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발레리의 등 뒤로 에이바의 방문이 닫혔다.
분명 단 걸 먹었는데, 속에서 올라오는 건 시큼한 신물이었다.
“…오늘도 잘 자긴 글렀네.”
발레리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계단으로 향했다.
그곳엔 머리가 하얗게 센 초로의 남성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참모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을 뒤에 달고서.
보석이 덕지덕지 붙은 옷깃을 높이 세운 걸 봐선 황실 관리보단 고위 귀족 느낌이었다.
‘누구지?’
턱수염을 만지는 그의 손등에는 둥그스름한 타원형 흉터가 나 있었다. 그가 층계를 밟을수록 그 모양이 점점 뚜렷해졌다.
이빨 자국이었다. 뭔가에 세게 물린 듯한.
발레리는 지척에 다가온 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초점이 흐린 퀭한 눈. 누리끼리한 흰자위.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움푹 들어간 볼. 창백하고 푸석한 피부. 숱 없는 머리칼.
‘어디서 봤는데….’
눈동자가 고동색이었다.
방금 만난 공녀의 것과 같은.
“으헉!”
볼드윈 공작이었다. 발레리의 까만 눈동자가 공포 속에서 마구 진동했다.
‘저 인간을 10여 년 만에 여기서 만나다니. 근데 저 손등…. 설마 내가 깨문 자국인가? 저게 아직 흉터로 남았다고?’
발레리의 시선을 인지한 공작은 미간을 좁히며 그녀의 얼굴을 주시했다. 웬 놈이 뚫어지게 쳐다보며 “으헉!” 소리를 내니 눈이 갈 수밖에.
발레리는 잽싸게 눈 맞춤을 피한 뒤 속도를 높여 그를 스쳐 내려갔다.
공작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뒷모습을 흘겨봤다. 그리고 뒤에 있던 참모에게 물었다.
“저놈 방금 에이바 방에서 나온 거 맞지?”
“그런 것 같습니다.”
“…이 계집애가 소문 무서운 줄 모르고.”
공작은 못마땅한 얼굴로 딸의 방문 앞에 섰다.
“…에이바. 내가 지금 뭘 잘못 본 거냐?”
볼드윈 공작은 딸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방금 근위병 한 마리가 여기서 빠져나오던데.”
“아, 오다 마주치셨구나.”
“…다 큰 처녀가 외간 사내놈을 함부로 방에 들이다니. 내가 언제 그렇게 가르쳤느냐? 혼전에 추문부터 만들려고 아주 작정을 한 것이냐?”
목청 높여 다그치는 공작을 앞에 두고, 에이바는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손부채까지 부치면서.
“푸하하하핫.”
딸의 느닷없는 폭소에 공작은 부아가 치밀었다.
“…웃어? 아비가 지금 진지하게 훈계하고 있는데….”
“아유, 진정하세요. 아버지, 쟤 남자 아니고 여자예요.”
“여자?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아직 못 들으셨어요? 그 5월쯤인가, 애국심 투철한 여자가 위장 입대했던 사건이요.”
방 한가운데 우뚝 멈춰 선 볼드윈 공작은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일전에 들은 얘기인 것도 같아서.
─글쎄 말입니다, 공작님, 웬 계집 하나가 남자 신분을 사서 황궁 근위병으로 입대했다지 뭡니까. 근데 두 달이 다 돼가도록 아무도 의심조차 못했답니다. 아무래도 황궁 보안 수준이 예전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로 생각났다. 몇 달 전 황성에 파견한 가신이 흥분에 차 정보 보고하던 모습이. 그때는 그냥 별일이 다 있군, 하고 넘겼던 사건이었다.
“…아무리 여자라도 그렇지. 근위병을 방 안에 들여서까지 할 얘기가 뭐가 있다고.”
“그냥 신기해서요. 황궁 생활이 적적해서 말동무 삼아 봤어요.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저 귀족 영애들이랑은 성격 안 맞아서 안 노는 거.”
공작은 딸의 말에 수긍하며 다과상에 의자를 바싹 끌어당겨 앉았다.
트레이에 담긴 간식들은 대부분 온전히 남아있었다. 발레리가 거의 손을 대지 않은 탓이었다.
공작은 초콜릿을 입힌 에클레어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몸에 당이 들어오니 선명하게 떠올랐다. 조금 전 계단에서 마주친 그 여자 병사의 생김새와 표정이.
“…흠, 왠지 낯이 익단 말이지.”
“누가요? 아까 걔요?”
“그래. 일전에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공작은 눈썰미가 남다른 사람이었다. 기억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 번 본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잊는 법이 없었다.
에이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가 발레리랑 구면일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나? 어디서 닮은 사람이라도 본 거겠지, 뭐.’
“에이, 아버지가 걔를 어디서 보셨겠어요. 프레이저 후작령 출신 평민이라던데요. 아마 북부엔 한 발짝도 안 들여봤을 거예요.”
“…남부 출신하고는 친하게 지내지 말아라.”
저 소린 지겹지도 않나. 에이바는 아비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식은 찻물을 호로록 마셨다.
공작은 프레이저 후작뿐 아니라 그가 다스리는 남부 지역 영지민들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촌티가 난다나 뭐라나.
발레리의 첫인상이 강렬했던 탓일까. 공작의 머릿속엔 아직도 그녀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흔한 외모는 아니었는데. 키도 멀대같이 크고, 머리카락이고 눈이고 온통 새카만 것이.”
색소가 옅은 편인 칼레바니아인 사이에서, 흑발과 흑안은 제법 드문 속성이긴 했다.
“이국적인 느낌이 있긴 해요. 피부색도 그렇고 약간 이스티아 쪽 혼혈 같달까.”
“흠…. 날 보고 적잖이 놀라는 반응이었다. 눈이 마주치니 헉 소리까지 내면서 얼어붙더군.”
“에이, 그거야 아버지 인상이 워낙 더러우시니 그렇죠. 이제 그만 관심 접으세요. 넷째 정부로 들이시기엔 너무 딸뻘이잖아요?”
“…기어오르는 것도 적당히 해라, 에이바.”
공작의 정색에 에이바는 픽 웃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창 표면에 빗방울이 한 점 두 점 부딪히고 있었다.
이제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비가 황궁에 찾아온 이유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아버지.”
“…음?”
“제가 못마땅하세요?”
“무슨 소리냐, 에이바. 하나밖에 없는 우리 집 귀한 딸이 못마땅할 리가.”
“그럼 왜 자꾸 크세니아 3황자한테 혼담을 넣으세요? 제가 황태자랑 결혼하려고 여기 들어온 거 뻔히 아시면서.”
공작은 허를 찔린 얼굴로 찻잔을 내려놨다.
몰랐다. 딸에게 선수를 빼앗길 줄은.
에이바는 그럼 그렇지, 하며 비뚜름하게 웃었다.
그녀는 본가에 나름대로의 정보원을 심어 뒀다. 자신이 없는 사이 공작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파악하고 싶었으니까.
“그래, 말 나온 김에…. 에이바, 이제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와라. 네가 원해서 황궁에 온 건 알지만, 이곳 황실하고는 더 이상….”
“그 말 하러 오실 줄 알았어요. 싫어요. 난 여기 있을래. 그 애 딸린 이혼남 황자하고는 절대 결혼 못 해요.”
“후….”
볼드윈 공작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애 딸린 이혼남이라지만, 3황자는 재혼을 조건으로 대공 작위를 받게 돼 있었다. 이후 그는 공작령과 경계를 맞댄 크세니아 남서부 라이호프 주를 영지로 하사받을 예정이었다.
사실상 혼맥을 통해 칼레바니아의 북부 국경을 허물 기회였다.
“저 알고 있어요. 이번에 오빠들 크세니아로 장가보내려다 실패하신 거.”
“…….”
“첫째 오빠는 도박쟁이고, 둘째 오빠는 아파서 비실비실하니까 퇴짜 맞았겠지. 그래서 이제 카드가 저밖에 안 남은 거죠?”
“에이바.”
“무슨 계획이신지는 모르겠는데, 전 여기서 떠날 생각 없어요. 그리고 아버지 딸이 왜 저밖에 없어요? 정부들 자식 중에 내가 아는 애만 세 명인데. 전 더 들을 얘기 없으니 이만 가주세요.”
공작의 낯빛이 포도주를 뒤집어쓴 것처럼 검붉게 변했다.
“…어디 네 마음껏 해봐라.”
그는 끙, 하고 침음을 내뱉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곧이어 문이 거세게 닫혔다.
아비의 퇴장에도 에이바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귀싸대기 맞을 각오로 쏘아붙인 건데 웬일로 참으시네. 황궁에선 그래도 폭력 본능이 숨겨지나 봐.”
에이바는 창가로 바짝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빗줄기가 꽤 굵어졌다.
중앙궁 서관을 막 빠져나간 공작은 호위가 씌워준 우산 아래 서 있었다.
그는 뒤를 돌아 딸의 침실 창문을 노려봤다.
눈이 마주쳤다.
에이바는 천연스레 미소하며 아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불효녀라 미안해요, 아버지. 전 무슨 꿍꿍인지 모르는 일에 장기말로 쓰이긴 싫거든요.”
***
─푹.
프리다의 칼끝이 발레리의 가죽 갑옷 심장부를 단번에 꿰뚫었다.
발레리는 흠칫하며 상체를 냅다 뒤로 뺐지만, 이미 갑옷에 깊숙한 흠집이 난 뒤였다.
맨몸으로 임했다면 꽤 심각한 유혈사태가 일어났을 법한 공격이었다.
이젠 진짜 봐드리면 안 되겠는걸. 발레리는 눈썹을 치켜뜨고 속도를 높였다. 본 실력과 근접한 수준으로.
그녀의 반격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프리다는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와, 발레리. 여태까지 나 봐주고 있었던 거예요?”
“모르셨어요? 아직 이것도 최선까진 아닌데.”
발레리는 프리다를 연무장 한쪽 끝까지 몰아붙이고 나서야 동작을 멈췄다.
그녀는 움직임으로 말하고 있었다. 황녀의 실력이 많이 늘긴 했지만, 아직 자만하기엔 이르다고.
프리다의 완패였다.
프리다는 낙심한 얼굴로 검을 내려놓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젠 좀 비등비등해지나 싶었는데 전부 착각이었다. 발레리를 정면으로 상대하는 건 아직 불가능해 보였다.
“나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아까도 일부러 안 피한 거죠?”
“아니에요, 황녀님. 나름대로 열심히 피한 건데 예리하게 잘 찌르셨어요. 이젠 가죽이 아니라 체인메일이라도 입어야겠어요. 공격이 워낙 날카로워지셔서.”
발레리는 투구를 벗으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제 막 어깨에 닿기 시작한 뒷머리가 목덜미에 척척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프리다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엷게 웃었다.
발레리는 언제나처럼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스승이었다.
최근 들어 낌새가 약간 이상하긴 했지만.
발레리는 좀처럼 프리다와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일부러 피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한 얼굴을 했다.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식사 때도 말수가 줄었고, 대화할 때도 평소만큼 반응이 활발하지 않았다.
수업에는 별지장이 없었기에, 프리다는 굳이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프리다는 그게 무도회에 가는 일 때문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똑똑.
누군가가 석실 철문을 두드렸다.
“아, 켄드릭이 물 갖고 들어오나 보네요.”
발레리의 말에 프리다는 얼른 종을 울려 입장을 허했다.
그러나 들어온 사람은 켄드릭이 아니라 문지기 수장 루퍼트였다.
“황녀님, 황후 폐하께서 답신을 보내셨습니다.”
“아, 고마워요, 루퍼트.”
“양 폐하께 전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응, 알았어요. 나가봐요.”
루퍼트가 퇴장하자마자 프리다는 얼른 책상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서랍에서 나이프를 꺼내 밀랍 봉인을 제거하고 서신을 펼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