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크세니아로 배가 출항하기 전에 잠입해서 엿봤다. 책임자로 보이는 놈 하나가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하는데, 웬 가루가 그득하더라.”
피어스는 깊은 새벽 사피로스 강 부두에서 목격한 것들을 발레리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가루라면, 설마 마약이었던 거예요?”
“나도 마약인가 싶어서 눈을 부릅뜨고 봤지. 근데 시커먼 가루에 보라색 광택이 흐르더라고. 자수정인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어. 밤중에도 빛이 좀 묘하게 빛났거든.”
“뭘까요. 보라색 광택이 나는 가루가….”
“내 생각엔 마력석인 것 같다.”
피어스는 확신에 찬 어투로 대답했다.
“…에이, 마력석을 누가 가루처럼 갈아서 써요. 무기에 덩어리째 붙여야 마력 많이 나오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 하지만 가루 형태로 쪼개진 것들도 덩어리와 같은 질량을 모아놓으면 동일한 만큼의 마력이 붙는다.”
“아 그래요? 전혀 몰랐어요. 제가 마법 문외한이라서.”
발레리는 머릿속에 새로운 정보를 입력하며 피어스에게 바짝 귀를 기울였다.
“발레리, 북부 사탄 놈이 최근에 몰두하는 사업이 뭔지 아니?”
북부 사탄이란 볼드윈 공작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피어스는 공작에게 악감정이 깊었다. 워낙 영지민들에게 횡포가 심한 데다, 펠런 추적에 가장 열을 올리는 귀족이었으니.
암살단을 보내 펠런 단원들을 살해한 것도 내심 공작의 소행이라고 그는 짐작하고 있었다.
“흠, 북부 특산품은 공예품이랑 귀금속이잖아요.”
“요즘은 마력석 장신구가 대세다. 마력석을 보석처럼 깎아서 반지나 팔찌, 목걸이를 만드는 거지.”
“아아, 황성 시내에서 보호 마법 걸린 목걸이랑 반지 팔던데. 그게 공작령에서 나오는 거예요?”
최근 황성에서는 가벼운 보호 마법이나 행운 마법이 걸린 장신구가 막 유행하기 시작했다.
맥주 축제 당시 테렌스와 상점 물가를 조사하던 중에도 본 적이 있었다.
다만 장신구에 사용되는 마력석은 크기가 작은 데다, 모양을 깎고 색을 입히는 등 가공한 상태였기에 강력한 마법은 걸리지 않았다.
“열이면 아홉은 그럴 거야. 공작령에는 장신구용 마력석을 가공하는 장인들의 생산시설 단지가 있다. 사피로스 강하고 멀지 않은 곳에.”
“…냄새가 나는데요? 그 가루가 마력석 깎으면서 나온 걸 수도 있네요.”
“바로 그거야. 가공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알아보니 그 시설에 투입되는 마력석 대비 산출되는 장신구 양이 현저히 적더라고.”
피어스는 이미 대략적인 정황을 파악해 둔 상황이었다.
케빈 등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단원 몇 명이 공작령 곳곳에서 발품을 판 덕이다.
발레리는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아하, 두목이 잡은 게 밀수 현장일 수도 있겠네요. 마력석 수출은 나라에서 주관하잖아요.”
“맞아, 그리고 마력석을 가루 형태로 수출한단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마지막 애국이란 게, 볼드윈 공작 고발하는 거예요?”
발레리답게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피어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영 찜찜한 기색으로.
“허허, 그러려고 생각해 보니 똥 묻은 놈이 겨 묻은 놈 나무라는 꼴이더라. 단원들 망명시킨답시고 크세니아에 마력석 갖다 바친 건 나도 마찬가지잖니.”
“뭐 그건 그렇지만, 걔네랑 우리랑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적어도 우리 마력석은 칼레바니아산이 아니니 국부 유출까진 아니지.”
피어스는 들릴 듯 말 듯 작게 혼잣말을 했다. 그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한 발레리는 미간을 좁혔다.
“네? 목소리 좀 키워 주세요.”
“아, 아무튼 크세니아가 마력석을 부득부득 긁어모으고 있다는 것까진 파악됐어. 우리가 제시한 마력석 값을 제일 후하게 쳐줬고, 마력석 가루까지 은밀히 빼가고 있으니 말이다. 북부 사탄 놈도 그렇지만 그 나라도 참 뭐 하자는 꿍꿍이인지….”
속이 복잡해진 피어스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발레리는 양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고 그걸 눈감아 줄 수는 없잖아요. 펠런이 하는 게 로맨스라고 할 순 없지만, 남의 불륜은 고발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공작 엿 먹일 기회기도 하고요.”
“…그래서 말인데, 발레리. 혹시 황궁에서 안면 튼 관리가 있을까?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네 군인 상관이라도 괜찮을 것 같다.”
“흠, 위에다가 찔러 달라는 거죠?”
피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리가 입대한 지는 5개월이 돼 간다. 아주 높은 관리는 아니어도, 하급 장교 정도라면 제보를 상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높은 사람일수록 수사가 빨라지겠지만,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 일단 제보하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으니까.”
“…알아요. 높은 사람.”
발레리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음, 어느 정도 급의 관리니?”
“관리는 아니고요.”
“근위대 장교?”
“아뇨, 근데 만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한 달 정도….”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물론 방금 떠올린 사람은 테렌스였다. 어쨌든 그는 높은 사람이었다. 황실 관리도 아니었고 근위대 장교도 아니었지만.
‘그 인간이라면 진지하게 잘 들어줄 것 같아. 한 달 뒤에도 그래 줄지는 모르겠지만.’
건국제가 끝난 뒤에는 지금의 미묘한 관계가 좀 정리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쯤엔 서로를 덤덤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괜찮아. 당장 고발해달란 건 아니었어. 두어 달 동안 좀 더 증거를 수집해 보마. 일단 그 생산시설에 잠입해서 수색을 좀 해 볼까 해.”
“…위험하지 않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공작 저택보단 훨씬 진입이 쉬울 거다. 루카스랑 케빈이 그 생산시설에 위장 취업하려고 면접까지 봤어.”
“하하, 걔네한테 북부 억양 연습 좀 시키셔야겠네요….”
발레리는 힘없이 말끝을 흐렸다.
피어스는 그제야 발레리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다.
눈가에 그늘이 깔렸고,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았다.
“발레리, 왜 그러니? 혹시 제보가 부담스럽니?”
“아뇨,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근데 저도 제보하려면 증거나 증인이 있어야 할 텐데요.”
“다 수집되면 루카스를 보내마. 증거품과 함께.”
“알겠어요.”
“일단 크세니아로 간 놈들은 소식통이 돼 주기로 했어. 강 건너간 마력석 가루가 어디로 흘러들어 가는지 파악해 본다고.”
“네. 좋은 생각이네요.”
“그리고…, 나머지 놈들은 좀 손해 보는 셈 치더라도 크세니아로는 망명 안 보내련다. 아무래도 그 나라는 속이 검어 보여서.”
“잘 생각하셨어요.”
발레리는 여전히 힘 빠진 목소리로 피어스의 의견에 동의 표시를 했다.
일순 그녀의 머릿속엔 공작의 딸 에이바의 얼굴이 스쳤다.
딱히 우정을 나눈 사이는 아니었지만, 안면을 텄다 보니 마음에 약간 걸렸다.
만약 공작의 마력석 밀수출 정황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그녀는 무사히 황태자비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힘들 것이다.
그럼 테렌스의 곁은 다시 빈자리가 되는 걸까.
‘하,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
발레리는 문득 든 엉뚱한 상념을 몰아내려 도리질을 쳤다.
“…그나저나 발레리, 보검은 잘 찾아보고 있니?”
“중앙궁 무기고 계속 뒤지고 있었는데요. 한 번 들킬 뻔하는 바람에 보초가 두 명으로 늘었어요. 요즘 가보면 새벽에도 다들 귀신같이 깨어 있어서 접근을 못 하겠더라고요.”
“흠, 약을 써 봐.”
“저번에 주신 그 약병이요? 그게 뭔지 알아야 쓰죠.”
“아, 내가 설명을 빼먹었구나. 수면초가 들어 있는 마법 약제다. 천에 적셔서 접어둔 다음에, 한 명씩 유인해서 코앞에 대면 돼.”
“…알겠어요.”
별다른 정보 없이 황실의 보검을 찾기란 만만치 않은 과제였다.
황녀 프리다를 데려오라는 의뢰보다 심적 부담은 덜한 편이었지만.
“근데 그 보검, 엘로이스 황제가 마왕 물리칠 때 쓴 거 맞겠죠? 혹시 몰라서 황실 박물관 창고도 뒤졌는데, 거긴 무슨 놈의 도자기랑 그림밖에 없더라고요.”
“…건국 시조의 보검이니 박물관에 두기엔 너무 귀한 물건이긴 하지. 황제의 개인 금고를 찾아보는 건 어떻겠니?”
“개인 금고면 침실에 있을 텐데요?”
“응. 침실을 뒤져보라는 거다. 황제가 볼드윈처럼 제 방 창문에 쇠창살 달고 사는 건 아닐 테니까, 기회 봐서 줄 타고 잘 진입해 봐라.”
“…네. 일단 무기고부터 다 뒤져 보고요.”
개인 금고 뒤지는 게 굉장히 쉬운 일처럼 말씀하시네. 발레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의뢰가 아니더라도, 피어스는 유독 그녀에게 난이도가 높은 임무를 부여하는 편이었다.
그게 부담스러운 적도 있지만, 발레리는 한 번도 임무 수행을 거부한 적이 없었다. 두목으로부터 그만큼 신뢰와 인정을 받는다는 뜻임을 알았기에.
“아 참 두목, 시에나 여신 축일 말이에요. 황녀님이 바깥으로 나오는 유일한 날인데, 약속 시한까지 많이 이르지만 그날 움직여야 하는 걸까요?”
피어스는 발레리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황녀가 평소엔 전혀 실외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물론 정확히 어디에 기거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니, 여신 축일에는 안 된다고 한다.”
“네? 안 되는 건 뭐예요? 경비가 삼엄해서 불가능할 거란 생각은 했는데….”
“나도 사실 그날이 기회일까 해서 일전에 의뢰인한테 물었어. 한데 그날만큼은 황궁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면 안 된다더군.”
“왜요?”
“이유는 못 들었다.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런 거 아니겠니. 그날은 동향만 면밀히 주시해 줘.”
“…알았어요.”
피어스의 용건은 여기서 끝난 것 같았다. 발레리는 한동안 뜸을 들이더니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두목, 저 할 말 있어요.”
까만 눈동자에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
그녀는 오기 전부터 준비해둔 말이 있었다.
“응? 뭔데?”
“두목 대신 제가 갈래요.”
“어딜 말이냐.”
“의뢰인한테요. 내년에 약속 시한 되면, 제가 황녀님 모시고 직접 간다고요.”
발레리는 목청을 세우고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그만큼 확실한 의사 표현이었다.
피어스는 황녀를 자기 자신에게 데려오라 했었다. 황녀를 모시고 의뢰인 앞에 가는 건 본인 일이라면서.
하지만 지금 발레리는 그 일까지 떠맡으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느닷없는 통보에 피어스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안 된다, 발레리. 황녀님은 내가 모시고 가겠다.”
피어스는 단호하게 그녀를 막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