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황녀님, 근데 탄신 연회 같은 건 안 하세요?”
“알다시피 나 못 나가잖아요. 여기 살면서부터는 탄신 연회 생략하고, 여기서 가족끼리 조촐하게 촛불 껐어요.”
“아….”
“사실 오빠는 탄신 연회 해도 될 텐데, 나도 없는 자리에서 굳이 큰 행사하기 싫다고 안 하더라고요. 어차피 건국제 기간이라 바쁘기도 하고.”
테렌스가 제 탄신 연회를 5년째 생략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여동생이 자유의 몸이 아니라는 이유로.
물론 본인의 의사겠지만, 발레리는 왠지 그가 측은했다.
“…그래서 대신 기념품으로 쿠키 돌리시는 거예요?”
“아, 벌써 받았어요? 맞아요, 황실에서 기념품 돌리는 걸로 대신하고 있어요. 그거 되게 맛있으니까 꼭 먹어봐요.”
쿵쿵.
이미 다 먹어 치웠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석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발레리는 흠칫하며 문 쪽을 바라봤다.
프리다가 종을 울리자 황제 부부가 어깨에 망토를 걸친 채 등장했다.
몇 초 뒤 테렌스도 뒤따라 들어왔다.
곧바로 그와 시선이 맞닿자 발레리의 심장은 요란하게 고동쳤다.
그녀는 홱 뒤돌아서서 가슴팍을 부여잡고 후우─ 하고 심호흡했다.
“오셨어요, 어머니, 아버지. 오빠도 잘 왔어.”
“그래, 우리 딸 잘 있었지?”
황제와 황후는 교대로 딸을 안아주었다. 테렌스는 포옹 대신 여동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발레리는 가족 상봉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에게 예를 갖추었다.
“오, 로빈슨 양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네,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황제의 안부 인사에 발레리는 잔뜩 기합 든 목소리로 답했다.
“로빈슨 양, 저번보다 약간 야윈 것 같은데. 프리다가 밥을 잘 안 주나요?”
“아닙니다, 매끼 푸짐하게 챙겨 주십니다. 하하.”
황후의 장난스러운 질문에 발레리는 머쓱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자연히 그녀의 눈은 테렌스로 향했다.
부모가 한 마디씩 했는데, 그도 무슨 말을 하지 않을까 해서.
그러나 테렌스는 굳게 입을 다문 채 테이블에 착석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전 나가 있겠습니다.”
발레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들에게 경례했다.
“어? 아가씨도 같이 있지 그래.”
“그래요, 로빈슨 양. 한 명이라도 더 축하하면 좋을 텐데.”
황제와 황후가 말로 그녀를 붙잡았다.
“발레리, 이거 케이크 되게 맛있는데. 이리 와서 앉아요!”
프리다는 생크림을 손가락에 찍어 먹으며 발레리에게 손짓했다.
테렌스도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발레리는 그의 건조한 시선을 피하며 두 눈을 내리깔았다.
“아, 아닙니다. 저는 이따가 따로 축하드리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발레리는 철문 밖으로 빠져나와 문지기들이 있는 복도 쪽에 섰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부모 형제와 함께 하는 생일 파티는 저렇게 단란한 분위기구나.
저 행복을 깨뜨릴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일가족을 슬픔에 잠기게 하는 일은 막아야 하는데.
발레리는 주먹을 꽉 쥐며 속으로 다짐했다.
얼마 전 술에 취해 석실에 찾아가 맹세했듯, 목숨을 바쳐서라도 황녀의 안전을 꼭 책임지겠다고.
“왜 나와? 생일파티 같이 해 드리지.”
문에서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켄드릭이 발레리에게 물었다.
“아… 가족끼리 있는데 내가 끼면 어색할 것 같아서.”
“흠, 그래도 케이크는 꼭 먹어. 가지러 가는데 주방장님이 역대급 걸작이라면서 엄청 생색내시더라.”
“어, 그래야지.”
발레리는 켄드릭의 옆에 서서 파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다.
어차피 금방 끝난다고 했으니, 올라가기보단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러고 있자니 자연히 테렌스의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본체만체 하는 건… 저 사람도 날 정리하려고 그러는 거겠지. 그래, 잘 됐어. 어차피 나도 그러자고 다짐했었잖아.’
심장 한가운데가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쿡쿡 쑤셔왔다. 따끔한 통증이 가슴을 타고 온몸 곳곳으로 번져갔다.
눈을 감고 있는 발레리의 앞에, 자주색 원통형 모자를 눌러 쓴 마법사 하나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저기, 로빈슨 양.”
“…네?”
게일이었다.
켄드릭이 없을 때 프리다를 모시는 보조 집사이자, 석실 문지기 가운데 막내이기도 했다.
발레리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한 그의 앳된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 저는 게일 미들턴이라고 합니다. 아카데미 651기로 졸업했고 나이는 스물하나예요.”
뜬금없이 무슨 자기소개지. 당황한 발레리는 곁에 선 켄드릭과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켄드릭도 이 마법사가 왜 이럴까,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했다.
“음, 제 이름은 발레리고요. 아카데미는 안 나왔고 나이는 스물둘이에요.”
“앗, 저보다 한 살 많으시네요.”
“네.”
발레리는 자신보다 손가락 두 마디쯤 작은 게일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녀의 얼굴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침묵과 함께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켄드릭은 여전히 쭈뼛대고 있는 게일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게일 님, 발레리한테 무슨 볼일이 있습니까?”
“아, 아니 그게….”
켄드릭의 질문에 게일은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고 진땀을 흘렸다.
무슨 용건인 건지, 게일은 발레리를 앞에 두고 우물쭈물하기만 했다.
답답한 광경이었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30여 명에 달하는 제삼자한테도 그랬다.
게일을 보다 못한 문지기들은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이 게일, 데이트 한 번 하자는 소리가 그렇게 어려워?”
“그래, 아가씨. 쟤가 좀 숙맥이라 그렇지 착한 애야. 미들턴 백작가 막내아들인 건 알 거고. 아가씨 신분에 손해 볼 거 하나 없으니 속는 셈 치고 만나 봐.”
“쟤가 아가씨 드레스 입은 걸 보고 아주 침을 질질 흘리더라니까. 그러게 좀 여자처럼 하고 다니지! 쭉 뻗은 몸매 칙칙한 군복으로 가리지 말고.”
조언으로 위장한 군소리가 복도에 소란스럽게 울렸다.
발레리의 미간이 꾸깃해졌다.
무슨 말부터 반박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다.
‘하, 일단 눈앞의 데이트 신청부터 거절해야겠지.’
“게일 님, 호의는 감사하지만 저는 딱히 연애 생각이 없어서요.”
“아….”
“저 말고 다른 좋은 분 만나시길 바랄게요.”
“네….”
칼 같은 거절 멘트였다.
게일은 호되게 혼난 어린아이처럼 귀밑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리고 기사님. 저는 아가씨이기 전에 군인이에요. 공식적으로는 황궁 병사니까 본분에 맞는 옷을 입는 거고요. 제 쭉 뻗은 몸매가 군복에 가려지든 말든 기사님께서 상관하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발레리는 차분하게 제 할 말을 쏟아냈다.
몸매 발언의 주인공인 기사 바제프는 무안한지 얼굴이 벌게졌다.
“거, 기분 상했다면 미안해요. 그냥 난 꽃 같은 아가씨가 그러고 다니는 게 안쓰러워서….”
칭찬으로 들을 줄 알았는데. 그녀의 가시 돋친 반응에 당황한 바제프는 뒷머리를 긁으며 사과했다.
“안쓰럽다니요, 바제프 경. 발레리는 저희처럼 검의 길을 걷는 검사입니다. 꽃 같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경 보기 좋으라고요?”
켄드릭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바제프를 몰아붙였다.
바제프가 자신보다 기사단 입단 시기가 5년이나 빠른 선배라는 사실을 잊은 듯한 언사였다.
“아니, 그런 말은 아닌데…. 아무튼 정말 미안해요, 로빈슨 양.”
바제프는 결국 고개를 까딱 숙였고, 발레리는 얼떨떨하게 미소하며 사과를 받았다.
이제 켄드릭의 매서운 눈초리는 게일로 향했다.
“그리고 게일 님,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여인에게 구애하는 건 무례한 처사입니다. 다른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거절하는 게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켄드릭 경. 제가 마음이 급해서….”
켄드릭의 옆에 서 있던 발레리는 적잖이 당황했다. 대뜸 그가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는 게 이상했다.
‘뭐야. 이 미친놈이 본인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급발진해? 기사단 선배들도 수두룩한 자리에서….’
그녀는 얼른 팔꿈치로 켄드릭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야, 거기까지 해. 네가 2절까지 하니까 분위기 험악해지잖아.”
“하….”
켄드릭은 신경질적으로 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는 이렇게 반박하고 싶었다.
화가 나는 걸 어떡하냐고. 네가 왜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냐고.
마음 같아선 게일을 좀 더 다그치고 싶었지만, 그는 울화를 삼키며 입을 꾹 다물었다.
발레리가 여기까지 하라는데 별수 있나.
긴장 가득한 대화가 마무리되자 복도 전체에 삭막한 정적이 감돌았다.
문지기들은 꼿꼿이 서서 칼같이 대열을 맞추고 있었다.
황제와 황후, 황태자가 머지않아 나올 테니까.
여느 때처럼 흐트러진 대열로 있을 순 없었다.
***
석실 안에선 쌍둥이 남매의 생일 파티가 이어졌다.
성악이 취미인 황후가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고, 황제는 아내의 공연을 보며 아이처럼 손뼉을 쳤다.
그들 앞에서 테렌스와 프리다는 함께 촛불을 껐다.
남매의 나이는 이제 스물다섯.
통념상 아들은 혼기가 꽉 찼고, 딸은 혼기를 완전히 넘겼다.
프리다는 작은 입을 쩍 벌리고 제 주먹만 한 케이크 조각을 욱여넣었다.
“음…! 주방장이 신경 많이 썼다더니, 진짜 맛있네요. 생크림이 정말 신선해요.”
그녀는 입가에 크림을 잔뜩 묻힌 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매일같이 발레리와 함께 식사하더니 식습관까지 닮아가는 건가. 테렌스는 식성이 좋아진 여동생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프리다, 왜 쓸데없이 2단 케이크를 주문했지? 거의 다 남을 텐데. 버리지 말고 이따가 문지기들한테 나눠 줘라.”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거든. 나라고 생각 없이 주문한 게 아니라고.”
오라비의 잔소리에 프리다는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황후 레베카는 투닥거리는 남매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직 포크를 들지 않은 채였다.
눈앞에 황제가 친히 덜어준 케이크 조각이 놓였음에도.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사실 황후는 발레리가 자리를 피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딸에게 긴히 물어볼 사항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