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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70)화 (70/173)

70화

발레리는 프리다와 막 오후 대련을 마쳤다.

오늘도 급소를 제대로 공략당한 발레리의 갑옷은 군데군데 흠집이 패어 있었다.

얼굴과 목을 완전히 덮는 양철 투구에도 칼끝에 눌린 자국이 선명했다.

여전히 발레리는 프리다를 상대할 때 전력을 다하진 않았지만, 황녀의 공격이 점점 예리해지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두 여인은 석실 소파에 앉아 물을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투구를 막 벗어든 발레리는 문득 프리다에게 전해줄 말이 떠올랐다.

“아 맞다, 황녀님.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요.”

“응? 뭔데요?”

프리다의 눈썹산이 둥근 호선을 그렸다.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저 이제 수요일하고 금요일에도 저녁 식사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왜요?”

“황태자 전하가 이제 집무실에 안 찾아와도 된다고 하셔서요.”

“그렇구나….”

반가운 이야기를 전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 프리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오히려 곤란해하는 얼굴이었다.

“황녀님, 왜 그러세요?”

“아…. 아니에요.”

마침 오늘이 수요일이라 꺼낸 얘기였다.

지난 주말, 테렌스는 더 이상 집무실로 보고하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었다. 본인이 방으로 직접 찾아오겠다면서.

황태자가 몇 시에 찾아올지는 모르는 일이니, 저녁은 황녀와 함께 먹어도 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프리다는 시선을 내리깐 채 시간을 끌고 있었다.

꺼내기 어려운 말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아, 혹시 거절하시려는 건가?’

“황녀님, 방금 말 취소요. 수요일 금요일에 그냥 평소대로 퇴근할게요. 저도 혼자 운동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하하.”

“…미안해요.”

발레리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서운하기는 하지만, 미안해할 만큼의 일은 아니지 않나 싶어서.

‘그러고 보니 그동안 수요일, 금요일은 켄드릭하고 둘이서만 저녁 드셨을 텐데…. 방해받고 싶지 않으신 걸 수도 있겠네.’

내가 눈치가 없었구나. 발레리는 무릎을 탁 쳤다.

일찍이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하하, 미안해하실 일은 전혀 아니에요! 근데…. 대신 저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부탁이 뭐예요?”

“춤 연습할 때 그냥 평소대로 입으면 안 될까요? 드레스는 아직 너무 불편해서요.”

발레리는 부끄러운지 머리를 긁적였다.

프리다는 빙그레 웃었다. 그게 뭐 어려운 부탁이라고.

“그래요. 어차피 발레리가 무도회 때 입을 드레스랑은 다를 테니까…. 곧 치수 재서 주문 넣을 건데, 그거 나오면 입고 하는 걸로 해요.”

“…네, 황녀님.”

발레리는 들릴 듯 말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의 드레스가 뭔지. 어차피 나중에는 입고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갑갑했다. 황녀가 주문하는 드레스는 왠지 지금 것보다 더 화려하고 불편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휴식을 마친 두 여인은 곧바로 검술 수련을 재개했다. 한결 가벼운 몸으로 무도회 춤 연습까지 했다.

네 명이서 추는 카드릴을 둘이서 연습하려니 약간 어색했지만, 동작 자체는 어렵지 않아서 즐겁게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발레리는 프리다가 춤추는 모습을 감상하는 게 좋았다.

‘정말 행복해 보이시네. 무도회에 직접 못 가시는 게 얼마나 아쉬우실지 이해가 가. 내가 대리만족을 시켜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춤 연습까지 모두 마친 프리다는 발레리를 배웅하면서도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발레리는 괜찮다는 표시로 씩씩하게 웃어 보이며 석실을 빠져나왔다.

황녀와 켄드릭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길 바라며.

발레리는 담담한 얼굴로 나선형 계단과 기도실을 거쳐 복도까지 나왔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서 멈춰 섰다.

방문 앞에서 두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븐, 그리고 테렌스였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계셨어요?”

“방금 왔다.”

이렇게 일찍 와 있을 줄이야.

레이븐은 발레리에게 다가와 큼지막한 종이봉투를 품에 안겨줬다.

“이건 뭐예요?”

“저녁 안 잡수셨을 것 같아서요. 두 분이서 드시면서 하시라고요.”

봉투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안에는 갓 구운 커다란 빵과 함께 탱글탱글한 소시지 다섯 줄이 담겨 있었다.

“아…. 감사해요, 마법사님.”

“별말씀을요. 그럼 전 가볼게요. 두 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레이븐은 작별 인사와 함께 후문 쪽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순식간에 둘만 남아버렸다.

발레리는 멀뚱히 서서 테렌스의 모습을 위아래로 관찰했다.

그의 복장이 평소와 달라서다. 원래 입던 제복은 어디로 집어치웠는지, 맥주 축제 당시 입었던 그 복장 그대로 찾아왔다.

가벼운 흰색 드레스 셔츠에 진회색 바지. 그나마 꽃목걸이는 안 걸고 있어서 다행인 걸까.

머리카락도 달랐다. 아무것도 안 바른 보송한 백금발이 이마를 가지런히 덮고 있었다. 보통 때는 포마드를 발라 옆으로 넘기고 다녔던 것 같은데.

“어, 오늘은 편하게 하고 오셨네요.”

“…이 편이 낫지 않겠나?”

테렌스가 약간 긴장한 빛을 띠며 물었다.

“뭐가요?”

발레리가 천연한 얼굴로 되묻자 테렌스는 대답 없이 조용히 미소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다가와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별안간 와 닿은 말캉한 감촉에 발레리는 헉, 소리를 내며 한 발짝 물러섰다. 품에 안은 음식 꾸러미를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으억! 복도에서 뭐 하는 거예요!”

“사제들 다 퇴근한 것 확인하고 왔다.”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혼란스러웠다.

작위를 받는 것도 싫고, 교제하는 것도 싫다고 분명히 못 박았던 것 같은데.

테렌스는 정말 스스럼없이 연인처럼 다가와 입을 맞췄다. 심장은 왜 또 거기에 반응하는지 제멋대로 벌떡거리고 있었다. 이러다 멎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하아…. 이렇게 된 건 내 책임이겠지. 내가 그때 침실에서 못 참고 먼저 키스했으니까.’

발레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본능을 참지 못한 결과, 그에게 잘못된 신호를 줘 버렸다는 걸.

그때는 정말 머리가 돌아버렸던 걸까. 그와 어떻게든 몸을 겹치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더 괴로운 건, 지금 눈앞의 그를 보면서 드는 생각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무슨 문제를 말하는 거지. 목격자가 아무도 없는데.”

왜 이 남자는 목소리에도 색기가 줄줄 흐르는지. 귓가에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한숨이 나왔다. 일단은 밀어내야 할 텐데 쉽지가 않아서.

“하…. 저번 주말에도 그렇고 왜 자꾸 뽀뽀를 하고 난리세요?”

“싫은가?”

그녀의 일갈에 테렌스는 단도직입적으로 의향을 물었다.

“…저랑 사귀는 사이라고 착각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런 착각한 적 없다.”

“저번에 침실에선 제가 실수했어요. 그냥 없던 일로 해주세요.”

“외롭다면서.”

“네?”

테렌스는 온전히 간직해두고 있었다. 그때 침실에서, 그녀가 다급히 입을 맞춘 뒤 내뱉은 말들을.

발레리도 떠올리고야 말았다. 침대 위에서 정신없이 뇌까렸던 헛소리를.

─또 외로워서 이러나?

─아….

─나와 이러고 있는 건…. 그걸 달랠 방법이고?

─그런 걸로 해요.

‘와, 내가 맨정신으로 그랬다니. 미친…. 주둥이를 아주 꿰매버려야 했어.’

“네 외로움을 달래주고 싶을 뿐인데…. 뭐가 잘못됐나?”

“아니, 그게 그….”

눈앞이 아찔했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생각하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사실 외롭다고 한 건 변명에 가까웠다. 그냥 아무 이유나 찾아서 대충 둘러댄 것일 뿐.

황태자도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고작 일개 병사가 외롭다는 이유로 어떻게든 달래주겠다며 이렇게 부딪쳐오고 있으니.

발레리는 바짝 굳어 어물거리고만 있었다.

그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렌스는 싱긋 웃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보고부터 받겠다. 방 안에서.”

***

이날 프리다는 다소 긴장한 얼굴로 켄드릭을 마주했다.

요즘 프리다는 불안했다.

기분 탓일까. 자신을 보는 켄드릭의 눈빛이 너무 건조한 것만 같아서.

원래도 그다지 사심이 느껴지지 않는 눈이었지만, 도무지 연애 상대 같지가 않았다.

시키는 말에만 고분고분 네, 네, 하고 대답할 뿐. 그저 까마득히 높은 상관을 대하듯이 굴었다. 눈도 늘 내리깔았다.

대화 중에도 이따금씩 멍하니 허공에 한숨을 뿜어내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켄드릭…. 입맛이 별로 없어요?”

“아닙니다, 황녀님. 잘 먹고 있습니다.”

접시에 놓인 음식이 그대로인데, 뭘 잘 먹고 있다는 걸까.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요?”

“…네.”

“뭐죠?”

“무도회 말입니다….”

“무도회?”

“가면무도회로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가면무도회로 해 달라고요?”

건국제 무도회 형식을 완전히 바꿔 달라는 켄드릭의 요구에, 프리다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켄드릭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굴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황제를 독대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처럼.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발레리가 얼굴을 내놓고 참석하기엔 지나치게 큰 행사라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많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프리다는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무도회를 주관하는 황후에게 부탁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한 달이 남았으니 준비 작업은 대강 끝났을 터였다.

행사 형식을 바꿔 달라 하기엔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혹시 발레리가 그렇게 해 달라고 했나요?”

“아뇨, 그냥 제 의견입니다. 아시다시피 발레리는 체격도 그렇고 외모가 눈에 띄는 편입니다.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꾸미더라도 불필요한 시선을 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네요….”

켄드릭의 말이 맞았다. 발레리는 어떤 드레스를 입혀놓더라도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신장이었다.

남장을 시키기에도 걸리는 게 있었다. 이미 근위대 장교들은 그녀가 남자로 위장한 모습을 알고 있었으니.

“부탁드립니다. 발레리는 아직 그런 장소에 가본 경험이 없어서…. 얼굴을 가린 채 최대한 편하게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발레리의 신원을 숨기자고 모두에게 가면을 씌우자니.

지나친 요구라는 생각부터 들긴 했다.

하지만 프리다는 그녀에게 중요한 일을 맡긴 상태였다.

사람들 앞에서 서신을 읽어야 할 텐데, 한꺼번에 쏠리는 시선이 불편할 수도 있었다.

만에 하나 발레리에게 무대 공포증 같은 게 발현한다면, 서신을 제대로 읽지 못할 위험도 있었다.

“…일단 알겠어요. 초청장 발송이 얼마 안 남은 걸로 아는데, 오늘 루퍼트를 통해 어머니께 기별을 넣어 볼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황녀님.”

켄드릭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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