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테렌스가 집무실 의자에서 돌연 일어났다. 그의 왼손에 들려 있던 만년필이 책상 언저리에 툭 떨어졌다. 새카만 잉크 방울 몇 개가 바지에 튀었다.
“…이게 그렇게 놀라실 일입니까?”
레이븐은 우뚝 선 테렌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발레리가 그 자랑 술을 단둘이 마셨다는 건가?”
“아마도요? 아시잖아요, 그 둘이 원래 친한 거.”
“하, 그 방에 또….”
푸른 기가 도는 테렌스의 마른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레이븐은 아, 하며 그의 의중을 짚어냈다.
“전하께서 뭘 신경 쓰시는지는 이해하는데요. 그렇다고 주취자를 복도에 내팽개쳐 두고 갈 순 없잖습니까…? 그 말만 한 아가씨가 널브러져 있으면 아침에 출근하는 사제들이 기함할걸요.”
레이븐은 켄드릭을 열심히 변호했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한 발레리를 방에 데려다준 건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미치도록 싫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울컥 치밀었다. 달콤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그녀와 입을 맞추던 아늑한 방이었다. 둘만의 격정과 환희로 가득하던 공간에 그자가 또 발을 들였다니.
발레리를 대하는 그자의 눈빛은 담백한 듯하면서도 은근한 소유욕이 내비쳤다. 그녀에게 연심을 품었다는 사실을 밝혔을 때, 가시 돋친 태도를 숨기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후.”
때아닌 위기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간과하고 있었다. 자신의 공백이 누군가에겐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테렌스는 번연히 깨달았다.
그녀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자신이 유일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똑똑.
선명한 노크 소리에 두 남자의 시선이 문간을 향했다.
“아, 문화부 대신인가 봐요. 기획안은 다 보셨어요?”
“…거의 다 봤어. 일단 들어오라 해라.”
“네.”
“잠깐.”
테렌스는 레이븐을 다시 돌려세웠다.
“예? 또 왜요?”
“…내일 그쪽 주방장한테 일러둬. 한동안 석실에 들어갈 음식은 속에 편한 걸로 챙기라고.”
지금 그는 물리적으로 바빴다.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작은 배려뿐이었다.
“흠, 그게 다예요?”
“그래. 나가 봐.”
레이븐이 나가자마자 테렌스는 가슴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목덜미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속에서 절절 끓는 독점욕을 초인적인 힘으로 삼켜내야 했다.
‘난 늘 네 하루하루가 궁금하지만…. 사람을 붙여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
그는 이성의 끈을 꽉 부여잡고 이렇게 되뇌었다.
일단은 참아 보자고.
‘그래, 넌 누군가를 좋아할 생각이 없다고 했었지. 그럼 그자에게도 주어진 공간이 없을 거라고 믿는 수밖에.’
테렌스는 창백하게 식은 얼굴로 대신을 맞아들였다.
오늘 밤도 쉬이 잠들긴 어려우리라 직감하면서.
***
밤 아홉 시가 다 돼갈 무렵.
황궁을 빠져나온 발레리는 날랜 걸음으로 황성 시내에 들어섰다. 두목 피어스의 쪽지를 손에 쥔 채였다.
쪽지에 그려진 약도를 따라 걷다 보니 어디서 본 듯한 뒷골목이 등장했다.
그녀의 예감이 맞았다. 맥주 축제 때 건달 두 명과 맞닥뜨렸던 바로 그 으슥한 길이었다.
당시 기억이 눈앞에 선해졌다. 건달들을 호되게 제압한 뒤, 테렌스의 팔을 붙들고 황궁까지 냅다 달리던.
발레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목적지인 술집 앞에 다다랐다.
잠시 멍하니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 여기냐고요, 두목. 사람 속 뒤집어 놓으려고 아주 작정을 하셨나.”
테렌스와 함께 갔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땐 술이 마시고 싶어서 상호도 안 읽고 무작정 들어갔었다. 자세히 보니 빛바랜 나무 간판에 ‘클라우드 나인’이라는 글자가 음각돼 있었다.
발레리는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사뿐사뿐 밟아 내려갔다. 고개를 드니 눈에 띄는 곳마다 거미줄이 처져 있었다. 몸통 굵은 거미들이 이곳저곳에 기어 다녔다.
“거미 양식장이야 뭐야…. 거슬리게.”
문을 열자 요란한 풍경 소리가 귀를 때렸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험상한 손님들이 반 정도 차 있었다.
빵 모자를 비스듬히 눌러쓴 여성 점원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혼자예요? 아니면 일행이 있으신가?”
“…여기 주인한테 볼 일이 있는데요.”
“아, 발레리 씨? 따라오세요.”
주인이 점원에게 그녀의 방문 예정을 미리 일러둔 모양이었다.
발레리는 점원의 인도에 따라 주방 한구석에 있는 케케묵은 나무 문으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말쑥한 응접실이 나왔다. 한 중년 여인이 갈색 가죽소파에 앉아 있었다. 새카만 입술로 파이프 담배를 뻐끔대면서.
여인의 왼쪽 눈을 덮고 있는 황금색 안대가 기름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쪽이 발레리인가? 피어스가 수양딸처럼 키웠다던.”
퇴폐에 젖은 축축하고 나른한 목소리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발레리의 눈썹산이 갈매기 모양으로 흠칫 올라갔다. 처음 듣는 목소리지만 구면이었다.
여인의 안대를 보니 똑똑히 기억났다. 오른쪽 귀밑머리를 시원하게 밀어버린 걸 보니 확신이 갔다.
테렌스에게 브랜디 한 잔을 보내며 대놓고 추파를 날리던 그 여인. 전과 14범으로 한때 황성 암흑가를 주름잡았다는 그 여인.
이름이 뭐였더라….
스칼릿. 그래, 스칼릿이었다.
근데 이 사람이 술집 주인일 줄이야. 그땐 홀에 떡하니 앉아 있길래 그냥 손님인 줄로만 알았다.
“근데 아가씨, 어디서 나 본 적 없나?”
“아, 아뇨. 초면이에요, 하하.”
“흠, 낯이 좀 익은데. 일단 따라와요.”
스칼릿의 날카로운 기억력에 발레리는 다시 한번 속으로 흠칫했다.
그녀는 빳빳이 굳은 어깨를 돌리며 스칼릿을 조용히 뒤따랐다.
응접실 안에는 커다란 자물쇠로 단단히 잠긴 허름한 문이 하나 딸려 있었다.
스칼릿은 느슨하게 두른 힙 색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금방 문을 땄다.
“어쩌다 가둬놓는 꼴이 됐는데. 피어스가 자발적으로 감금 요청한 거니까 오해하지는 마, 아가씨.”
“네.”
말투를 봐선 피어스와 꽤 친분이 있는 듯했다. 그에게서 10여 년간 스칼릿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문이 열렸다. 발레리는 쭈뼛거리며 방 안에 입성했다.
사람 한두 명이 묵을 만한 여관방 같은 공간이었다.
“어, 왔니, 발레리?”
피어스는 약간 멋쩍은 목소리로 발레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으억! 두목?! 꼴이 그게 뭐예요?”
두목의 얼굴을 본 발레리는 충격 속에 사백안이 됐다.
피어스는 요상스러운 자태를 하고 있었다.
풍성한 긴 가발에 새빨갛게 칠한 입술. 성게 가시처럼 삐죽삐죽 돋아난 가짜 속눈썹. 그의 상징과도 같았던 풍성한 갈색 수염도 파르라니 깎여 있었다.
건장한 근육질 몸에는 새빨간 드레스가 커튼처럼 치렁치렁하게 걸쳐져 있었다.
발레리는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수염을 목숨보다 아끼던 두목이 여장이라니. 그것도 보통 여장이 아니었다. 스칼릿보다 훨씬 악독한 암흑가의 여인 같았다.
“…세상에, 어떻게 수염까지 미실 생각을 하셨어요?”
생전 처음 접하는 두목의 민얼굴에 발레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염은 깨끗이 밀려 있었지만 푸릇푸릇한 자국이 남았고, 그 위에 분을 두껍게 덧칠한 게 보였다. 솔직히 흉측했다.
“뭐, 나 정도 유명인사가 황성에서 지내려면 이 정도 위장은 해야 하는 것 아니겠니.”
“다른 단원을 보내시지 왜 위험하게 직접 행차하셔서….”
“네게 긴히 전달하고 싶은 사항이 많았다. 스칼릿, 자리 좀 피해 주겠어?”
피어스의 부탁에 스칼릿은 턱을 한 번 까딱하더니 문을 굳게 닫고 나갔다.
방 안에 둘만 남자마자 피어스는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이리 와서 앉아 봐라.”
발레리는 마른침을 삼키며 피어스와 마주 앉았다.
그와 눈을 맞추긴 힘들었다. 아무리 봐도 그의 새 얼굴에는 적응이 힘들었다.
“…망명은 일단 네 명 보냈어. 일단 처자식 있는 애들부터 절차 밟아서 보냈다.”
“어느 나라로 갔는지는 말씀하셔야죠. 이스티아? 헨겔스란트?”
둘 중 하나가 유력하다고 생각했다. 이스티아는 동쪽으로 접경한 우호국이었고, 헨겔스란트는 와이어 숲 아래 록슬리 산맥 남쪽에 위치한 동맹국이었다.
“아니, 크세니아로 갔다.”
“예? 무슨 망명을 크세니아로 가요?”
발레리는 의외라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북부와 국경을 맞댄 크세니아 제국은 120여 년 전 칼레바니아를 침공해 전쟁을 일으킨 나라였다.
그들이 2년 만에 항복하며 바로 종전 선언문이 포고되긴 했지만, 두 나라 간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크세니아는 칼레바니아의 뿌리 격이긴 했다.
칼레바니아를 건국한 여자 황제 엘로이스의 모국이었으니. 자연히 두 나라는 인종과 언어, 종교, 문화가 대동소이했다.
한때 크세니아 황제들은 칼레바니아를 언젠가 병합해야 할 ‘딸의 나라’ 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나 침략 전쟁에서 지고, 국력이 추월당한 뒤에는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며 은근한 경계의 눈초리만 보내고 있었다.
“두목, 전 이해가 안 가는데요. 굳이 그 추운 나라로 왜?”
춥기도 추웠다. 사시사철 온화한 기후를 자랑하는 프레이저 후작령과는 정반대 환경이었다.
“현실적인 이유지. 마력석을 가장 높은 값에 쳐줬다. 정착 자금도 넉넉히 주기로 했고.”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네요.”
발레리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피어스는 수긍하는 그녀를 보며 돌연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발레리.”
“네?”
“그 나라가 좋아서 보낸 건 아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네.”
“마지막으로 나랑 애국 한번 하자.”
애국이라니. 오랜만에 듣는 단어에 발레리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애국이라뇨?”
발레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다 같이 고국을 버리고 튀려는 마당에, 갑자기 무슨 애국 타령인가 해서.
“이상한 장면을 봤다.”
“무슨…?”
“크세니아로 망명하는 놈들 배웅하러 이 꼴로 저 위에 사피로스 강까지 갔었어.”
사피로스 강은 칼레바니아와 크세니아의 자연적 국경으로, 양국의 무역로 역할도 했다.
“무모하시네요. 시선 좀 끄셨을 텐데.”
“크흠, 걔네들이 타는 새벽 배에 수상한 놈들이 웬 이상한 상자를 선적하더구나.”
이건 무슨 소리지. 발레리는 칠리소스를 연상시키는 피어스의 입술을 주의 깊게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