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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82)화 (82/173)

82화

“왜 안 되는데요? 서신 보니까 의뢰인이 아주 자신하던데요. 자기가 있는 데가 황궁보다 안전하다고. 그러면 저도 무사하지 않겠어요?”

발레리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황녀의 안전을 책임지는 건 본인이어야 했다.

“아니, 안 돼. 그건 내가 할 일이야.”

“두목이 계속 안 된다고 하시면 뒤에 따라붙을 거예요. 기억나시죠? 저 열두 살 때 혼자서 와이어 숲도 따라갔던 거.”

이미 발레리의 의지는 꺾을 수 없을 만큼 확고부동했다.

소중한 사람을 미지의 장소에 보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켄드릭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나라면 그럴 거야. 절대 혼자 안 보내. 끝까지 따라가서, 무슨 일 생기면 같이 싸워야지.

피어스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정말 왜 이러니, 발레리.”

“임무를 수락한 건 두목일지 몰라도, 수행하는 주체는 저예요. 제 임무를 제가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건데 뭐가 문제예요.”

“휴, 발레리.”

“제 성격 아시죠? 한다면 하는 줄 아세요. 그럼 이만 들어가 볼게요. 더 하실 말씀 있으시면 저번처럼 채플 방에 쪽지 넣으시고요.”

발레리는 제 계획을 못 박은 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피어스가 덩달아 일어나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그 손을 발레리는 매몰차게 뿌리치며 말했다.

“저 있잖아요. 납치 같은 짓은 안 할 거예요. 아직 시간 남았잖아요. 어떻게든 설득해서… 제 발로 나오시게 할 기회를 찾을 거라고요.”

“발레리, 강제로 데리고 나와야 할 가능성이 커. 그럴 때를 대비해야 한다. 내가 북부에 온 다른 이유기도 해.”

“…됐고요. 그분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만 알려 주세요.”

“하아, 일단은…. 프레이저 후작령의 메이벨 여관으로 오거라.”

“네.”

“하지만 발레리—”

발레리는 두목의 말을 댕강 끊어먹으며 쌀쌀맞게 뒤돌아섰다.

그녀는 담배 연기가 자욱한 홀로 나왔다. 그리고 카운터 선반 위의 술병들을 죽 훑었다.

스칼릿은 파이프 담배를 머금은 채 그녀를 관찰했다.

“아가씨, 술 땡겨요?”

“네.”

“골라 봐요. 너희 두목 찬스로 할인해 줄게.”

발레리는 망설임 없이 럼을 가리켰다.

“독한 거 좋아하나 보네? 두 병 줄게.”

“…너무 후하신데요?”

“나 처음 잡혀갔을 때 너네 두목이 보석금 내 줬거든. 그때만 해도 꽤 뜨거웠던 사이였어.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지만.”

“아하하, 네….”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돼 버렸다.

어쨌건 공짜 술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

어느 늦은 밤.

발레리는 석실로 통하는 나선형 계단을 비틀거리며 내려가고 있었다. 다리가 반쯤은 풀린 채였다.

물론 인지하고 있었다. 본인이 취했다는 사실을.

취하려고 마신 술이니까.

중간쯤에서 한 차례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질 뻔했다.

동물적인 운동신경이 발동한 덕에 간신히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하으, 십년감수했네….”

그다음부터 그녀는 벽을 짚고 천천히 계단을 밟아갔다.

한참을 내려간 끝에 드디어 복도와 석실 문이 보였다.

야간 순번인 문지기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그녀를 바라봤다. 이 밤에 웬 발소리가 들리나 했더니, 황녀의 검술 선생이었다.

야심한 시간에 나타난 것도 이상한데,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니 역한 술 냄새도 풀풀 났다.

이를 수상히 여긴 마법사 루퍼트는 발레리에게 다가와 물었다.

“검술 선생 아가씨, 이 시간엔 왜 왔지요?”

“아, 노랑머리! 문지기, 수장님, 끅. 이름이 음, 루퍼트였나…?”

발레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루퍼트의 샛노란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삿대질에 딸꾹질. 말도 뚝뚝 끊기는 걸 보니 이미 고주망태였다.

“네, 아가씨. 제가 루퍼트인 건 맞는데….”

“끅. 황녀님, 지금, 주무세요?”

“아직 안 주무시긴 하는데요. 술 깬 다음에 내일 다시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아가씨.”

주취자들은 으레 귀가 어두우니, 루퍼트는 또박또박 목청을 키워서 대답했다.

“아, 진짜 딱 한 마디만, 하고 가려고요. 저 어차피 바로, 요 위에 살잖아요. 금방 올라갈 거예요.”

“저, 아가씨. 지금 술 많이 취했어요. 알아요?”

“알죠, 알죠. 근데 제가, 진짜로 황녀님께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제발, 부탁이에요 수장님.”

루퍼트는 곤란한 얼굴로 노란 콧수염을 긁었다.

‘애주가 아가씨구먼. 저번에는 떡실신해서 켄드릭 경한테 업혀 들어가더니, 오늘도 만취해서 석실 앞까지 쳐들어오고.’

발레리는 두 손을 모아 비는 자세를 취했다. 아랫입술을 비쭉이며 애교 있는 표정도 지어 보였다.

막 오십 줄에 접어든 루퍼트는 피식 웃었다. 밖에서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 하는 짓이 제 딸과 똑같아서.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보니까 딱히 큰 주사를 부리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스스로 취했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고, 황녀가 평소 믿고 따르는 검술 선생이기도 했다.

“흠, 그럼 일단 황녀님께 여쭤보기는 할게요.”

루퍼트는 천천히 뒤돌아서서 석실 철문에 다가가 손을 가져다 댔다.

똑똑.

“…응? 이 시간에 누구죠?”

프리다의 청아한 목소리가 철문 틈새로 새어 나왔다.

“황녀님, 로빈슨 양이 찾아왔습니다.”

“네? 발레리가요?”

“예, 황녀님. 괜찮으시다면 문을 열어도 될까요?”

곧이어 석실 출입을 허하는 종이 울렸다.

끼익.

문이 열렸다. 그 틈새로 잠옷 차림의 프리다가 얼굴을 빼꼼 내놨다.

“발레리? 지금 시간에 웬일이에요?”

거의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발레리가 이 시간에 자신을 찾을 이유는 없었다.

발레리는 프리다를 보자마자 기세 좋게 석실 문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녀의 힘찬 돌진에 프리다는 석실 안으로 뒷걸음질 쳤다.

순간 발레리는 프리다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황녀님….”

“아아, 발레리. 술 많이 마셨구나.”

그녀에게서 풍기는 독한 럼주 냄새에, 프리다는 얼굴을 찡그리며 포옹을 풀었다.

문 틈새로 프리다와 눈이 마주친 루퍼트는 멋쩍게 웃으며 석실 문을 닫아 주었다. 주취자를 들여보내 미안하다는 얼굴이었다.

프리다는 발레리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눈에 초점도 없고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정말.

프리다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발레리. 나 오늘은 꼭 들어야겠어요.”

“네? 무얼요…?”

“무슨 일 있어서 술 마신 거죠? 요즘 들어 눈도 잘 안 마주치고, 저번에는 푸딩 먹다가 울고. 혹시…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요?”

그때였다. 발레리의 양쪽 눈에서 굵은 물줄기가 투두둑 흘러내렸다.

그녀에겐 비수처럼 꽂히는 질문이었기에.

깜짝 놀란 프리다는 발레리에게 다시 바짝 다가가 팔목을 붙잡았다.

“발레리? 왜 갑자기 울고 그래요?”

“네, 잘못했어요…. 정말, 정말 잘못했어요…. 흐엉….”

그녀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프리다는 하얀 옷소매로 그녀의 젖은 얼굴을 닦아주었다.

“…울지 말고 말해 봐요. 발레리가 나한테 뭘 잘못했을까요?”

프리다는 딱히 짐작가는 게 없었다.

발레리는 최근 들어 정신적으로 힘들어 보이긴 했지만, 검술 선생 역할은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실수랄 것도 없었고.

또다시 발레리는 프리다의 두 어깨를 잡고 확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프리다는 반쯤 포기한 얼굴로 안긴 채 그녀를 올려다봤다.

“발레리, 술 냄새 나요.”

“…잘못, 할 것 같아요.”

“응…? 뭘 잘못한다는 거예요?”

“황녀님, 흐흑, 같이 가요….”

발레리는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늘어놨다. 목적어 없이, 앞뒤 맥락도 다 잘라먹고.

“같이 가다니? 어딜 말이에요?”

“몰라요, 몰라서 미치겠어… 그러니까, 그게 어디든, 저는 같이 갈 거예요. 끝까지, 지켜드릴 거예요. 으흑….”

그녀의 눈물 섞인 절절함에, 프리다의 사파이어빛 눈동자가 약간 동요했다.

“갑자기 왜 이래요. 내가 어딜 간다고….”

“제가, 무사히 지켜드릴 거니까. 무사히, 같이 돌아와요.”

“무사히… 돌아오라고요?”

“네, 꼭, 무사하셔야 해요. 제가,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꼭 지킬 거니까….”

목숨을 바친다니. 이건 무슨 의미일까.

프리다는 발레리의 풀린 눈동자를 주의 깊게 들여다봤다.

그 안에는 프리다 자신의 얼굴이 투명하게 내비쳤다.

“발레리, 혹시 뭘 알고 말하는 거예요?”

“제가… 잘 모실게요. 무사히, 돌아오셔야 하니까.”

프리다는 발레리의 기색을 살피며 그녀의 말뜻을 파악하려 애썼다.

정말 뭔가를 알고 이야기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지.

하지만 도무지 짐작 가는 데가 없다.

그 사이 발레리는 선 채로 젖은 눈을 꿈뻑이며 졸기 시작했다.

프리다의 어깨 위로 그녀의 상체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무게를 프리다는 이를 악문 채 버텼다.

“…나도, 나도 그러고 싶어요. 나도 무사하고 싶어요. 나라고 안 그러고 싶을까요.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검술 배우는 건데요.”

자조적인 얼굴로, 프리다는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술 냄새에 코가 적응됐는지 맡을 만했다.

프리다는 힘이 풀린 발레리의 몸통을 꽉 껴안은 채 침대 쪽으로 게걸음을 했다.

힘겹게, 낑낑대면서.

그녀는 침대 위에 발레리의 몸을 내동댕이치듯 내려놨다.

다행히 침대는 푹신한 편이라, 발레리는 큰 충격 없이 벌러덩 자빠졌다.

프리다는 제 자그마한 몸을 그 옆에 뉘었다.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발레리의 모습은 여느 때보다 친근해 보였다.

프리다 자신도 석실 생활이 괴로워 술에 의존하던 때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게 2년 전쯤이었다. 끼니는 건너뛰더라도 술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덕에 속도 다 버렸다.

황녀의 알코올 중독 증세를 뒤늦게 파악한 문지기들은, 석실을 샅샅이 뒤져 술병을 모두 압수해 갔다.

이후 기사들은 술을 달라는 프리다의 주문을 절대 받아주지 않았다.

프리다는 희미하게 웃으며 발레리의 자는 얼굴을 관찰했다.

그녀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음악 삼아서.

같이 가자고. 지켜주겠다고. 무사히 돌아오자고.

정말 알고 하는 말은 아닐 거야. 무슨 꿈이라도 꾼 거겠지.

황궁에서 내 행선지를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니까.

“발레리가 동행해 준다면 정말 든든할 것 같긴 해요. 근데 거기가 어딘지 알면…. 아마 안 가고 싶을 거예요.”

프리다는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 자국을 살살 닦아냈다.

“…거긴 정말 지옥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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