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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79)화 (79/173)

79화

“손님, 죄송하지만 곧 폐점 시간이라….”

“아, 네. 곧 나가겠습니다.”

점원의 조심스러운 축객령에 켄드릭은 멋쩍게 웃으며 발레리를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발레리는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채 흐늘거릴 뿐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몇 날 며칠 뜬눈으로 밤을 보낸 데다, 그 맛있다는 바비큐는 건드리지도 않고 독주를 깡으로 들이켰으니.

켄드릭은 발레리를 부축해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다리에 전혀 힘을 못 주고 흐느적거리며 어깨에 매달렸다. 마치 연체동물에 빙의한 것처럼.

“…업을 수밖에 없네.”

결국 켄드릭은 술값을 치르면서 점원에게 팁을 두둑이 건넸다.

“실례지만, 이 여자 업는 것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켄드릭은 점원 앞에 뒤돌아 앉았다. 점원은 끙차 하고 발레리의 상체를 들어 그의 널따란 등에 얹었다.

그렇게 켄드릭은 발레리를 업고 술집 문을 나섰다.

황성 시내와 광장, 성문을 거쳐 채플로 향하는 동안, 발레리는 술 냄새를 풍기며 그의 귓가에 웅얼거렸다.

“끝까지…. 지킬 거야.”

“그러니까 누굴 지키는 거냐고.”

“내가…. 같이 가면 돼.”

“어딜! 대체 어딜!”

켄드릭의 목청이 크게 진동했다.

갑갑했다. 계속 물어보면 술김에 아무 대답이나 하지 않을까 했는데.

귀가 어두운 건지, 입이 무거운 건지. 발레리는 제 할 말만 늘어놓고 있었다.

“켄디….”

“왜.”

“나 무거워….”

정신이 잠깐 들었나 보다. 본인이 업혀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걸 보니.

“그래, 너 무거워. 나니까 업는 거야. 그 사람은 아마 못 업을걸?”

“몸 좋던데….”

“몸 좋은 거랑 힘센 건 별개…. 뭐야, 너 그 사람 몸 봤어?”

“우욱….”

“야, 토하지 마!”

켄드릭의 다그침에 발레리는 헛구역질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먹은 건 술뿐이라 토해도 나올 건 시큼한 위액뿐이었다.

“끅….”

딸꾹질 소리가 점점 멎어갔다. 곧이어 푸, 푸, 하는 그녀의 날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설마 맨몸을 봤다는 건 아니겠지. 겉보기에도 어깨는 꽤 벌어져 있긴 하니까.”

테렌스의 각 잡힌 몸매를 떠올리며, 켄드릭은 잔뜩 착잡해진 얼굴을 들었다.

밤하늘의 구름이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이제야 시야가 좀 트이는 듯했다.

저 멀리 채플 시계탑에 비치는 달빛에 의지해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시계탑만 바라보며 걷기를 이십여 분.

발레리를 업은 채 채플 후문에 들어서자 복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샛노란 긴 머리가 휘날리는 걸 보니 문지기 수장 루퍼트였다.

“아, 루퍼트 님, 지금 퇴근하십니까?”

“그렇네만…. 지금 자네 등에, 검술 선생 아가씨 아닌가?”

“네, 맞습니다.”

켄드릭은 진땀을 흘리며 씩 웃었다. 죄짓다 걸린 사람처럼. 그를 보는 루퍼트의 눈은 호기심에 반들반들 빛났다. 뭔가 더 물어보고 싶은 기색이었다.

“어휴, 술 냄새. 이 아가씨 완전히 떡실신한 거 같은데?”

“아, 네. 그렇게 됐습니다.”

“설마 자네가 먹여서 이렇게 된 건가?”

“아뇨, 본인 스스로 마신 겁니다. 방에 바래다주러 왔을 뿐입니다.”

켄드릭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루퍼트는 황제에게 모든 일을 직보하는 사람이었다. 일말의 오해도 사기 싫었다.

“흠, 자네는 대체 어느 쪽인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아닐세, 그럼 난 이만.”

루퍼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몸을 돌려 다시 후문으로 나갔다.

은근히 못마땅해하는 듯한 뉘앙스에 켄드릭은 괜히 억울했다.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긴 했지만.

“후…. 황태자한테 또 말 들어가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그래도 복도에 버려두고 갈 순 없으니까.”

이제 그녀의 방문 앞이다.

켄드릭은 발레리를 등에서 내린 뒤 오른쪽 팔로 부축했다. 다행히 그녀는 다리에 힘이 돌아왔는지 바닥에 발을 디디기는 했다.

“발레리, 열쇠. 열쇠 어딨어?”

“…뒷주머니.”

“꺼내 봐.”

“…음냐.”

그녀는 또다시 소통 불능 상태에 빠졌다.

“야, 내가 네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어떻게 넣어?”

하필이면 발레리는 하체에 딱 맞는 군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골반이 큰 여자가 남성용 군복 바지를 입으니 이런 차림새가 나올 수밖에.

“으음….”

“어어!”

발레리가 균형을 잃고 휘청이자, 켄드릭은 그녀의 허리를 얼른 붙들어 안았다.

안도하려는 순간 발레리가 돌연 두 팔을 목덜미에 휘감았다.

뜨끈한 체온이 밀려들었다. 그녀가 상체를 밀착하는 몸짓은 술기운 때문인지 어딘가 야릇했다.

과거의 포옹처럼 담백한 느낌이 아니었다.

“너 이런…. 이렇게 엉큼하게 안는 거 반칙이야. 제발 나 시험에 들게 하지 말고 열쇠나 내놓으라고 좀!”

켄드릭이 언성을 높이자 발레리는 흠칫 놀라 부스스 깼다. 그녀는 뒷주머니를 더듬거리더니 열쇠를 꺼내 내밀었다.

“흐아…. 어, 열쇠…. 여기.”

드디어 목적지의 문이 열렸다.

켄드릭은 가빠진 호흡을 진정시키며 그녀의 몸을 침대에 천천히 눕혔다.

발레리는 뒤통수가 베개에 닿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다시 잠에 빠졌다. 몇 초가 지났다고 코까지 골기 시작했다.

켄드릭은 침대맡의 기름등을 켜고 그녀의 곁에 다붙어 앉았다. 여기까지 업고 왔으니 다리 쉼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그는 차분히 응시했다.

곤히 자는 발레리의 얼굴을.

기름등의 따스한 불빛이 그녀의 갸름한 턱선과 매끄러운 귀밑 목선을 은은하게 조명했다.

숲속 덩굴처럼 짙어진 켄드릭의 시선은 발레리의 얼굴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소녀티를 다 벗은 완연한 여인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근육질 체형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뿐.

“갈수록 예뻐지네. 지금은 닿지도 못하는데….”

발레리가 춤 연습을 한답시고 드레스 차림으로 등장했던 날, 석실 문지기들은 그녀의 외모를 놓고 반나절을 조잘댔다. 여자처럼 입으니 사람이 달라 보인다고. 키가 크니 옷이 날개라고.

일부 문지기는 그날 이후 발레리가 석실을 드나들 때마다 끈적이는 눈빛을 발산했다. 흰자위에 핏대가 설 만큼 거슬렸지만 켄드릭은 참았다. 등 뒤로 주먹을 꽉 쥔 채.

“…황태자도 그 비슷한 류 중 하나겠지. 그런 사람한테 마음 주지 마.”

켄드릭의 깊은 숨결이 발레리의 보송한 귓가에 닿았다.

“흐으….”

그녀는 귓가를 파고드는 간지러움에 바르작바르작 뒤척였다.

“알아, 난 질투할 자격조차 없다는 거. 내가 얼마나 간사한 인간인지 모르는 거 아니야. 나도…. 내가 우습고 한심해.”

켄드릭은 그녀에게서 몸을 돌려 앉았다.

침대 옆구리에 등을 기대고서.

아무리 자고 있다고 해도,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이런 말을 할 자신은 없었다.

“그래, 나 황녀님 이용하고 있어. 결혼도 아니고 기한부 연애쯤이야 해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냥 알겠다고 하고 저질러 버렸어.”

켄드릭은 가슴팍의 제복 단추를 거칠게 끌러냈다. 속이 꼬일 대로 꼬여 이렇게라도 해야 숨통이 트일 것만 같았다.

“진짜 딱 목표만 생각하고 그분께 충실하자고 마음먹었는데…. 도저히 진심을 다할 수가 없네.”

그는 이성의 끈만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황녀라는 기회를 이대로 놓을 순 없다고. 지금보다 두꺼운 가면을 써서라도 잡아둬야만 하는 존재라고.

“…어떻게든 알아내긴 해야 하니까.”

형들을 삼켜 버린 와이어 숲.

그곳의 마물들을 황제가 어떻게 상대하려는지 파악하려면 아직 황녀가 필요했다.

─그 핵심을 도려내야 하네.

─최근에야 적임자를 찾았네. 나도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겠나.

─조금만 기다려주게. 내년이면 될 걸세.

풀어야 할 의문이 산더미였다. 황제가 말하는 적임자는 누구인지. 도려내야 한다는 그 핵심은 어떤 존재인지. 시기는 왜 또 내년인지.

어떻게든 황제와 한 번 더 대면해서 설득하고 싶었다.

켄드릭은 바짝 타는 목에 마른침을 넘겼다.

“…그때까지 네 옆자리가 비어있길 바랄게.”

목마름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

레이븐이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테렌스는 문화부에서 제출한 건국제 폐막식 최종 기획안을 훑고 있었다.

책상 앞으로 잰걸음 쳐 다가오는 레이븐을 그는 푸석한 얼굴로 응시했다. 연푸른 눈동자를 둘러싼 눈자위가 발긋하게 충혈돼 있었다.

“최소한 노크는 하고 들어와라.”

“아아, 죄송합니다. 흥미로운 소식을 전해드리려니 마음이 급해서 그만.”

“…흥미로운 소식?”

레이븐은 황궁 마법사 월례회의 참석차 중앙궁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아 그게, 회의 끝나고 루퍼트 님께 긴히 전해 들었는데요.”

“…흠.”

테렌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끝을 매만졌다.

그는 문지기 수장 루퍼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유의 상세한 보고로 황제의 신임을 받긴 했으나, 쓸데없는 가십거리로 양념을 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프리다와 켄드릭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보인다는 등의 주장도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테렌스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여동생의 사생활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게 싫었다.

“그 아가씨 얘깁니다.”

“발레리 이야기가, 왜 루퍼트 입에서 나오지?”

이젠 발레리의 뒷얘기까지 하고 다니는 건가. 테렌스는 눈에 칼을 세우고 레이븐을 차갑게 쏘아봤다.

“왜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시죠? 혹시 제가 무슨 얘길 꺼낼지 알고 계신 겁니까?”

“얘기할 거면 하고, 말려면 말아라.”

“그 아가씨 일이라 궁금해하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없으셔서 흥이 안 나네요.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레이븐은 짐짓 아쉬운 체하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가 문 쪽으로 슬슬 몸을 돌리자, 테렌스의 목울대가 서서히 움직였다.

“멈춰.”

암요, 당연히 그러셔야죠. 레이븐은 팔자 눈썹을 까딱하며 뒤돌아 상전의 부름에 응답했다.

“네, 전하의 만성 불면증을 초래한 그 못된 아가씨가요. 이틀 전에 술 먹고 떡실신했답니다.”

“떡실신?”

“듣자 하니 완전히 고주망태가 됐었다고 하더라고요.”

“왜…. 그렇게까지 마신 거지.”

“그야 저도 모르죠. 아, 이걸 빼먹었네. 그 상태로 밤늦게 켄드릭 경한테 업혀서 들어갔다던데요.”

“뭐?”

테렌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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