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발레리는 잡화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다른 물건들을 한참 살폈다.
아련한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오르골, 이스티아산 실크로 짠 에스닉한 패턴의 스카프, 생화 같은 장미가 주렁주렁 달린 칵테일 모자.
그럴듯한 모양새의 물건이었지만 무엇 하나 마음에 쏙 드는 게 없었다.
“…황녀님 취향을 잘 모르니까 고를 수가 없네.”
발레리는 별다른 수확 없이 잡화점을 나왔다.
누군가의 생일선물을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은 몰랐다.
다시 상점가를 배회하기 시작한 그녀는 한 곳에 시선을 빼앗기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무명 화가들의 그림을 파는 작은 갤러리.
발레리는 진열대에 놓인 풍경 사진들을 바라보며 홀린 듯 그 안으로 입성했다.
“안녕하세요. 천천히 눈으로만 구경해 주세요.”
갤러리 관리자로 보이는 여성은 군복을 입은 발레리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발레리는 그녀에게 찡긋 웃어 보인 뒤 그림이 담긴 액자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이거 벽에 붙이면 딱 창문 달린 것처럼 보이겠다. 저기, 사장님. 이걸로 주시겠어요?”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에 파스텔 톤의 봄꽃이 한가득 피어있는 그림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흰색 테이블과 의자가 놓였고, 가운데는 작은 분수도 있었다.
“네, 액자는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최대한 창틀하고 비슷한 걸로요.”
“창틀…? 그럼 장식 없는 나무 액자로 해 드릴게요. 액자까지 하면 450갈렌입니다.”
이름 모를 화백이 그린 그림이었지만 사실적인 그림인 만큼 생각보다 값이 나갔다.
장물아비를 상대하며 기른 흥정 실력을 발휘해 볼까 싶었으나, 그러지는 않았다.
‘황녀님께 드리는 건데, 물건값을 깎고 싶지는 않아.’
“네, 여기 450갈렌이요.”
발레리는 등에 지고 있던 자루에서 준비해 온 금화를 꺼내 내밀었다.
그녀는 그림을 한 팔에 끼고 갤러리를 나섰다.
상점가를 나와 황궁 쪽으로 향하던 발레리는 광장 한가운데 멈춰 섰다.
오늘 생일을 맞은 또 다른 한 명이 떠올라서.
“…주긴 줘야겠지, 나인 걸 모르게 하면 될 거야. 새벽에 황태자궁에 잠입해서 침실 앞에 놓고 가면 되려나.”
다만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뭘 사야 좋아할까. 상점들 문 닫기 전에 빨리 사야 할 텐데.”
발레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가 지고 달이 뜬 황성 시내 광장은 여전히 인파로 들끓고 있었다.
광장의 술집들은 벌써 취객들로 가득했다. 백성들은 본인들의 생일이라도 되는 양 축배를 들고 있었다.
그러고 있자니 테렌스와 함께 맥주잔을 기울였던 뒷골목의 술집이 떠올랐다.
얼마 전 두목 피어스와의 접선 장소이기도 했던 클라우드 나인.
“아,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그 사람이 가지고 싶어 할 만한 물건이….”
테렌스는 웬만한 물건을 모두 수중에 넣을 수 있는 신분이었다.
무리해서 값진 걸 사 주더라도 별 감흥이 없을 것 같았다. 딱히 물욕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고, 수집하는 물건도 없어 보였다.
“그 사람이… 뭔가를 가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발레리는 테렌스와 나눴던 대화 내용을 천천히 되짚어 봤다.
아, 생각나는 것도 같다.
그는 언젠가, 본인이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였지만.
***
발레리는 밤이 이슥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밧줄을 타고 황태자궁 담벼락을 가뿐히 넘었다.
무기고에 잠입할 때마다 착용하는 검은색 작업복 차림으로, 선물 상자가 든 묵직한 자루 하나를 등에 메고서.
그녀는 자세를 낮춰 황태자궁 뒤편으로 접근해 1층에서 열린 창문을 금방 찾아냈다.
창문 안에 고개를 들이밀고 인기척을 살핀 발레리는 그 안으로 휙 뛰어들었다.
눈을 감고 촉각을 한껏 곤두세웠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중앙궁에 비하면 보초 수가 현저히 적었다.
그녀는 뒤꿈치를 높이 세우고 소리 없이 계단을 올랐다. 한쪽에는 집무실, 다른 한쪽에는 침실이 있는 2층에 다다랐다.
드디어 테렌스의 침실 앞이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이런 종류의 잠입은 처음이라서.
“물건 훔치려고 하는 잠입이 아니라 물건 놓고 가려고 하는 잠입은 또 처음이네.”
눈앞에 보이는 이 거대하고 두꺼운 문 너머로, 아마 테렌스는 자고 있을 것이다.
자는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전에 이곳 집무실에서 그의 무릎을 베고 잠든 적은 있었지만, 그가 자는 얼굴은 보지 못했다.
괜한 호기심이 발동한 발레리는 귀를 쫑긋 세웠다. 코 고는 소리라도 들리지 않을까 싶어서.
물론 황태자궁의 깊은 밤은 고요하기만 했다.
발레리는 씁쓸히 웃으며 문 앞에 선물상자를 내려놓았다.
군화 끈 묶듯이 대충 매둔 푸른색 리본에는 작은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생일 축하」
그녀가 직접 쓴 글씨였다.
나름대로 정자로 쓰려고 한 흔적이 엿보였다.
“뭔가 예쁜 쓰레기를 주는 것 같긴 한데… 맘에 안 들면 버리면 버리겠지, 뭐.”
그녀는 창문을 열고 빠져나와 후원 잔디밭에 사뿐히 착지했다.
“이렇게 옷까지 갖춰 입었는데 무라도 썰고 들어가야지.”
***
이날 발레리는 황제의 무기고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보초 한 명은 졸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눈은 뜨고 있었지만 가수면 상태였다.
피어스가 건넨 수면 유도 약품도 가져왔다.
깨 있는 보초는 작은 휘파람 소리로 유인한 뒤, 슬금슬금 뒤로 접근해 약을 묻힌 천을 코에 댔다. 보초는 맥없이 쓰러져 잠에 빠졌다.
발레리는 이미 잠든 보초의 코에도 천을 대 더 깊이 잠재웠다.
그녀는 쓰러진 보초를 끌고 와서 잠든 보초와 머리를 맞대 놓았다. 마침내 두 사람이 사이좋게 문 앞을 지키다가 자연스레 잠든 것 같은 포즈가 연출됐다.
그녀는 편안한 마음으로 무기고 자물쇠를 따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 뭐야?”
무기고에 입성하자마자 새로운 상자들이 눈에 띄었다.
처음 보는 무기 상자가 무려 다섯이었다.
“…함정인가. 이거 너무 날 좀 잡숴 보소, 하고 놓여 있는데.”
문과 가까운 쪽의 선반에 보관하는 물건이라면 아마 자주 쓰일 무기라는 뜻일 것이다.
발레리는 다섯 개 중 가장 안쪽의 것부터 열어보았다.
그리고 반딧불이가 담긴 망사 주머니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검이었다. 검집과 날밑에 선명한 군청색의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고, 전체적으로는 플래티넘으로 세공돼 있었다.
“뭐야 이거… 황녀님이 쓰시는 검 아니야?”
칼 몸과 날밑, 자루 모두 상당히 유사했다.
자세히 보니 조금은 달랐다.
프리다가 쓰는 검은 자루 머리 부분에 다이아몬드 여섯 개가 박혀 있었지만, 이 검은 좀 달랐다.
다이아몬드는 없었고, 맨 아랫부분에 여신의 인장과 비슷한 눈꽃 문양이 음각돼 있었다.
분명 그 의뢰인이 피의 맹세 증표로 건넸던 그 펜던트에도 비슷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다만 이 검은 그 펜던트처럼 상서로운 빛이 감돌지는 않았다. 그저 화려하게 잘 만들어진 검일뿐.
혹시나 싶어 발레리는 검 자루를 쥐고 성호를 그어 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신의 인장은 일단 가짜 같아. 흠, 외형상으로는 여태까지 본 것 중에 제일 보검에 가깝긴 한데.”
발레리는 나머지 네 개 상자들을 하나하나 다 열어봤다.
내용물을 모두 확인한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왜 똑같이 생긴 검이 다섯 자루나 되는 건데?”
발레리는 검 다섯 자루를 모두 검집에서 꺼내 비교 분석을 시작했다.
반딧불이 불빛만으로는 역부족이어서일까. 아무리 뜯어봐도 다섯 개의 검은 서로를 빼다 박았다. 차이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가 진품이고 나머지가 복제품인가? 아니면… 다 가품인가? 다섯 개 전부 쓴 흔적이 아예 없어. 600여 년 전에 엘로이스 황제가 썼다고 보기엔 너무 새삥인데….”
발레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여기서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일단 두자. 나중에 이 중에 하나 가져가면, 진짜 보검을 못 찾더라도 할 말은 있을 거야. 이것도 말하자면 황실의 보검이기는 하니까.”
의뢰인이 ‘이 물건이 아니다’라고 하도 ‘이 물건인 줄 알았다’고 하면 면피용으로 둘러대면 될 테지.
“하, 그래도 확신이 드는 물건이 나올 때까지 보검은 계속 찾아야 하는데….”
이날 발레리는 새벽이 밝아오기 직전까지 무기고에 있는 모든 상자를 다 뒤졌다.
양손에 쇠 냄새가 밸 때까지.
그리고 결론을 냈다.
여기엔 그녀가 찾는 물건이 없다고.
그녀는 물건을 모두 원위치에 두고 무기고에서 빠져나와 자물쇠를 단단히 걸어 잠갔다.
“…여긴 이제 끝. 황제 침실은 사전답사를 철저히 한 뒤에 도전해야지. 잡히면 바로 켁이니까.”
쇠사슬의 위치도 감쪽같이 되돌려둔 그녀는 홀연히 사라졌다.
***
발레리는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프리다에게 그림을 선사했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만발한 그림 속 정원을 바라보며, 프리다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연분홍 튤립과 진분홍 바이올렛이 소담스럽게 핀 뜰. 살구색 장미 덩굴이 휘감은 울타리, 연보라색 라일락 꽃잎이 나부끼는 파란 하늘.
밝은 색조와 부드러운 필치. 어느 곳 하나 취향이 아닌 구석이 없었다.
“완벽한 그림이에요. 이거 벽에 걸어두면 진짜 창문 같겠다. 발레리, 정말 고마워요. 돌로 된 칙칙한 벽이라 그림 걸어둘 생각을 못했는데.”
“좋아해 주셔서 감사해요. 근데 어디에 거실 거예요?”
“연무장에 걸까 해요.”
“왜요? 침대 옆에 걸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볼 수 있을 텐데.”
“그것도 좋지만, 연습할 때마다 보면 의지가 좀 더 날 것 같아서요.”
그렇게 석실 연무장 벽 한가운데는 아름다운 가상의 풍경을 내비치는 창문이 하나 생겨났다.
발레리의 센스 있는 생일선물 덕에, 프리다는 한층 가벼워진 기분으로 검 자루를 쥘 수 있었다.
여느 때처럼 발레리는 단단히 무장하고 프리다를 상대했다.
그녀는 프리다의 발동작에 점점 가속도가 붙고 있음을 확인했다. 공수 전환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황녀님 발은 갈수록 빨라지네요. 요즘은 자세도 낮게 잘 유지되는 것 같아요.”
“흐흐, 혼자 다리 동작 연습 많이 했어요. 나같이 체구가 작고 힘이 약하면 발동작이 날래야 한다고 했잖아요.”
“네, 점프력도 좀 더 높이셔야 할 거예요. 제가 타점을 좀 높게 잡을 테니, 무릎에 용수철 심었다고 생각하시고 뛰어올라서 받아쳐 보세요.”
“응!”
프리다는 산토끼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제법 예리하게 칼날을 휘둘러 왔다. 정수리 가까이 올려 묶은 풍성한 백금발이 마치 전장의 승기처럼 찬란하게 휘날렸다.
발레리는 제자의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마주하며 방어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