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테렌스가 다녀간 다음 날. 발레리는 여느 목요일처럼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퇴근했다.
한숨 돌리며 방문을 열었더니 바스락, 하고 발밑에 뭐가 밟혔다.
손바닥만 한 쪽지였다. 누군가가 방문 아래 틈새로 집어넣은.
“뭐지? 두목이 보낸 건가? 중간 접선 날짜가 얼마 안 남긴 했는데.”
발레리는 허리를 굽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거 보는 대로 중앙궁 서관 내 방으로 와. 너무 늦진 말고. 나 기다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글씨를 더듬더듬 읽는 그녀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발신자 이름은 없었지만 어투만으로도 짐작이 갔다. 에이바 볼드윈 공녀였다. 발레리의 입에서 어휴, 소리가 흘러나왔다.
공녀에게는 이 방에서 지낸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사람을 시켜서 병적기록부라도 뒤진 모양이었다.
“입 좀 털면 천 갈렌을 준다는 사람인데, 얼굴 보기 찝찝해 죽겠네. 하, 난 또 왜 황태자랑 입술을 문대서….”
그녀는 손갈퀴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영 내키지 않는 마음을 누르며 다시 문간을 나섰다.
저녁 하늘엔 먹구름이 낮게 깔려 한밤처럼 어둑어둑했다. 우산을 챙길 걸 그랬나. 아직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전인데 벌써 공기가 습했다.
비가 올세라 빠른 걸음으로 중앙궁 서관 정문에 다다랐다. 그 앞에는 저번에 본 작달막한 하녀가 마중 나와 있었다.
“아, 로빈슨 양. 공녀님께서 기다리세요.”
“네, 앞장서세요.”
발레리는 하녀의 인도에 따라 천천히 층계를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이바의 방문 앞이었다.
발레리는 손바닥에 맺힌 식은땀을 바지에 눌러 닦았다. 왜 이렇게 초조할까. 도둑질하다 걸린 것처럼.
노크하자마자 문틈이 확 벌어졌다.
에이바는 한낮의 해바라기처럼 만개한 얼굴로 그녀를 반겼다.
방 안쪽 창가에는 아기자기한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다. 형형색색의 마카롱과 에클레어, 스콘과 파운드케이크 등이 3단 트레이 위에 소담스럽게 담겼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발레리는 에이바에게서 배운 대로 인사했다.
군복 입은 병사가 어설프게 숙녀 흉내를 내자 에이바는 웃음이 났다.
“푸훗, 그래. 이리 와서 앉아.”
“네.”
방은 주인만큼이나 화려한 분위기였다. 처음 왔을 땐 정신이 없어 제대로 살피지 못했지만, 커튼부터 식탁보, 침대를 덮은 이불까지 모두 하늘하늘한 레이스투성이였다. 색이 제각각이라 딱히 조화롭진 않았다.
발레리는 분홍색 방석이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맞은편에 자리한 에이바는 벌써 턱을 괴고 있었다.
오늘은 짙은 남색 드레스 차림이다. 손톱만 한 크리스털이 불규칙한 간격으로 총총히 박힌 게 밤하늘의 별자리 같았다.
“차는 뭐 마실래?”
“…그냥 물 주세요.”
“에이, 단 거랑 곁들이려면 차가 좋을 거야. 루이보스 차 어때?”
“네, 주세요.”
무슨 차인지는 몰라도 목이 타니 일단 받아 마시고 싶었다.
주문을 받은 하녀는 곧바로 주방으로 떠났다.
이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발레리는 접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분홍색 과자를 집어 입안에 가져갔다.
“으엑, 뭐가 이렇게 달아요?”
“마카롱 처음 먹어보니? 이거 원래 달아. 보통 때는 두 시쯤 먹는데, 너랑 같이 먹으려고 여태 티타임 미룬 거야.”
에이바는 콧잔등을 찡긋하며 눈웃음을 쳤다. 이렇게 보니 마냥 콧대 높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친화력도 좋고.
발레리도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진심 어린 미소는 나오지 않았다. 입안에 형체 없이 뭉개진 마카롱이 괜히 역했다. 당장 뱉어 버리고 싶을 만큼.
찜찜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눈앞의 여인이 테렌스의 예비 정혼자라고 생각하니 황태자의 내연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선 이렇게 고백하고 싶었다.
‘죄송해요 공녀님. 황태자랑 키스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제가 본능을 못 이겨서 물고 빨고 온갖 염병을 다 해 버렸네요. 그래도 안심하세요.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잠도 안 잤거든요, 하하.’
발레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휴, 어디서 귀싸대기 맞을 말을. 내가 공녀 같았으면 그냥 아구창을 날려버렸을 거야.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하늘은 무겁고 침침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근데 너, 오늘 뭔가 힘없어 보인다.”
에이바가 발레리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간밤에 잘 못 자서요.”
그새 하녀가 들어와 두 여인의 찻잔에 루이보스 차를 쪼륵 따랐다. 목이 바짝 마른 발레리는 잔을 들어 바로 입에 댔다.
“앗, 뜨거.”
“에고, 조심 좀 하지. 후후 불어서 마셔.”
“으…. 네.”
“그럼 본론부터 얘기하자. 황태자 전하랑은 이번 주에 만났니?”
발레리는 벌겋게 데인 윗입술을 손등으로 지그시 누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만났어요.”
“그래, 그럼 좀 팔아볼래? 천하의 그분한테 어떤 숨은 매력이 있는지.”
에이바는 두 손을 한데 모으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유명 대배우의 공연이라도 보러 온 것마냥.
발레리는 눈을 깔뜨며 대답을 준비했다.
대충 생각해 둔 답변은 있었으니까.
“그분 웃는 얼굴…. 보신 적 있으세요?”
“흠, 아마 내가 여섯 살이고 그 사람이 열 살 때 처음 본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까 코웃음 치는 거 말고는 딱히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네. 웃는 법을 알기나 한다니?”
“알던데요. 생각보다 잘 웃어요.”
“그래? 나랑은 아직 안 친해서 안 웃어주는 건가. 어떤데?”
발레리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가만히 응시했다.
보조개가 엷게 팬 은은한 미소가 눈앞에 선했다.
특히 키스를 마무리한 뒤 귀밑머리를 뒤로 넘겨줄 때의 그….
“미쳤어요.”
“뭐?”
에이바가 눈살을 구기며 찻잔을 내려놨다.
“아니 그게….”
망할 주둥아리 때문에 또 눈앞이 아득해졌다.
“미친 사람처럼 웃는다는 거지? 흠, 안 웃던 사람이 웃으면 미친놈처럼 보이긴 하겠다. 근데 그게 매력이라고 할 수 있나?”
“아뇨, 그게 아니고요. 미치게 예쁘다는 건데요.”
뭐 얼마나 예쁘길래 미쳤다는 표현까지 쓰는 거지. 에이바는 벙벙한 얼굴로 귀 뒤를 긁었다. 그녀의 귓불에 꽂힌 루비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흠, 어떻길래 그래?”
“…양쪽 입가에 보조개가 숨어 있거든요. 웃으면 그게 옴폭 들어가요.”
“보조개가 있으면 매력적이긴 하지. 그 고드름 같은 사람한테 보조개가 있다니 반전이네.”
“고드름이요?”
“얼음장처럼 냉랭하게 생겨가지고 팔다리는 또 길쭉길쭉하잖아.”
테렌스는 훤칠한 체형이었다. 보통 남자들은 발레리보다 눈높이가 낮거나 비슷했는데, 그의 눈을 똑바로 보려면 턱을 살짝 들어야 했으니.
“…키가 크긴 하죠.”
“광대라도 불러서 웃겨봐야 하는 건가. 내 머리론 웃는 게 상상이 안 가네.”
“인상이 많이 달라져요. 눈매도 부드럽게 내려앉고, 입꼬리도 꽤 높이 올라가서…. 평소 표정이 12월 말이라면, 웃을 땐 5월 초 같달까요.”
“그렇구나. 근데 얼굴은 원래 내 취향이라 딱히 불만은 없었어. 그거 말고 다른 매력은 없어?”
발레리는 스스로 꽤 열의를 갖고 설명했다고 생각했지만, 에이바는 생각보다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하긴, 공녀는 황태자를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봐왔으니까…. 외모보다는 성격적인 매력을 더 파악하고 싶긴 하겠네.’
불덩이처럼 뜨겁던 찻잔은 어느덧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발레리는 데여서 벌게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상했다.
여기서 말을 더 잇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꺼낼 말이 없는 건 아닌데….’
아직 테렌스를 잘 안다고 할 순 없지만, 그의 성격은 만남을 거듭할수록 점점 윤곽이 잡히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무뚝뚝했지만 배려심이 깊었다. 식사 메뉴도 늘 세심하게 신경 썼다. 무슨 말을 꺼내든 선을 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보고를 마치면 늘 방문 앞까지 바래다줬다.
신분상 있을 법한 특권의식도 딱히 보이지 않았다. 하인들에게도 정중했고, 늘 깝죽거리는 레이븐에게도 큰 소리로 화내지 않았다.
말재간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허세 없이 솔직했다. 어쩌면 치부라고도 할 수도 있는, 관심에 목말랐던 어린 시절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털어놨으니.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운 적도 없었다. 냇가에서 칼 들고 위협했던 일도 사과를 받은 지 오래였다. 이후엔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 둘 다 아끼지 않았다.
그와 얘기할 땐 귀도 즐거웠던 것 같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듣고 있자면 포근했다. 발음은 또박또박 선명해서 한 마디 한 마디에 신뢰감이 갔다.
거기다 본인 일은 칼같이 했다. 사치를 부리는 것 같지도 않고. 세련된 매너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망할 놈이 키스까지 잘 하잖아. 이걸 재수가 없다고 해야 할지….’
발레리는 불안했다.
이런 것들을 입 밖으로 다 내뱉어 버리면, 그동안 자연스레 쌓여 온 어렴풋한 무언가가 전부 실체화돼버릴 것 같아서.
‘말하다가 스스로 설득당할까 봐 무서워. 내가 아는 그 사람 모습을 장점이라고 인정해 버리면, 진짜 그런 면들이 다 좋아져 버릴 것 같잖아….’
아, 이래서 오기 싫었던 거구나.
발레리는 눈을 내리깐 채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댔다.
“뭐야, 왜 말이 없어?”
“…글쎄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네요.”
“그래, 그럼 오늘은 이쯤 하자.”
에이바는 벌떡 일어나 옷장에서 주먹 두 개만 한 자루를 꺼냈다. 그리고 발레리의 눈앞에 툭, 내려놨다.
“자, 천 갈렌. 가져가.”
느슨하게 묶인 자루 주둥이 사이로 두툼히 쌓인 금화가 엿보였다.
실로 유혹적인 자태였다. 병사 시절엔 저만큼 벌려고 땡볕에서 삽질을 그렇게 했는데.
발레리는 자루 속을 멍하니 들여다보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 받을래요.”
“잉? 이거 받으려고 온 거 아니야?”
“아니에요. 그리고 저 이제 부르지 마세요.”
“뭐? 갑자기 왜?”
“재미없어요, 황태자 얘기. 그럼 안녕히 계세요.”
발레리는 몸을 일으켜 문으로 향했다. 에이바는 나가려는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
“잠깐.”
“…왜요?”
“그럼 다음부턴 다른 얘기 하자.”
“네? 그게 무슨….”
“내가 주는 돈 거부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더 친해지고 싶어지네. 이젠 네 얘기가 듣고 싶어. 사실 나도 황태자 얘기 재미없거든.”
이 인간이 뭐라는 거야.
가뜩이나 정신 사나운데.
“…생각해 보고요.”
발레리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방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