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저, 프리다.”
“네, 어머니.”
“여신 축일에 입을 드레스는 네가 의뢰한 대로 재단사에게 맡겨 두었어.”
“감사해요.”
식욕이 동한 프리다는 여전히 천진한 얼굴로 케이크를 입 안에 떠 넣고 있었다.
테렌스는 포크를 놓았다.
곧 이어질 황후의 발언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정말 미안하지만, 사실 봉투를 뜯어서 내용물을 살펴봤단다. 네가 이번 축일에 뭘 입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서….”
“아아, 보셨어요?”
그제야 프리다는 포크를 내려놓고 황후의 말에 집중했다.
어머니가 안 봤으면 하는 생각에 디자인 의뢰서가 담긴 봉투를 밀랍으로 봉하긴 했지만, 그녀는 내용물을 들키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황제와 황후는 딸이 하고자 하는 일을 가로막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정말 예쁘고, 다 좋은데… 우려되는 부분이 있어서 말이야.”
“네, 어머니. 어떤 점이 우려되세요?”
“크림색도 아니고 순백색이면 오해를 사지 않겠니?”
“어머니, 오해 아니에요. 제가 의뢰한 건 웨딩드레스가 맞아요.”
프리다의 선명한 대답에 황후는 현기증을 느끼고 한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느닷없이 웨딩드레스를 주문한 이유를 물어야 하는데, 선뜻 그 질문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테렌스가 나섰다.
“프리다. 그러니까 웨딩드레스를 왜 주문했는지, 그 이유를 말했으면 하는 거야.”
“아….”
다시 포크를 집어 든 프리다는 말이 없었다.
그저 접시 위의 케이크 조각을 잘게 해체할 뿐이었다.
그녀의 사파이어빛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아가, 가족한테도 말 못 할 이유인 거니? 그래도 그 옷을 왜 입으려고 하는지는 말해줄 수 있지 않니? 우린 네 의사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 이미 드레스는 주문도 들어갔고.”
다소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딸을, 황제는 조심스럽게 달랬다.
프리다는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백성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제 모습이 어떤 모습일지.”
“그게…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이라는 거야?”
황후의 근심 어린 질문에 프리다는 다소 씁쓸한 웃음기를 머금었다.
“네. 스물넷, 아니 이제 스물다섯짜리 노처녀 황녀가 도대체 언제 시집 가나, 이게 가장 큰 관심거리인 분들이잖아요.”
“그렇다고 굳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걸 보여줄 필요는 없잖아. 결혼이야 나중에 또 언제든 할 수 있는 거고.”
“그 나중이란 게 없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럼 백성들은 평생 제가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 못 볼 테니까.”
“…프리다.”
황후가 애써 밝게 유지하던 표정은 대번에 와르르 무너졌다.
테렌스는 왼손으로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뱉었다.
정신이 아득해진 황제는 손수건을 꺼내 진땀을 닦았다. 딸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고통스러운 얼굴이었다.
어렴풋이 추측은 했지만 정말로 이런 이유일 줄이야.
딸이 아직도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마지막? 프리다, 너 설마 아직도 실패 가능성을 생각하는 거니? 또 그러는 거야?”
“네 맞아요, 아버지. 저 영원히 못 돌아올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만인 앞에서 마지막으로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 한 번쯤은─”
─짝.
프리다의 오른쪽 뺨이 발갛게 부어올랐다.
그녀의 뺨을 올려붙인 사람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에게 손찌검을 하는 건.
황후는 펄쩍 뛰며 황제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여보! 이건 정말 아니에요. 미안하다, 프리다. 네 아버지가 요즘 신경이 곤두서서….”
이미 시뻘겋게 달아오른 황제의 두 눈은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하나뿐인 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원망과 슬픔이 가득했다.
“넌 대체… 부모 속을 얼마나 뒤집어 놔야 정신을 차리려는 게냐.”
“백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준비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저는 모든 가능성을 생각할 뿐이에요.”
감정이 격해진 아비 앞에서도, 프리다는 그저 차분히 대꾸했다.
“…너는 신탁을 물로 보는 게야? 여신의 보검이 널 선택하는 것도 두 눈 똑똑히 뜨고 보지 않았느냐. 왜 아직도 그걸 못 믿고 자꾸 마지막이니 뭐니 그딴 망발을 해?”
“자꾸 실패하는 꿈을 꾸는 걸 어떡해요.”
“뭐?”
프리다는 수개월 전부터 반복해서 꾸는 꿈이 있었다.
그 꿈은 사나흘을 주기로 찾아왔다.
도무지 얼굴을 알 수 없는, 형체조차 뚜렷하지 않은 누군가와의 결혼식을 마친 뒤.
까마득한 심연 속에 잠겨, 눈앞에 켜진 불이 하나둘씩 서서히 꺼져가는.
이상하게도 그 과정은 무섭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았다.
고통이랄 것도 없이 오히려 편안하기까지 했으니.
프리다가 마지막에 대한 두려움을 떨친 건, 여러 차례에 걸쳐서 꾼 그 꿈이 완충장치가 되어 줬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희망과 의지를 버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성공 가능성을 더 굳세게 붙들려 노력했다.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수련에 임하는 이유였다.
주어진 모든 일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오고 싶은 의지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으니까.
이 땅에서 계속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으니까.
“프리다, 꿈은 꿈일 뿐이야. 고작 꿈 때문에 당장 내일 죽을 사람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어. 그런 말은 이제 그만해.”
테렌스는 피곤함이 역력한 목소리로 여동생을 나무랐다.
이미 그는 프리다로부터 꿈 이야기를 수차례 들은 바 있었다.
“…제가 처지를 비관만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누구보다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저 자신이니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거예요.”
“조금이라도 낙관적인 자세를 보여주면 안 되는 거니? 네 승리는 예언된 일이야. 난 그걸 의심치 않는다.”
황후는 애끓는 심정을 삭이며 딸을 격려했다.
“어머니, 그냥 전… 제게 남은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싶을 뿐이에요.”
“그래, 웨딩드레스고 뭐고 네 멋대로 해도 좋다. 하지만 지켜보는 부모 마음도 생각해야지. 제발, 제발, 앞으로 마지막이란 말만큼은 꺼내지 말아 다오. 못난 아비의 부탁이다.”
황제는 딸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간절히 당부했다.
“…알았어요, 아버지. 안 그럴게요.”
프리다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제와 황후는 양쪽에서 딸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황제는 아직도 붉은 딸의 뺨을 어루만지며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흐흑… 미안하다. 아비가 잘못했다.”
“아니에요, 아버지. 이해해요. 무슨 마음이셨을지.”
프리다는 고개를 숙였다.
테렌스는 위로의 표시로 여동생의 손등에 왼손을 얹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다른 경우의 수를 상상하면서.
만약 보검이 프리다가 아니라 자신을 선택했다면. 그랬다면 과연 이 아이처럼 의연한 태도로 임할 수 있었을까.
‘아니, 난 너만큼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실력이 너보다 낫다 한들, 그곳에 가는 건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니까.’
***
고요한 가운데 석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가장 먼저 나온 사람은 황후 레베카였다. 그녀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수건으로 훔쳐내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황제가 나왔다. 혈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핼쑥한 얼굴이었다.
뒤이어 등장한 테렌스는 딱히 표정 변화가 없었으나 평소보다 서릿발이 서 있었다.
세 사람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문지기들은 잔뜩 기합 든 자세로 이들에게 경례했다.
황제와 황후는 고개를 까딱여 문지기들의 인사를 받아준 뒤, 망토를 머리 위에 푹 눌러쓰고 나선형 계단을 올라갔다.
테렌스는 잠시 뒤돌아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부모를 뒤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이 분위기 뭐지…? 켄드릭, 나 일단 들어가 볼게.”
켄드릭의 곁에 서 있던 발레리는 열린 석실 문 안으로 잰걸음을 쳤다.
황제와 황후가 죽상으로 나왔으니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 싶어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프리다는 햇살을 맞은 접시꽃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족들과의 생일 파티가 마냥 즐겁기만 했다는 듯이.
“헤헤, 얼른 앉아서 케이크 먹어요. 우리 가족들이 다들 입이 짧아서 내가 제일 많이 먹었네요. 발레리, 먹을 만큼 덜어 먹고 남은 건 이따가 문지기들 나눠 줄래요?”
“아아, 네 그럴게요.”
발레리는 조심스레 프리다의 눈치를 살피며 의자에 앉았다.
뭘까. 분명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단란한 분위기의 생일파티였다. 지금 황녀의 표정도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럼 왜 방금 나간 사람들은 세상을 다 잃은 듯한 얼굴이었던 거지? 황태자도 아까보다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였는데.’
발레리는 혼란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홍차를 한 입 머금은 프리다는 맞은편에 자리 잡은 발레리를 향해 연신 생글거렸다.
‘궁금해도 여쭤보질 못하겠네… 웃음 뒤에 뭔가를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
***
발레리는 퇴근 후 곧바로 황궁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특유의 가뿐가뿐한 걸음걸이로 황성 시내 중심가에 이르렀다.
오늘 황궁은 연회도 없고 평소와 같았다. 하지만 바깥에 나와 보니 풍경이 달랐다. 모든 상점이 약속이라도 한 듯 황태자와 황녀의 탄신일을 기념하고 있었다.
식당이나 잡화점이나 무기점이나 너 나 할 것 없이 대문짝만 한 현수막을 걸었다. 황태자와 황녀의 탄신일을 축하한다며. 곳곳에 묶인 푸른색 리본과 분홍색 리본이 초가을 바람에 살랑거렸다.
“황궁은 조용한데, 바깥은 대목이네.”
발레리는 한참을 두리번거린 끝에 깔끔한 분위기의 잡화점에 들어섰다.
이곳에선 테렌스와 프리다의 초상화가 그려진 컵과 접시 등이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발레리는 진열대에 바짝 다가섰다.
테렌스의 얼굴은 그림 속에서도 냉기를 뿜었다.
베테랑 예술가가 꼼꼼히 설계해서 조각한 듯한 얼굴이었다. 뚜렷하면서도 섬세한 이목구비. 가차 없이 냉혹해 보이는 연청색 눈동자. 인중에 바늘을 꽂아도 꿈쩍 안 할 것 같은 무표정.
그래, 테렌스의 첫인상은 분명 이랬었다. 그를 좀 더 알게 되기 전까지는.
“초상화가 어째 실물을 영 못 담네.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인데.”
테렌스의 얼굴이 선명히 그려진 접시 표면을 응시하며, 발레리는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검지로 살살 쓸었다.
분명 이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떨어졌었다.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을 거야. 진심으로 다가오는 사람한테 말 같지도 않은… 좋아하지 말라는 말을 해 버렸으니까.’
“거기 군인 양반, 안 살 거면 만지지 마쇼. 그러다 깨먹은 손님들이 여럿이라.”
“아, 네.”
상점 주인의 핀잔에, 발레리는 숙연해질 틈도 없이 바로 접시에서 손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