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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78)화 (78/173)

78화

얼마 안 가 술과 음식이 동시에 나왔다.

점원은 화사하게 웃으며 테이블에 안주와 술잔을 차례로 놓아주었다.

발레리와 켄드릭은 서로의 잔에 술을 채우자마자 건배했다. 적갈색 액체가 테이블의 촛대 불빛을 은은히 받아 찰랑거렸다.

첫 잔은 언제나처럼 원샷이었다.

“크으…. 쓰다, 써. 우리 요즘 좀 힘든 시기인가 봐. 이번엔 네가 눈물샘이 터지네.”

켄드릭이 먼저 운을 뗐다.

“외로워서 그렇지 뭐. 안락한 아지트를 떠나 퍽퍽한 황성에서 혼자 지내려니까.”

발레리는 열없이 웃었다. 술을 마신다고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외롭다는 핑계 참 좋네. 여기저기 다 갖다 붙일 수 있으니까.’

“…발레리, 너 외로워?”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너도 나처럼 독방 쓰니까 퇴근하면 혼자 덩그러니 있을 거 아냐. 좀 적적하지 않아?”

“그럴 땐 나한테 오면 되잖아.”

“…내가 기사단 숙소에 어떻게 들어가. 말이 되는 소릴 해.”

“이렇게 밖에서 접선하면 되지. 생각해 보니까 너랑 이렇게 밖에 나올 생각을 못했네.”

“지하에서 매일같이 보면 됐지, 뭘 밖에서까지 봐. 그리고….”

너는 황녀님이 있잖아. 나 자주 봐서 뭐 하게.

발레리는 남은 대답을 속으로 삼키며 제 잔에 브랜디를 한가득 채웠다.

켄드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발레리, 무슨 브랜디를 맥주처럼 따르고 그래?”

“난 오늘 끝까지 달린다. 넌 많이 마시지 마라. 나 죽으면 네가 들쳐 메고 가야 하니까.”

“죽으면 버릴 건데.”

켄드릭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발레리는 그의 위협에도 개의치 않고 브랜디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믿지 않았다. 그에게서 버림받은 전례가 없기에. 

켄드릭은 발레리가 술에 떡이 될 때마다 꼬박꼬박 숲속 아지트까지 바래다주었다. 몇 번은 부축해서, 몇 번은 업어서. 그럴 때마다 피어스는 쩔쩔매며 감사 인사를 했다.

발레리 또한 취한 켄드릭을 후작저까지 부축해 데려간 적이 있었지만, 반대의 경우가 더 잦았다.

둘은 별말 없이 ‘짠’을 반복하며 각자의 속도로 잔을 비워냈다.

그러다 보니 테이블에는 빈 브랜디 병이 하나 더 놓였다. 물론 없어진 술 가운데 7할 이상은 발레리의 몫이었다.

그녀는 양손에 턱을 괸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켄드릭을 응시했다.

“켄디….”

“응, 말해.”

기분 좋을 때 나오는 애칭이 등장했다. 이제 입을 열려는 걸까.

켄드릭은 얼른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발레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한때 남자만큼 짧았던 새카만 머리카락은 어느새 어깨에 닿을 만큼 길었다.

켄드릭은 천천히 그녀의 머릿결을 어루만졌다.

평소 그녀는 머리에 손대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술이 들어가면 달랐다. 눈을 감은 채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간식을 배불리 먹고 온순해진 고양이처럼.

“켄디, 넌 말이야….”

“응, 발레리.”

이제 말해줄 준비가 된 건가. 푸딩을 먹다 느닷없이 오열한 이유를.

“소중한 사람을…. 어딘지 모르는 이상한 곳으로…. 보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얘가 지금 뭐라는 걸까. 혀가 잔뜩 꼬여서는.

켄드릭은 미간을 좁히며 그녀의 입 모양을 관찰했다.

“소중한 사람을, 이상한 곳으로 보낸다고? 위험한 데야?”

“위험한 데… 라기보단… 위험한 사람한테? 위험하다기보단… 잘 모르는 사람한테? 해치지는… 않는다는데….”

어째 이상하다. 그녀의 말이 자꾸 바뀌는 것 같다.

소중한 사람은 누구지. 위험한 곳은 어디고, 잘 모르는 사람은 또 누구지.

“발레리. 너희 도적단 두목, 어디 위험한 데 작업하러 가는 거야?”

켄드릭은 대충 짐작 가는 대로 그녀에게 질문했다.

“끅…. 누군지는 묻지 말고…. 그냥 대답해 주면 안 돼? 너라면 어떻게 할 건지….”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이, 도적단 두목과 동료들 말고 또 있었던가.

켄드릭은 의문을 애써 누르며 이렇게 대답했다.

“소중한 사람을 그런 데 왜 보내? 보내지 말아야지.”

발레리는 정곡을 찔린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보내면 안 되지. 근데….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 정말 어쩔 수 없이…. 피치 못할 다른 사정 때문에….”

켄드릭은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깊은 녹안으로 발레리를 응시했다.

‘소중한 사람을 누군지 모르는 위험한 사람에게 보내야 한다면….’

‘소중한 사람’의 자리에 발레리를 대입하니 답은 바로 나왔다.

“따라가야지.”

“엉…?”

“따라간다고. 끝까지.”

“그러니까, 그 사람한테…. 같이 간다고?”

“응. 나라면 그럴 거야. 절대 혼자 안 보내. 끝까지 따라가서, 무슨 일 생기면 같이 싸워야지.”

켄드릭은 결연한 표정이었다.

말투도 단호했다.

독한 술이 들어갔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

초점 없던 발레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까만 눈동자 한가운데 순간 불이 반짝 들어왔다.

뭔가 중요한 사실이라도 깨달았다는 듯이.

켄드릭은 고개를 갸웃했다. 별말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반응이 클까.

“고마워…. 고마워.”

발레리는 뜻 모를 감사 인사를 중얼거리며 켄드릭의 허리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그녀가 갑자기 품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추운 겨울날 이불 속을 파고들듯이. 새근거리는 숨결이 목덜미에 부드럽게 와 닿았다.

켄드릭은 당혹해서 바짝 굳었다. 얼굴은 용광로 속 쇳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일전에 그녀의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작별 포옹을 나누던 때처럼.

몇 잔 하지도 않았건만, 그녀에게서 풍기는 향기로운 술 냄새에 취기가 오르는 기분이었다.

“후우, 시에나 여신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그는 작게 성호를 그은 뒤 발레리를 살포시 밀어냈다. 힘없이 밀려난 그녀는 테이블 위에 축 늘어졌다.

“일어나, 발레리.”

켄드릭은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깨웠다. 여기서 잠들게 하면 안 된다. 한 번 곯아떨어지면 잘 일어나질 않는 애니까.

발레리는 눈을 끔뻑이며 테이블을 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발레리. 이거 하나만 묻자.”

“…뭐.”

“소중한 사람이 누구야?”

“하으….”

그의 질문에 발레리는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도리질을 쳤다.

“너한테 소중한 사람. 그 사람 누구야?”

켄드릭은 아랑곳없이 거듭 물음을 던졌다.

“누구냐고.”

어떻게든 답변을 받아내려는 집요함이 느껴졌다.

“…몰라. 사장님! 여기 진 한 병이요!”

“발레리, 말 돌리지 마.”

“안 돌렸어…. 술 시킨 것 갖고 왜 그래.”

무색투명한 진 한 병과 함께 작은 유리잔이 함께 서빙됐다.

“손님, 라임 주스 같이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켄드릭은 점원의 권유를 거절한 뒤 제 잔에 진을 넘치도록 따랐다.

그리고 목구멍에 탈탈 털어 넣었다.

발레리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얘가 왜 이러지. 진은 쓰다고 꼭 라임 주스 섞어 마시면서.

켄드릭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독한 술에 속이 타들어 가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알지? 그 사람이 너 좋아하는 거.”

발레리는 어리둥절한 반응이었다.

“그 사람…? 너 지금 누구 얘기….”

“누구겠어. 너한테 꽃다발 갖다 바친 그 남자 말하는 거지.”

결국 나오고야 말았다. 테렌스 얘기가.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발레리는 손갈퀴로 앞머리를 싹 쓸어 올렸다.

“…하아.”

그녀는 창밖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먹구름으로 꽉 막힌 하늘이 꼭 제 속 같다고 생각했다.

켄드릭은 그녀의 계속된 침묵이 마뜩잖았다.

반응을 보니 모르는 것 같진 않았다. 황태자가 제게 연심을 품었다는 사실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술집 구석의 벽시계 분침이 여러 번 돌아갔다. 한껏 연애 이야기로 달아오른 옆 테이블의 대화 소리가 공백을 메울 뿐이었다.

여전히 발레리는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발레리, 왜 가타부타 말을 안 해? 내가 물었잖아.”

“…너한테도 그러디? 나 좋다고.”

“결국 받았구나. 고백.”

발레리는 술잔에 진을 냅다 들이부었다. 딱 넘치기 직전까지 따른 뒤 잔을 꺾어 목 뒤로 넘겼다. 방금 켄드릭이 했던 동작 그대로.

그녀가 침묵한 이유는 하나였다.

애매해서.

고백을 받았다기엔 결정적인 한 마디가 없었고, 안 받았다기엔 그의 간접 화법이 너무 노골적이었다.

─난 마음에도 없는 여인에게 입 맞추는 취미 따윈 없다.

“으….”

발레리는 목을 타고 미끄러지는 통각에 조용히 신음했다. 진이 속에서 어디쯤 내려가고 있는지 생생히 느껴졌다.

덕분에 회상을 멈출 수 있었다. 테렌스가 눈물을 떨구는 장면 직전에서.

이래서 사람들이 독주를 마시는구나.

“제발 천천히 좀 마셔. 너 설마 그 사람 때문에 이러는 거야 지금?”

“알 바 없잖아….”

“왜 알 바가 없어? 이 정도는 나도…. 물어볼 수 있는 거 아니야?”

켄드릭에겐 오래 묵혀둔 질문이었다.

그동안 여러 이유로 묻지 못했다.

그녀의 연애사는 10년간 꺼내본 적 없는 주제였다. 따로 물어볼 계기도 없었고, 물어보더라도 돌아올 답이 두려웠다.

혹시 조금이라도 마음을 내주었을까 봐.

하지만 미치도록 궁금했다. 이 질문 하나만 끌어안고 며칠 밤을 지새웠을 만큼.

발레리가 황태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감정으로 그를 대하는지.

알 권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알아봤자 지금은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지금이라면, 오랜 친구라는 이름과 술기운을 빌어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마침내 질문을 받은 발레리는 성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있다.

“자꾸 생각나게 하지 마. 짜증 나니까.”

그녀는 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자칫하면 가시를 발사할 것 같은 그녀를, 켄드릭은 왠지 더 자극하고 싶었다.

“짜증? 짜증 날 일이 뭐가 있는데? 네가 싫다는 것도 아니고 좋다는 거잖아.”

어떻게든 답을 유도하려는 그의 발언에, 발레리는 눈을 번쩍 부릅떴다.

“그냥 싫어! 싫다고! 그 인간 생각날 때마다 속 문드러지는 것 같으니까! 하지 말라면 좀 하지 마! 넌 내 말이 우스워?”

발레리는 거의 울부짖다시피 소리쳤다.

그녀의 음성은 거의 사자후에 가까웠다. 귀 한쪽이 멍멍해진 켄드릭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근처에 있던 손님들은 술잔을 기울이다가 말고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켄드릭은 말릴 수밖에 없었다. 거칠게 오르내리는 그녀의 어깨를 살살 토닥이며.

“진정해, 발레리. 안 할게….”

심기를 괜히 건드린 걸까. 발레리는 창밖으로 고개를 홱 돌린 채 분을 삭이고 있었다.

그녀의 뒤통수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켄드릭은 또 다른 물음을 삼켰다.

속이 왜 문드러지는 건데. 뭐가 그렇게 짜증이 나는 건데.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 보이는 건데.

“하, 차라리 싫었으면 좋겠다….”

“뭐라고?”

“아냐. 술 들어가니까 드디어 졸리네…. 하아암….”

발레리는 하품을 한 번 크게 했다. 기다란 속눈썹이 점점 무거워지는 듯하더니 눈꺼풀이 스르르 닫혔다.

몇 초 후, 그녀의 고개가 뚝 떨어졌다.

켄드릭은 그녀의 머리통을 얼른 손으로 받쳐 제 어깨에 기대어 놓았다.

잠든 그녀의 얼굴은 원인 모를 고통에 이지러져 있었다.

“흐응….”

잇새에서 앓는 소리도 새어 나왔다.

발레리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며 켄드릭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싫으면 싫었지, 싫었으면 좋겠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이야….”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술 취한 그녀가 내뱉은 말조각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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