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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89)화 (89/173)

89화

발레리는 초저녁부터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혼자 책상에 앉아 벽을 바라보면서.

“도적 일은 당분간 좀 쉬고 싶다. 황제 침실에 들어가는 건… 솔직히 좀 두렵네.”

그녀는 최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낮에는 황녀의 검술 스승으로, 밤에는 황제의 무기고를 뒤지는 도적으로.

밤낮없이 피로한 와중에도, 지친 몸과 마음의 틈새를 자꾸 비집고 들어오는 잡념이 있었다.

며칠 전에 석실 안에서 잠시 마주했던 그 사람.

첫인상만큼이나 냉랭해진 테렌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젠장. 왜 이젠 그 재수 없는 표정조차 잘생겨 보이는 거지. 나한테 냉정해진 건 잘된 일인데, 속상할 건 뭐냐고….”

그녀는 지금 자신을 담고 있는 이 방 자체가 원망스러웠다. 자꾸 그와 나눴던 입맞춤과, 그의 품 안에서 느꼈던 온기가 떠오르니 말이다.

발레리는 고개를 돌려 침대를 바라보았다.

테렌스를 그 위에 밀어 앉히고,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입술을 미친 듯 탐하던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와의 기억은 이제 침대 위까지 침범해 있었다.

그녀는 다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안주도 없이 럼주를 반 병쯤 마시니 눈앞이 어질거렸다.

“술 먹으니까… 더 보고 싶어. 선물은 잘 받았을까?”

발레리는 그의 침실 앞에 두고 온 선물 상자를 떠올렸다.

상자를 열어봤다면 무슨 얼굴이었을까.

─네가 날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그의 마지막 인사말은 잔인했다.

이렇게 칼같이 모른 척할 거였으면 작별할 때 이마에 키스는 왜 한 걸까.

발레리는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원하는 대로 되니까 좋아? 나도 당신이 이 정도로 그리워질 줄은 몰랐어. 무슨 고문 당하는 것 같아.”

찬연한 빛을 발하던, 그 보조개 가득한 미소를 다시 볼 날이 올까.

“아니, 헛된 망상하지 말자.”

발레리는 왼쪽 얼굴을 책상 위에 대고 엎드렸다.

눈을 감아도 잔상 속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미친 척하고 한 번만 와주면 좋겠다. 바로 문 열어줄 수 있는데.”

책상에 닿은 쪽 눈꼬리에 눈물이 방울방울 고였다.

발레리는 책상 위에 엎드려 그대로 잠들었다.

그녀의 왼뺨이 닿아 있는 메마른 나뭇결 위로 짜디짠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선잠이었다. 잠을 물의 깊이에 빗대자면, 복사뼈 부근에 찰랑거릴 정도로 아주 얕았다.

똑똑.

단 한 번의 노크에 발작하며 깨어날 정도였으니까.

발레리는 눈을 부릅뜨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본인이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부정하면서.

물론 그녀의 정신은 여전히 럼주에 푹 절어 있었다.

술기운을 빌어 눈을 붙인 지 불과 사십여 분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발레리는 부스스 책상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문 밖의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서.

가느다란 초승달이 짙은 먹구름에 완전히 삼켜진 밤이었다. 빛 한줄기 없는 채플 복도는 깊은 동굴처럼 침침하고 괴괴했다.

뿌옇게 흐려진 발레리의 시야로 얼핏 익숙한 인영이 잡혔다.

그녀의 두 눈이 깜빡임을 멈추었다.

새까만 눈동자 한가운데 한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며칠 전 차갑게 안면몰수하며 속을 박박 긁고 간 사람.

테렌스가 찾아와 있었다.

발레리는 확신했다. 이건 꿈이라고.

이렇게 먼저 찾아올 리 없었다. 잔뜩 상처받은 얼굴로, 한 달 동안 만나지 말자고 통보한 장본인이.

그가 입을 열어 인사를 하려는 것 같았다.

발레리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냥… 아무 말 하지 마. 꿈인 거 아니까.”

아무리 꿈이라 해도, 목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정말 밉고 서운한데, 너무 미안하고 또 반가워서.

발레리는 그의 왼손을 잡아끌어 방 안에 들였다.

그리고 문을 굳게 잠갔다.

곧바로 그녀는 그의 입술을 향해 돌진했다.

피곤한지 그의 입술은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발레리는 그것을 부드럽게 머금고 촉촉이 적셔 주었다.

그의 손에서 빠져나간 가벼운 종이봉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발레리는 짙은 독주 냄새를 풍기며 깊은 입맞춤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진입을 허하지 않았다. 

한참을 돌덩이처럼 굳어있을 뿐이었다.

발레리는 꿈에서마저 키스를 받아주지 않는 그에게 조금 짜증이 났다.

“나만 보고 싶었나…? 아니면 술 냄새나서 싫은가?”

그녀는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입을 비죽댔다.

“…….”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싫지는 않은 걸까. 거부하거나 밀어내지는 않는다.

발레리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채 고개를 갸우뚱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에 흐린 초점을 고정했다.

표정을 읽고 싶었다. 화가 나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어디가 불편한 건지.

하지만 꿈이라서 그런가, 도무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탁한 물에 깊숙이 잠긴 것처럼 의식이 혼몽했다.

정말이지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꿈속이니까 내 맘대로 할래.”

발레리는 그의 굳은 목에 코를 묻고 체향을 빨아들였다.

향기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낯선 향은 아니었지만 이전의 그와는 분명 느낌이 달랐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품 안의 온도는 이전처럼, 아니 이전보다 훨씬 따뜻했으니까.

그의 따스한 어깨에 뺨을 비비던 발레리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반쯤 풀린 눈으로 배시시 웃어 보였다.

이렇게 하면 키스해 주겠지, 기대하면서.

“후우….”

무거운 심호흡 소리와 함께 천천히 그의 입술이 내려왔다.

발레리는 입술에 와 닿는 포근한 감촉에 조용히 미소 지었다.

열린 잇새로 그의 혓몸이 천천히 진입했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그녀는 안도하는 마음으로 틈새를 활짝 열고 그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입술을 뗐다.

이상했다.

테렌스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느낌은 온데간데없었다.

뜨겁고 강렬하긴 했지만, 움직임이 뻣뻣하고 어딘가 어설펐다.

‘너무 오랜만에 해서 그런 건가. 그래봤자 얼마 안 지났는데.’

“이상해. 왜 이렇게 못하지.”

발레리는 제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어차피 꿈일 테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현실이 아니라, 자각몽 속의 허상일 테니까.

“…하.”

오기 섞인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가 포옹을 풀더니 대뜸 상체를 낮추고 발레리의 허벅지 뒤를 붙들었다.

번쩍, 하고 발레리의 몸이 위로 들어 올려졌다.

“어어…!”

발레리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몸이 별안간 허공에 붕 뜨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버둥거리는 발레리를 안아 들고 책상 위에 앉혔다.

곧바로 발레리의 입술 사이로 야수처럼 맹포한 키스가 쏟아졌다.

그는 발레리의 어깨를 부서져라 끌어안은 채, 계속해서 아찔한 깊이까지 침범해 들어왔다.

발레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가 이렇게까지 과격하게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눈을 꽉 감았다. 여기서 그가 조금만 더 깊이 들어온다면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키스가 버겁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으흑, 꿈속이라 그런가? 뭐가 이렇게 공격적이야?’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조금 귀엽기도 했다. 흥분해서 이성을 잃은 거라고 생각하니까.

발레리는 그를 진정시키려 허리를 살살 토닥였다.

그러자 격렬한 움직임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어깨에 둘려 있던 커다란 두 손은 이제 그녀의 양 뺨 위에 자리했다.

감겨 있던 발레리의 두 눈이 살짝 뜨였다.

‘꿈이라 그런가? 오른손으로도 만지네.’

달콤한 타액을 수차례 주고받고 나니 드디어 그의 움직임이 조금씩 유연해졌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해 볼까. 발레리는 맞물린 입술 틈새로 작은 신음을 흘리며 그의 뒤통수를 잡았다.

일순 그녀는 움직임을 멈췄다.

있어서는 안 될 무언가가 손끝에 걸렸기 때문이다.

‘뭐야? 머리카락이 이렇게 길었나?’

“…잠깐만요.”

그녀는 책상에서 내려와 침대맡의 기름등을 켰다.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서, 그녀는 자신과 입을 맞춘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하아… 발레리.”

한 남자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주 낯이 익은 남자였다.

테렌스는 분명히 아니었다.

두툼한 어깨. 뒤로 단정히 묶은 갈색 머리. 살짝 구깃해진 황실 기사 제복.

켄드릭이었다.

“으어어어억!”

발레리는 혼비백산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듯 허옇게 질렸다. 등줄기에 오싹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차가운 뱀이 온몸을 친친 감고 있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 입술을 맞대고 있던 사람은, 십년지기 친구 켄드릭이었다.

이 정도 충격이면 꿈에서 깨야 할 텐데.

오히려 의식이 선명해졌다. 온몸의 감각이 점점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거 꿈 아니잖아? 미친….’

발레리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며 쫙 편 두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양손으로 머리통을 감싸 쥐며 켄드릭에게 물었다.

“너, 네가 왜 여기 있어…?”

“왜냐니…? 나 붙잡고 끌고 들어온 건 너잖아.”

켄드릭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놀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켄드릭은 펄떡이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아, 내가 돌았지 돌았어….”

발레리는 마른세수를 하며 탄식했다.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입 안으로 소태처럼 쓴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후회막심 하는 듯한 그녀의 반응에 켄드릭은 의아했다.

“발레리, 혹시 너 나인 거 몰랐어?”

“…하아.”

“너, 나 말고 다른 사람인 줄 알고 한 거야?”

켄드릭은 살짝 부르튼 제 입술을 어루만지며 그녀를 추궁했다.

그의 날카로운 질문에 발레리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인 줄 알고 한 건 맞는데, 그걸 인정해 버리면 더 이상하잖아.’

“…아니.”

그녀는 울렁거리는 속을 꾹 누르며 시치미를 뗐다.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켄드릭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봤다.

“꿈에 내가 나왔다고 생각하고 키스했다는 거네. 그럼 네가 날 좋아한다는 결론이 나는데?”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발레리는 단호히 부정했다.

한때 그를 좋아하기는 했으나 그건 분명한 과거형이었다.

당시 그에게 품었던 감정은 티 없이 순수했다. 이런 종류의 스킨십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좋아하는 게 아니면, 네가 나한테 키스할 이유가 뭐가 있는데?”

“취해서 그랬어. 미안해. 내가 실수했어.”

발레리는 파리처럼 두 손을 이마 앞에 모으고 연신 비벼댔다.

자존심 따윈 버리기로 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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