마.”
“야! 그렇다고 술을 왜 뺏어가!”
“그럼 한 번 더 하든가.”
발레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키스를 또 하자는 건가.
지금 술도 다 깼는데, 맨 정신으로?
“…뭐래, 미친놈이.”
“한 번 더 키스해 줘. 나인 줄 알고 한 거면 또 할 수 있잖아. 그럼 술 두고 갈게.”
“으으, 싫어! 가져가든가 말든가 너 알아서 해!”
술을 볼모로 입맞춤을 요구하다니. 그의 터무니없는 거래 제안에 발레리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너 저번에 외롭다고 했었지. 그게 이런 쪽으로 외로운 거였어?”
“…몰라. 그냥 좀 나가줄래? 아흑, 쪽팔려 죽겠네.”
발레리는 수치심으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너, 내가 남자로 보이는 거 맞지?”
“…몰라! 모른다고! 나가라니까!”
“당한 건 나인데 왜 네가 화를 내? 묻는 말에 답 좀 해봐!”
켄드릭도 언성을 높였다.
떡하니 벌어진 일에 모르쇠로 일관하는 발레리에게 그도 화가 치밀었다.
그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방적으로 입술을 도둑맞았는데, 그 범인이 현실을 부정하고 있으니까.
켄드릭이 오늘 밤 발레리의 방을 찾은 건 마늘빵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요즘 식사량에 눈에 띄게 줄고, 얼굴이 수척해진 그녀가 걱정됐다.
그래도 마늘빵은 어릴 때부터 잘 먹었으니까. 이거라도 먹고 기운을 차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으로부터 20분 전.
─똑똑.
노크하자마자 방문이 열렸다. 발레리는 꿈이니 뭐니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더니, 켄드릭의 손을 확 낚아채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덜컥 문을 잠그더니 입술까지 훔쳐 갔다.
켄드릭은 정말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깜짝 놀랐다.
온몸의 근육이 납덩이처럼 굳고 목청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첫 키스는 술 냄새가 너무 역해서 힘들었다.
하지만 거부감은 단숨에 녹아내렸다.
보고 싶었다는 그녀의 말에.
─나만 보고 싶었나… 아니면 술 냄새나서 싫은가?
‘발레리, 우리 몇 시간 전에 봤잖아. 술을 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이래?’
이렇게 되물으려는 순간 그는 또다시 얼어붙고 말았다.
젖은 입술을 목에 대고 체향을 들이마시는 발레리의 자극적인 행동에.
엉거주춤 굳어 있는 켄드릭의 품 안에서, 그녀는 고개를 들고 야릇한 눈웃음을 쳤다.
‘…이제야 날 남자로 보는 건가.’
켄드릭은 거부할 수 없었다.
먼저 입술을 들이대며 끈적하게 유혹하는 오랜 짝사랑 상대를.
발레리의 눈짓과 몸짓에 단단히 홀려버린 켄드릭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그녀와 입술을 맞댔다.
프리다와의 계약 관계도 끝냈으니 이젠 거리낄 것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그는 더운 숨을 헐떡이며 그녀의 입안을 헤집고 있었다.
이대로 오늘 밤 그녀를 안고 싶다는, 짙은 욕망도 꿈틀거렸다.
그러나 바로 지금.
그의 정체를 알아버린 발레리는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을 겪은 사람처럼.
“…그래. 오늘 일은 전부 내 실수였어. 미안해. 그러니까 좀 나가줘. 제발.”
“발레리, 나 정말 그렇게 못해?”
나가달라는 부탁을 귓등으로 흘린 건지, 켄드릭은 그녀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키스를 못 한다는 말이 아직까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처음인데 못할 수도 있지.”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건데?”
무심결에 ‘완급 조절을 잘 해야지.’라고 답할 뻔했다. 발레리는 목을 큼큼 가다듬으며 이렇게 되물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너는 잘하는 것 같아서.”
“…하, 참. 돌겠네 진짜.”
어느새 한 뼘 앞으로 다가온 그의 이마를, 발레리는 손으로 지그시 밀어냈다.
방 안에서 벌어진 기습 키스 사건을 놓고 발레리와 켄드릭의 실랑이는 계속됐다.
“너는 대체… 냅다 달려드는 걸 왜 받아주니? 싫으면 그냥 밀치면 되잖아.”
“안 싫었으니까.”
“…뭐라는 거야, 또.”
“언젠간 너랑 입 맞추고 싶었어. 그게 오늘이 될 줄은 몰랐지만.”
“아오, 너 진짜 돌았냐? 말장난도 정도껏 해.”
발레리는 눈에 칼을 세우고 켄드릭을 노려봤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켄드릭은 언제나 그녀를 스스럼없이 대했다. 능글거리는 게 가끔 거슬리긴 했어도 선을 넘지는 않았다.
지금 켄드릭은 낯선 남자의 눈빛으로 발레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뜻거리는 비취색 눈동자에 강한 소유욕이 그대로 내비쳤다.
“발레리, 너 나 잘못 건드린 거야.”
“알아. 미안해. 내가 잘못한 거 인정해.”
“이렇게 된 이상, 나 너 여자로밖에 못 봐.”
“…자꾸 개소리 할 거야? 황녀님이랑 만나고 있으면서?”
“그렇게 알고 있었구나…. 근데 아니야, 이젠.”
발레리는 미간을 팍 구겼다.
“…이젠?”
분명 황녀와 켄드릭 사이엔 연애의 기류가 있었다. 그런데 이젠 아니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황녀님하고는… 잘 끝났어.”
금시초문이었다.
발레리는 콧잔등을 긁었다.
아무리 황녀와의 관계가 끝났기로서니, 바로 자신에게 접근하는 켄드릭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황녀님에서 나로 갈아타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켄드릭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발레리. 나는 애초에 그분 좋아한 적 없었어. 난 원래부터… 읍.”
발레리는 손을 뻗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만.”
왠지 감당할 수 없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발레리는 반대쪽 손으로 제 볼을 꼬집었다.
“…아아, 제발 꿈이었으면 좋겠다.”
꿈일 리 없었다. 손톱 끝이 파고든 부위에 따끔한 통증이 정확히 꽂혔다.
켄드릭은 제 입을 막고 있는 발레리의 손바닥을 힘주어 떼어냈다.
“발레리, 하나만 더 물을게.”
“…뭔데.”
“어떻게 그렇게 잘해? 백 번은 해 본 사람 같이.”
백 번까진 아니었지만, 발레리는 테렌스와 꽤 여러 번 입을 맞췄다.
테렌스는 호흡이 길었다. 한 번 키스를 시작하면 십여 분은 거뜬히 넘겼다. 어디서 보고 배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키스에는 늘 기승전결이 있었다.
완급 조절도 절묘했다. 중간중간에는 꼭 입술을 떼고 갈망하는 눈빛을 발산했다. 그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발레리의 심장은 흉곽을 이탈할 것처럼 요동쳤다.
테렌스의 키스는 언제나 다음 단계를 기대하게 했다. 그런 중독적인 묘미가 있었다.
반면 켄드릭의 키스는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직선적이었다.
발레리도 처음엔 그런 편이었지만, 테렌스와 계속 합을 맞추면서 점점 속도와 강도를 조절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런 발전의 역사를 켄드릭에게 털어놓을 순 없었다.
“…네가 알 바는 아니잖아.”
발레리는 최대한 야멸치게 대답했다.
켄드릭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을 감지했다.
설마, 아니겠지.
황태자는 아닐 거야.
그냥 발레리가 이쪽에 소질이 있는 거겠지. 얘는 뭐든 잘 하니까.
켄드릭은 솟구치는 의구심을 최대한 억누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발레리, 취한 거 알아. 그래도 이 말만큼은 기억해 줘.”
“술 다 깼는데.”
“오늘부로 우리 우정은 끝이야.”
“야, 무슨 그런 서운한 말을 해…? 내가 잘못한 건 알지만….”
발레리는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본인이 유죄란 걸 빤히 알면서도.
작지 않은 사고였다.
그래도 오랜 기간 쌓아온 친구 관계를 하루아침에 무산시킬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켄드릭은 서글픈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발레리, 난 원래부터 우정 아니었어.”
“…뭐?”
“열다섯 살 때부터.”
열다섯 살 때라면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켄드릭이 발레리의 성별을 알게 된 시점이다.
발레리를 처음 알고 3년 동안, 켄드릭은 그녀가 동갑내기 소년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지금 무슨….”
발레리는 기어드는 소리로 어물거렸다.
지금껏 켄드릭이 보여준 호의가 우정에 기반한 게 아니라면.
‘…뭐야, 네가 날 좋아했다고? 그렇게 오랫동안?’
발레리의 동공이 새카맣게 벌어졌다.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밀가루를 한 움큼 집어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막혔다.
결국 한때나마 서로가 쌍방이었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켄드릭은 말문이 막힌 발레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맥없이 미소 지었다.
‘발레리, 넌 정말 몰랐구나. 그래. 너라면 모를 것 같았어.’
켄드릭은 방바닥 한가운데 떨어진 종이봉투를 주워 발레리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기습 키스에 놀라면서 떨어뜨린 물건이었다.
“이거라도 먹어. 빈속으로 잠들지 말고.”
봉투 안에는 마늘빵이 담겨 있었다.
“…술은 가져갈게. 잘 자.”
켄드릭은 책상에서 다시 술병을 집어 들고 씁쓸하게 웃으며 방문을 나섰다.
또다시 혼자 남겨진 방 안에서, 발레리는 찰흙 인형처럼 굳어 있었다.
***
발레리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코딱지만 한 방에서, 최근 한 달 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두 남자와 질펀하게 키스했고, 두 남자의 마음을 알아 버렸다.
“…켄드릭이나 황태자나, 이제 무난하게 지낼 방법은 없는 것 같네.”
발레리는 텅 빈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테렌스. 더없이 끌리지만, 진지한 연인 관계로 발전하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켄드릭. 남자로서 다가오는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한 번도 관능의 대상으로 여긴 적이 없었기에.
‘어차피 떠나면 내 곁엔 아무도 안 남을 텐데. 그만 생각하자.’
발레리는 헝클어진 마음을 다잡았다. 황궁에 들어온 이유를 거듭 되새기면서.
이제 그녀에겐 새로운 목표가 있었다.
황녀 프리다를 의뢰인 앞에 데려갔다가, 함께 황궁으로 무사히 돌아오는 일.
그 일만 끝나면, 발레리는 황궁을 떠날 예정이었다.
펠런 단원들과 함께 해외로 망명해 새 삶을 시작할 계획이니까.
그곳엔 아마 황태자도 없고, 켄드릭도 없겠지.
어쩌면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