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황녀와의 식사에 임하는 켄드릭의 태도는 오늘도 깍듯했다.
극존칭과 경직된 표정, 딱딱 떨어지는 말투. 도무지 연인을 마주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프리다는 쓰디쓴 물약이라도 머금은 듯 눈을 꽉 닫았다.
‘내가 일방적으로 제안한 만남이긴 하지만…. 이 사람은 날 연인으로 생각하긴 할까. 언제까지 상전 모시듯 대하려는 거지.’
요즘 그가 보이는 태도는 프리다를 안달 나게 했다.
최근 켄드릭은 거의 웃지 않았다. 특히 황제와 독대한 이후 음울한 기운까지 풍겼다.
간헐적으로 웃을 때는 있었는데, 그나마 발레리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뿐이었다.
프리다는 그간 켄드릭과 나누었던 대화 장면을 천천히 돌이켰다.
그의 관심사 중심에는 언제나 발레리가 있었다. 검술을 연습할 때도 켄드릭은 그녀를 자주 언급했다.
─황녀님, 그 동작은 발레리도 많이 어려워하던 겁니다. 익히는 데 오래 걸리는 건 당연합니다.
─하하, 발레리가 저보다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는 것 같네요.
─흠, 여기저기 잔기술 넣으시는 게 마치 열다섯 시절 발레리 같으십니다.
가면무도회를 열어 달라는 요구 사항도 발레리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과연 우정일까.
정말 발레리를 친구로서 바라보고 있는 걸까.
설마 했던 의심이 점점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내가 입 맞추려 했을 때도 전혀 안 내키는 얼굴이었지. 마치 벌 받는 것 같은 표정이었어.’
프리다는 테이블 아래 잡히는 식탁보를 꽉 감싸 쥐었다. 하늘색 천이 식은땀으로 얼룩졌다.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았다.
‘불안해. 갈수록 이 사람은 나랑 가망이 없어 보여. 이젠 포기해야 하는 걸까….’
***
발레리는 뒷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일단 방문을 따야 할 것 같아서.
보고를 바깥에서 할까 생각도 했지만, 채플 복도나 후원에서 검술 수업 이야기를 하기엔 내키지 않았다.
황녀에 관한 건 아무래도 기밀 사항이니까.
다행히 며칠 전에 방 정리를 해놓은 덕에 누추한 꼴까진 아니었다. 구겨진 옷들이 옷장 안에 꽉 들어차 있긴 했으나 겉으로는 안 보이니 상관없었다.
“들어오세요.”
테렌스를 방 안에 들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는 벽에 걸린 스타티세 꽃다발을 보자마자 눈을 휘었다.
발레리는 얼른 침대맡의 기름등부터 켰다. 이제 곧 해가 질 테니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둠이 두려웠다.
그리고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방에는 의자가 책상에 딸린 것 하나뿐이었다.
켄드릭과 둘이 술을 마실 당시에도 그를 책상 의자에 앉혔고, 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침대에 앉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를 믿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 그냥 서 있자.
발레리는 책상 의자를 빼내 방향을 제 쪽으로 틀었다.
“…의자가 이거 하나밖에 없는데, 여기 앉으세요.”
테렌스는 바로 착석했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발레리는 그 앞에 멀찍이 서서 보고를 시작했다. 오늘 프리다와 어떤 훈련을 했는지. 실력이 어느 정도로 향상됐는지 그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공격이 점점 예리해지고 있어요. 저도 열심히 피한답시고 피하는데, 연습용 갑옷이랑 투구가 점점 만신창이가 되고 있거든요.”
풋. 그녀가 보고를 마치자마자 테렌스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왜 웃으세요?”
“그렇게 경직돼서 보고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군. 이제 내가 서 있을 테니 네가 여기 앉아라.”
“엥, 어떻게 그래요. 제가 감히.”
“그럼 나도 일어서 있겠다.”
테렌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 앞에 다가와 마주 섰다.
하필 또 그 자리였다.
첫 키스를 나눴던.
이 인간 일부러 이러나. 입술이 마르고 등 근육이 빳빳해졌다.
“발레리, 오늘도 수업하느라 고생 많았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요, 뭐.”
발레리는 그의 시선을 비스듬히 피했다. 그녀의 어깻죽지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비를 쫄딱 맞고 흠뻑 젖어 오들거리던 그때처럼.
“긴장되나? 나와 둘이 있는 게.”
테렌스가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보며 물었다. 발레리는 되묻고 싶었다. 그러는 너는 긴장이 되지 않냐고.
전례가 있으니 불안한 건 당연했다. 언제부턴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거짓말처럼 본능에 지배당했다.
지금도 입술이 제멋대로 활시위를 떠나 이 사람에게 꽂혀 버릴 것 같았다.
‘무서워서 눈을 못 쳐다보겠네. 저기 빨려들면 내가 무슨 사고를 칠지 몰라서.’
발레리는 테렌스의 입가를 힐끗 살폈다. 웃고 있는지 보조개가 옴쏙 들어가 있었다. 연홍색 입술 표면에는 미끈한 윤기가 돌았다.
군침이 돌았다. 찰지고 폭신한 저 입술을 한입에 삼켜 버리고 싶어서.
당장 문을 열고 예배당으로 달려가서 외치고 싶은 지경이었다.
시에나 여신님, 이건 정말 반칙 아닌가요. 지금 이 상황에서 안 넘어가면 성녀 칭호라도 내리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이렇게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단둘이 또 어떻게 버티냐고요.
“바, 방이 좁아서 그런가 봐요. 그냥 다음부턴 제가 황태자궁으로 갈게요.”
“아니, 내가 이리로 오겠다.”
“…왜요?”
“네가 보는 눈을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그곳은 사람이 많으니까.”
황태자궁은 채플에 비하면 복작복작하고 보는 눈도 많았다. 아까처럼 복도에서 입을 맞추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뿐이었지만, 그곳을 드나들 때마다 근위병들이 힐끔 쳐다보긴 했었다. 쟤가 왜 또 황태자궁에 드나들지 하는 얼굴로.
테렌스가 밤마다 채플까지 바래다주는 것도 약간 신경이 쓰였다.
대충 황태자의 산책 호위병 정도로 보이긴 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매번 여기까지 행차하시는 건 번거로울 텐데요.”
“아니. 난 오히려 네가 먼 길 찾아오는 게 신경 쓰이는데. 저번에 네가 비 맞고 온 날부터 생각한 일이다. 비를 맞아도 내가 맞는 게 낫지 싶어서.”
“아니 뭘 그렇게까지….”
발레리는 입맛을 다셨다.
감미롭게 생긴 남자가, 한없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더없이 감미로운 말을 하고 있으니까.
“너와 좀 더 편해지고 싶기도 하고.”
“저랑…. 편해진다고요?”
테렌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가장 편한 장소에서, 편한 차림으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언제까지고 네게…. 어려운 상관으로만 있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
“…….”
“물론 내가 그자만큼 마냥 편해질 수 없다는 건 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나? 나는 널…. 여자로 인식하고 있으니까.”
그자라면 켄드릭을 말하는 거겠지.
발레리는 용기를 내서 테렌스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맑고 또렷한 눈동자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그가 오랫동안 준비한 말을 꺼내고 있다는 걸.
“발레리, 난 이해하고 있다.”
“뭘요?”
“네가 나와 진지한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이유를.”
“그건….”
“우린 서로 많이 다르니까. 살아온 환경의 차이가 큰 만큼, 내게 위화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또 내가 대외적으로 주목받는 자리에 있다 보니…. 나와 공식적인 관계가 된다는 건 네겐 부담이겠지.”
발레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게 정확한 이유는 아니었으니까.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잖아. 알고 나면 절대 이러지 못할 텐데….’
그녀는 고개 숙여 발끝을 내려다봤다. 여기저기 닳아서 해진 군화와,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가죽 구두가 뚜렷이 대비됐다.
“그래서 다른 욕심은 내지 않기로 했다. 난 지금은…. 네가 외로울 때 달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해.”
테렌스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에 품은 여자를.
외로운 그녀가 체온부터 나누고자 한다면 기꺼이 응하리라고 다짐했다.
몸 닿는 곳에 있다 보면 언젠간 날 필요로 하지 않을까. 뒤바뀐 순서로라도 천천히 가다 보면, 언젠가는 진심이 통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이런 내가…. 싫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
테렌스의 얼굴이 서서히 다가왔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 한가운데 빨려들 수밖에 없을 만큼.
발레리는 크게 심호흡했다. 출렁대는 가슴을 어떻게든 진정시켜야 했다.
머릿속이 온통 난장판이었다.
비상이었다. 난생처음으로 정체를 부정하고 싶어져서.
펠런 단원 발레리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신분증명서에 쓰인 대로, 프레이저 후작령의 농가에서 태어난 발레리 로빈슨이었다면. 그랬다면 이 남자의 접근을 더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싫지 않은지는 이미 오래였다.
속절없이 끌리는 게 문제였다. 강력한 자석 앞에 무방비하게 놓인 쇠붙이처럼.
‘…아마 이번 생엔 온갖 죄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지옥 갈 운명인 것 같네.’
속으로 깊이 한탄하며, 발레리는 테렌스의 얼굴을 다시 직시했다.
그는 눈부신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발레리.”
“…네.”
“키스하게 해줘.”
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발레리가 먼저 그의 입술을 덮쳤다. 마치 허락을 구한 사람이 그가 아닌 그녀 본인이었던 것처럼.
활시위가 손을 떠났다. 발레리는 쏜살처럼 그의 속살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테렌스는 그녀의 날카로운 침입을 여유롭게 받아들이며 허리를 감아 안았다.
맞닿은 두 입술이 온통 끈적해진 후에야 테렌스는 템포를 점점 느리게 가져갔다. 폭풍우처럼 몰아치던 키스는 점차 여리고 촉촉한 봄비처럼 잦아들었다. 발레리도 그의 리듬에 맞춰 녹녹한 혀를 보드랍게 굴렸다.
격정에 휩싸여 어쩔 줄 모르던 그녀를 오히려 잔잔히 달래주는, 그런 차분한 키스였다.
테렌스는 소리 없이 웃으며 입술을 뗐다.
“자꾸 먼저 입 맞추는 걸 보면, 내 매력을 아는 것 같은데.”
“…….”
몽롱하게 풀려 있던 발레리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의 입에서 매력이라는 말이 나오니, 문득 에이바의 앙칼진 목소리가 떠올라서.
─영업을 좀 해봐.
─잘생기고 키 큰 거 말고 다른 매력이 뭐가 있는지 좀 알아봐 줘.
생각해 보니 그녀는 에이바에게 자신 있게 장담했었다.
테렌스와는 황태자와 병사 사이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새 테렌스와 두 번이나 입술을 섞었다. 아무 사이 아니라기엔 뜨끔한 구석이 있었다.
“…배고파요. 소시지 먹을래요.”
어떡하지. 조만간 호출당할 것 같은데.
발레리는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음식이 든 종이봉투를 뒤적거렸다. 그녀는 달큼하게 젖은 입술을 쓱 문지른 뒤 굵은 소시지 하나를 입에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