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74)화 (74/173)

74화

황후가 프리다에게 보낸 서신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사랑하는 내 딸 프리다.

뜬금없이 가면무도회를 열어 달라는 말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단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참석하지도 않는 행사의 형식을 굳이 왜 바꿔 달라고 부탁하는지 이해가 안 갔어.

그래도 딸의 간곡한 부탁이니 어쩌겠니. 테렌스와 상의한 끝에 일단 네가 원하는 대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단다.

사실 많이 주저했어. 초청장 제작이 며칠 전에 끝났거든. 테렌스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초청장을 다시 뜯어서 내용을 추가하고 다시 봉하자 하더구나. ‘가면을 지참하라’라고 쓰인 도장을 파서 일일이 찍으면 된다면서.

이런 작업 때문에 이틀 정도는 발송이 늦어지겠지만,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아.

아 참, 무도회에 대리인을 보내려 한다고 전해 들었단다. 어떤 가문 영애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드레스까지 직접 챙겨준다니 정말 기뻐할 것 같구나. 역시 우리 딸 사려 깊은 건 알아줘야 해.

시에나 여신의 축일도 머지않았네. 네가 그때 입고 나올 옷도 곧 준비해야 할 텐데, 치수와 주문사항을 적어 보내면 전속 테일러에게 바로 준비하도록 당부할게.

오늘도 좋은 꿈 꾸길.

─사랑을 담아, 엄마가」

프리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오빠 덕에 한숨 돌렸네. 발레리, 좋은 소식 있어요.”

발레리는 프리다의 호명에 책상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좋은 소식이라뇨?”

“건국제 무도회 말이에요. 어머니께 가면무도회로 바꿔 달라고 청했는데, 다행히 수락해 주셨어요.”

“…네? 그럼 얼굴을 가리고 다닐 수 있는 거예요?”

프리다는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리와 눈을 맞추려고 부단히 애쓰면서.

“응. 이런 행사 처음이라 많이 부담됐을 텐데, 가면이 있으면 한결 덜할 거예요.”

“어…. 정말 감사합니다. 근데 설마…. 저 하나 때문에 무도회가 바뀌게 된 건 아니죠?”

발레리는 미안한 기색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사실 켄드릭이 따로 부탁을 해왔어요. 발레리가 많이 불안해하는 것 같다면서.”

“…걔가요?”

발레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켄드릭에게 불안하다고 털어놓은 적은 있지만, 그가 황녀에게 이런 부탁까지 할 줄은 몰랐다.

불안감을 느끼는 건 사실이었다. 펠런이 여태 털어먹은 못된 귀족들이 대부분 참석할 테니까.

특히 눈에 불을 켜고 펠런을 추적해온 이들을 정면으로 마주할 생각을 하니 불쾌했다. 이들에게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혹시나 로이를 참혹하게 고문한 매킬런 백작이라도 마주하게 된다면 충동을 못 이기고 주먹다짐이라도 벌이게 될까 두려웠다.

‘켄드릭한테 고맙긴 한데…. 너무 무리한 거 아닌가 싶네.’

발레리가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프리다는 그녀의 앞에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

몹시 어려운 얘기를 꺼내려는 듯, 프리다는 살구색 입술을 몇 번이고 어물거렸다.

프리다는 수차례 망설인 끝에 운을 뗐다.

“…발레리. 하나만 물을게요.”

“아, 네. 말씀하세요.”

“켄드릭이랑….”

“네.”

“무슨 사이예요?”

무슨 질문이 이렇게 뜬금없고 새삼스럽지. 발레리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콧잔등을 긁었다.

켄드릭과의 관계를 묻는 거라면, 대답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친구 사이예요. 알고 계신 것처럼요.”

산머루처럼 새카만 발레리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거짓도 비치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발레리는 꽤 명확히 대답했다고 생각했으나 프리다의 궁금증은 딱히 해소된 것 같지 않았다. 초점 잃은 시선이 허공에 떠도는 걸 보니.

“갑자기 그건 왜 물으세요?”

발레리는 곧바로 황녀에게 질문 의도를 물었다. 무슨 다른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서.

“…아니에요. 근데 혹시 최근에 켄드릭한테 무슨 일 있었나요?”

“네? 글쎄요….”

무슨 일이 없지는 않은 것 같았다.

발레리는 며칠 전 채플 후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켄드릭은 춤 연습을 하다 말고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승진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다면서. 함께 영지로 내려가지 않겠냐면서.

가슴이 아팠다. 언제나 야망으로 빛나던 녹안이 맥없이 시들어 버린 모습을 보니. 얼마나 힘들면 중도 포기까지 생각했던 걸까.

하지만 구체적인 사연은 알 길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해야 알지.

“켄드릭 걔가 요즘 어깨에 힘이 빠지긴 했죠. 저도 뭔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휴식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휴식이요?”

“네…. 애가 일 욕심이 과해서 시키지도 않은 짓도 많이 하잖아요. 여덟 시까지 출근인데 일곱 시에 오고, 힘쓰는 일 전부 도맡아 하고, 퇴근도 밤늦게 하고. 석 달 동안 휴가 한 번 안 냈으니 심신이 지치지 않았을까요? 그냥 제 추측이지만요.”

발레리의 말이 이어질수록 프리다의 얼굴은 점점 사색이 되어갔다.

“…내 잘못이구나.”

그녀는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네? 황녀님 잘못은 아니죠. 만약 제 말이 맞는다면, 본인이 스스로 판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진 건데….”

프리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발레리의 부연 설명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켄드릭이 하루 동안 석실에 체류하는 시간은 무려 열다섯 시간이었다. 아침 일곱 시 정각에 찾아와, 밤 열 시쯤 숙소로 돌아갔으니까.

물론 일찍 출근하는 것도, 밤에 검술 연습을 봐 주는 것도 그가 자원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게 무리로 작용할 가능성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이기적이었어.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서 까맣게 잊었네. 석실에 머무는 시간이 켄드릭에게는 업무 시간이기도 하다는 걸….’

프리다는 결심했다.

그간 고생한 켄드릭에게 얼마간의 휴식을 줘야겠다고.

“고마워요. 역시 발레리는 켄드릭에 대해 잘 아네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쉬게 해줘야겠어요.”

“대충 짐작한 거라 확실하진 않지만, 좋은 생각이세요.”

“…친구라는 건 참 좋은 것 같아요.”

프리다는 발레리에게 나긋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렇게 생각했다.

‘친구…. 어쩌면 일방적으로 성사된 연인 관계보다 든든하고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

발레리는 프리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황녀의 미소는 언제나 달콤했지만, 오늘은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배어났다.

발레리는 다시 황녀의 시선을 피하며 쓴 입맛을 다셨다. 위스키가 든 수제 초콜릿을 입안 가득 베어 문 기분이었다.

그녀가 요즘 이렇게 프리다와의 눈 맞춤을 피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프리다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마다 두 가지 감정이 제멋대로 증폭되니까.

황녀와의 유대감이 깊어질수록 켜켜이 쌓여만 가는, 따갑고 쓰린 죄책감.

그리고 황녀의 얼굴에 자꾸만 겹쳐 보이는, 그 사람에게 드는 낯선 감정.

‘오늘도 닮았다는 생각만 수십 번쯤 한 것 같네. 어차피 이따 퇴근하면 볼 인간인데 왜 자꾸 생각나는 거야. 짜증 나고 거슬리게….’

***

검술 수업에 이어 춤 연습까지 모두 마쳤다.

프리다는 퇴근을 준비하던 발레리의 앞을 대뜸 막아섰다.

그리고 멈춰 선 발레리의 눈앞에 기다란 줄 하나를 들이밀었다.

눈금이 새겨진 걸 보니 줄자였다.

“웬 줄자예요, 황녀님?”

“치수 재고 가요. 나도 재 주고요. 우리 둘 다 드레스 주문해야 하니까요.”

“황녀님도 드레스가 필요하세요?”

“나 일 년에 한 번 밖에 나가잖아요. 건국제 마지막 날은 시에나 여신 축일이라…. 그날은 부모님이 나갈 수 있게 해 주시거든요.”

“맞다. 그날은 밖에 나가시죠.”

발레리도 얼핏 들어 알고는 있었다.

시에나 여신 축일인 9월 30일마다, 황제 부부와 황태자, 황녀가 황궁 정문 위의 발코니에 나와서 수많은 인파를 향해 인사한다는 걸.

프리다가 수년째 감감무소식이어도 백성들이 그녀가 황궁 안에서 잘살고 있다고 믿는 근거였다.

‘…그때 황녀님을 황궁 밖으로 데리고 나갈 기회가 있으려나? 흠,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고 호위도 대규모로 붙을 테니 힘들겠지. 약속 날짜까지는 아직 한참이라 벌써부터 무리해서 움직일 필요가 있을지는 모르겠네. 이건 두목하고 중간 접선할 때 얘기해 봐야겠다.’

하, 이 와중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잠시 임무 생각에 빠졌던 발레리는 도리질하며 현실로 되돌아왔다.

“황녀님, 근데 왜 다른 날은 안 되고 그날만 나갈 수 있는 거예요?”

“…여신께서 직접 강림하셔서 황궁을 지켜 주시는 날이니까요. 이리 가까이 좀 와 볼래요? 치수 재 줄게요.”

프리다는 발레리의 어깨 길이와 가슴둘레, 허리둘레, 팔 길이와 팔뚝 둘레 등을 차례대로 재 주었다.

이제 엉덩이둘레를 재 주는 프리다를 내려다보며 발레리는 혼자 생각했다.

옷 쪼가리 하나 만드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프리다는 줄자 눈금이 가리키는 숫자를 체크하며 입을 크게 벌렸다.

“…와, 발레리는 골반이 정말 크네요.”

“네, 그나마 하체는 좀 여자 같죠?”

“에이, 골반에 남자 여자가 어디 있어요. 난 골반이 작은데, 그렇다고 남자 같은 건 아니잖아요.”

“아, 그러네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프리다는 싱긋 웃어 보였다. 마음에 담아 두지 말란 뜻으로.

문득 발레리의 몸 선을 훑어 내리던 프리다의 눈동자가 번뜩하며 빛을 냈다.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드레스 디자인이 머릿속에 영감처럼 떠올라서다.

“발레리, 드레스 디자인은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죠?”

“네, 준비해 주시는 대로 입을게요. 어차피 전 보는 눈도 없고 취향이랄 것도 없으니까요.”

“이스티아풍 드레스는 어떨까 싶어요. 파니에나 크리놀린으로 스커트를 안 부풀려도 되고, 멋있는 체형이 잘 드러날 것 같거든요.”

“이스티아요? 그 동쪽에 있는 더운 나라요?”

“응. 발레리가 지닌 특유의 분위기랑 잘 맞을 거예요.”

동쪽으로 국경을 접한 이스티아. 발레리는 그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 나라 사람들이 무슨 옷을 입는지도 잘 몰랐고.

‘그래도 후덥지근한 날씨로 유명한 나라니까, 적어도 이 나라 귀족들처럼 두껍고 거추장스럽고 부스럭거리는 옷은 안 입겠지.’

“저는 편한 옷이라면 환영이에요.”

발레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든 프리다가 알아서 해줄 것이라 생각하며.

이제 반대로 발레리가 프리다의 치수를 재 주기 시작했다.

프리다의 몸은 석 달 전과 비교했을 때 극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그땐 겨울나무처럼 앙상한 체형이었지만, 점점 그 자리에 근육과 살이 건강하게 들어차고 있었다. 많이 먹고, 많이 움직이고, 움직인 만큼 더 먹었으니까.

그녀가 땀 흘려 가꿔낸 성과가 육안으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간이었다.

발레리는 그간 프리다가 노력해온 모습을 흐뭇하게 떠올렸다. 그 과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뭉클해졌다.

프리다도 한층 건강해진 몸을 내려다보며 뿌듯해하고 있었다.

“치수가 이렇게까지 커질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기분이 좋아요.”

“지금처럼 잘 드시면 더 커지실 수 있어요.”

“알겠어요. 아 참, 발레리. 아직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죠? 내가 무도회에서 서신 읽어달라고 한 거요.”

“네, 딱히 얘기할 일이 없어서….”

“당분간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줄래요? 켄드릭도, 오빠도 아직은 몰랐으면 좋겠어서요.”

“네, 그렇게 할게요.”

발레리는 속에서 돋아나는 물음표를 꾹꾹 짓눌렀다.

무도회에서 내 입을 빌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걸까. 그걸 왜 굳이 숨기려고 하시는 걸까.

그래도 당장 물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가장 먼저 서신을 뜯어 열어볼 사람은 자기 자신일 테니.

내용을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되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