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초가을의 청명한 햇살이 내비치는 오후.
중앙궁 대회의실에서는 최근 개막한 건국제의 조직위원회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날 회의는 언제나처럼 의장인 테렌스가 주재했다.
명목상 건국제의 총괄자는 황제였지만, 그는 사실상 테렌스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다. 황후 레베카는 부의장을 맡아 그를 도왔다.
테렌스는 무술대회와 육상대회, 사냥대회를 관장했고, 황후는 무도회와 예술대회, 요리대회를 주관했다.
육상대회 실무를 맡은 문화부 대신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 본선 진출자들이 곧 가려지는데, 기록관들이 좀 부족합니다. 지원자가 들어오는 대로 웬만하면 모두 선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테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신. 촉박하겠지만 선발 과정에서 배경 조사만큼은 철저히 해 주길 부탁합니다. 혹시 맡은 종목 선수들과 사적인 연결고리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테렌스의 엄격한 당부에, 대신은 그의 말을 수첩에 바로 적어 넣었다.
이제 황후가 발언할 차례였다.
“건국제 무도회 초청장 발송 작업이 내일 중에 마무리된다고 했었죠. 발송 전 최종 확인 작업은 언제 진행되죠?”
“오늘 오후에 할 예정입니다, 폐하.”
체신을 담당하는 차관보가 즉시 답했다.
가면무도회가 주제로 등장하자, 고위 관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다들 할 말이 많아 입이 간지러운 기색이었다.
“가면무도회라니, 누가 이런 아이디어를 낸 겁니까? 덕분에 우리 집 여인들이 아주 신났습니다. 안사람이 눈가 주름살 가릴 수 있다고 얼마나 좋아하던지….”
“휴, 아내가 젊은 귀족 영식하고 놀아나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등에 몰래 이름표라도 붙여놔야 할지….”
“대신께서도 참 공처가십니다, 하하하. 저희 안사람은 제가 놀아날까 봐 걱정하던데….”
고위 관리들은 수다의 장을 활짝 열어젖혔다.
신나서 떠드는 중년 남성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저도 걱정입니다. 가면무도회를 한다니까 안사람이 갑자기 드레스 디자인을 야시꾸리하게 바꾸지 뭡니까. 갑자기 자신감이 어디서 솟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고, 아내만 그러면 좋게요. 제 딸은 드레스 앞판을 아주 배꼽까지 팔 기세입니다.”
“어휴, 제 여식은 벌써 주문한 가면이 열 개가 넘습니다. 무도회 와중에 계속 바꿔 쓰겠다면서…. 제 아비 말고 누가 관심 가져준다고 그러는지, 원.”
머리가 하얗게 센 재상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이들의 대화를 흐뭇하게 지켜봤다.
그는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넉살 좋게 미소했다.
조직위 회의 분위기가 이렇게 화기애애해진 건 오랜만이었다.
의장인 테렌스가 워낙 진지한 성격이다 보니, 그동안은 농담할 분위기가 전혀 조성되지 않았다.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재상은 옆자리에 앉은 테렌스를 한 번 슥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가씨들이 들썩거리는 게, 다 황태자 전하께서 미혼이라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허허, 맞습니다. 아 참 전하, 이번에도 첫 춤은 볼드윈 공작가 영애랑 추시겠지요? 당연히 그러시겠지만 제 여식이 꼭 확인해 보라고 해서…. 아무래도 줄을 서야 하니까요. 이거 뭐 번호표라도 배부해야 할지….”
이제 회의장의 모든 이들이 밝은 얼굴로 테렌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한 번도 웃지 않은 사람은 테렌스가 유일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서늘한 얼굴로 답했다.
“춤은 안 추려고 합니다.”
“아니, 전하. 모처럼의 가면무도회인데 춤을 안 추시다니요.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으신 겁니까?”
무도회 때 춤을 추지 않겠다는 테렌스의 선언에, 재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없습니다.”
칼 같은 단답이었다.
관리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증발했다.
한껏 들떠 있던 대회의장 분위기는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숙연해졌다.
“…요리대회 본선 말이에요. 참가자들한테 양고기 요리는 배제하라고 공지해야 할 것 같아요. 심사위원인 이스티아 대사가 양고기를 못 먹는다고 해서.”
황후 레베카의 발언으로 논의는 금방 본론으로 들어섰고, 회의는 이십여 분 만에 끝났다.
관리들은 황후와 테렌스에게 인사한 뒤 하나둘씩 회의장에서 빠져나갔다.
테렌스는 마지막까지 남아 관리들이 제출한 보고서를 훑었다.
이제 모두 나가고 황후 레베카만이 그의 옆에 남았다.
“테렌스,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니? 몸이 너무 안 좋아 보이는구나.”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네 아버지가 프리다 일에 몰두하다 보니, 건국제 일이 전부 너한테 넘어가게 되네. 미안하다.”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많이 도와주시는 덕에 한결 낫습니다.”
피로에 찌든 와중에도 어미에게 예의를 차리는 아들의 모습에 황후는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하나뿐인 아들은 도통 속내를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황후는 어미의 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가 많은 감정을 억누르며 살고 있다는 것을.
테렌스가 이렇게 자란 건 어쩌면 내 탓이 아닐까.
황후는 잠시 테렌스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아이였던 테렌스가 울음을 터뜨리거나 칭얼거릴 때는 늘 엄하게 다그쳤다.
약골로 태어난 딸 프리다에게 신경을 쏟는 와중에, 테렌스까지 덩달아 울어 버리면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값비싼 장난감이나 재미있는 동화책을 안기며 달래 줘도 테렌스는 곧잘 흥미를 잃었다.
늘 프리다의 것을 탐내며 빼앗고 싶어 할 뿐.
황후는 테렌스가 심술을 부릴 때마다 늘 이런 말을 했다.
─테렌스, 너는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니?
결국 테렌스는 황후의 손에서 벗어나 대부분의 시간을 유모와 함께 보냈다. 유모는 황제의 지시에 따라 테렌스를 엄격하게 길렀다.
테렌스가 울지 않는 아이가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느 정도 자란 후엔 더 이상 프리다의 것을 탐내지 않았다.
그 부작용인지 감정까지 잃어버렸다.
바로 지금처럼.
아들의 옆모습을 지그시 지켜보던 황후는, 회의실 문간에 서 있던 레이븐에게 문을 닫아달라고 손짓했다.
테렌스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문이 꽉 닫히는 소리가 났다.
황후는 연갈색에 가까운 짙은 금발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녀의 깊은 한숨소리에, 테렌스는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프리다 말이야.”
“…프리다한테 무슨 일이 있습니까?”
“별건 아니고, 걔가 여신 축일에 입을 드레스 주문서를 보내왔어.”
“네.”
“그런데 그 디자인이….”
황후는 말을 멈추고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혹시 너무 과해서 그러십니까? 보기에 좀 그렇더라도 원하는 걸 입도록 해주시는 편이 좋을 텐데요.”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게 아니라면 왜 그러시는지….”
황후는 진주로 장식된 손가방을 열더니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 안에선 프리다의 인장이 찍힌 서류 봉투가 나왔다.
황후는 그 속에 담긴 종이를 꺼내 테렌스의 앞에 내밀었다.
주문서였다.
순백색 드레스가 그려진.
어깨가 훤히 드러나고, 전체적인 실루엣이 종을 연상시키는 벨 라인 드레스였다.
진주와 다이아몬드를 어디에 어떻게 박을지, 어떤 부분에 레이스를 넣을지 세세한 사항도 적혔다.
명백한 웨딩드레스였다.
“…이건 혼례복 아닙니까?”
“이것만이 아니야. 넘겨 보렴.”
뒷장을 넘겨 보니 하얀 백합 열두 송이로 이뤄진 꽃다발 그림이 나왔다.
부케 주문서였다.
혼례복에 부케라니.
결혼식도 아닌데, 완연한 신부의 차림으로 그 많은 백성들 앞에 서겠다는 뜻이었다.
얘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테렌스는 여동생의 의중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크라바트를 풀어헤쳤다.
황후 또한 꽉 막힌 속을 다시금 한숨으로 달래며 프리다의 주문서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아무래도 내일모레… 너희 생일파티할 때 이유를 물어봐야 할 것 같아.”
“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나 석실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언제 방에 온 거지.”
숙취 속에 출근 준비를 마친 발레리는 문간에 세워둔 검을 집어 들고 방문을 열었다.
순간 문에 뭔가가 차이는 소리가 났다.
문 앞 바닥에 리본에 묶인 작은 종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작은 카드가 끼워진 채로.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의 스물다섯 번째 탄신일 기념」
발레리는 조심조심 상자의 덮개를 열었다. 마치 제 생일선물을 뜯어보듯 설레는 마음으로.
초콜릿 칩이 알알이 박힌 쿠키 열 개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두 분 생일인 것도 몰랐네. 난 아무것도 준비 안 했는데 어떡하지.”
그녀는 쿠키 하나를 꺼내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값비싼 버터 향이 입안 가득 밀려왔다. 다디단 부스러기가 혀끝에서 살살 녹았다. 향긋하고 쌉쌀한 초콜릿 맛이 기분 좋게 어우러졌다.
“맛있다. 해장되는 것 같네.”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며 한 개씩 집어먹다 보니 쿠키 상자는 금방 비었다.
그녀는 빈 상자를 문지기들이 쓰는 복도 휴지통에 던져 넣고 석실 안에 입성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테이블 위에 놓인 화려한 2단 생크림 케이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프리다는 그 위에 초를 꽂고 있었다. 긴 게 둘, 짧은 게 다섯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발레리.”
“생일 축하드려요, 황녀님. 저, 근데… 준비한 게 없어서 죄송해요. 생일이신 줄 몰랐어요.”
“에이, 내가 안 알려줬으니 모를 수도 있죠. 발레리랑 같이 생일을 보낼 수 있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큰 선물이에요.”
프리다는 미안해하는 발레리를 달콤한 말로 안심시키며 해사하게 웃었다.
발레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퇴근하고 황성 시내 나가서 작은 선물이라도 사 와야겠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 파티라도 하세요?”
“응, 곧 부모님이랑 오빠가 잠깐 와요. 다들 건국제 때문에 바빠서 초만 불고 가겠지만.”
발레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 공간에 테렌스가 들어온다는 소리였다.
“…오빠분이 온다고요?”
“응, 왜요?”
“아, 아녜요.”
발레리는 다른 쪽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마주치면 뭐라고 인사해야 할까.
어차피 황제 부부도 올 텐데 예를 갖춰서 해야겠지.
정말 황태자를 대하는 일개 병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